정치입지 다졌으나 경제 불안
  • 박중환 편집위원대리 ()
  • 승인 1990.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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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대통령 취임 두돌 중간평가… 남북관계 개선, 분배정의 실현 등 과제

盧泰愚대통령이 취임 2주년을 맞았다. 1988년 2월25일 상오, 새벽녘까지 촉촉이 내린 비로 안개가 옅게 깔린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에 마련된 취임식 단상에서 그는 국민에게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 개막’을 약속했다. 이제 ‘그날의 약속’을 실현시켜야 할 시한 5년 가운데 2년은 지나갔고, 3년이 남은 셈이다. 임기 5년을 포물선으로 그린다면, 그는 시기적으로 중간지점의 꼭대기에 올라서 있다.

 특히 그는 지난해 12월15일 야3당 총재들과의 회동에서 그의 숙명적인 멍에였던 5공청산을 ‘대타협'이라는 절묘한 막장탈출로 벗어났다. 이로부터 한달 남짓 후인 지난 1월22일에는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당을 실현해 그동안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여소야대 정국을 여대야소로 바꾸어놓았다. 또 87년 12 · 16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두고 불쑥 내밀었다가 ’목구멍에 걸린 가시‘ 꼴이 되었던 중간평가 시비에서도 이미 해방되었다.


“북방외교 · 토지공개념 도입 높이 평가해야”

 그러나 그는 지난 2년간 5공청산과 광주문제 매듭 과정에서 ‘그날의 약속’을 이미 어겼고, 공안 정국과 전교조 사태 등에 대응했던 그의 자세는 26분간에 걸쳐 엄숙히 밝혔던 ‘그날의 약속’을 스스로 변질시켰다는 비난을 적지않게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제정책의 실기, 물가불안, 부동산 투기의 만연과 주거정책의 실패, 민생치안 부재 등 그의 失政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야권에서는 “그는 지난 2년 동안 국민의 뜻을 무시하면서도 듣는 것처럼 행세하다가 ‘벼랑끝에 서면 反戰’하는 전략적인 처세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찾고 넓히는 데 시간을 거의 다 써버렸다”고 혹평하고 있다.

 반면 여권에서는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정치권의 권위주의를 이만큼 청산한 노대통령의 치적을 인정해야 한다”며 “무리없이 군의 중립화 기반을 마련했고, 북방정책을 과감히 펴 헝가리 폴란드에 이어 소련과의 수교도 머지않아 실현될 것이며 또 지공개념을 도입하는 등 어느 전직 대통령도 실현시키지 못한 개혁을 실천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치적’을 이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여소야대 정국에 대처해온 형태를 시기적으로 크게 3期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접근방법이 될 듯하다.

 1기를 취임부터 89년 3월20일 중간평가 무기연기 발표까지로 본다면, 2기는 그 이후로부터 89년 12월15일 청와대 ‘대타협’까지, 3기는 ‘대타협’ 이후 정계개편이 구체적으로 모색되고, 나아가서 3당합당 선언에 이어 민자당이 창당되는 현재까지로 상정할 수 있다.


13대 총선 참패가 첫 시련

 1기 동안, 그의 정국대응 자세는 적어도 초기에는 ‘그날의 약속’을 이행해보려는 의지를 보였으나 청문회 정국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급격히 달라졌다.

 노대통령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3대 총선개표 결과 민정당 참패와 이에 따른 여소야대의 국회 의식구조였다. 5월18일 金大中 · 金泳三 · 金鍾泌씨는 ‘80년 봄’ 이후 처음으로 만나 국회에 6개 특위를 구성하는 데 전격적으로 합의함으로써, 노대통령은 여소야대의 높고 두꺼운 벽을 실감해야 했다. 그는 국회가 열리기도 전부터 5공의 모든 것을 씻어 없애야 한다는 ‘大野’의 위세에도 불구하고, 국회개원 이틀전인 5월28일 야 3당총재와 취임후 첫 청와대회동을 갖고 6개 특위구성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후 鄭起勝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7월2일), 국회법개정안 여야합의처리(7월7일), 5공특위 청문회 개회(11월3일), 광주특위 청문회 개회(11월8일), 全斗煥씨 백담사 은거(11월23일) 등으로 이어지는 소용돌이 정국에서 노대통령은 5공과의 단절에 한계를 보이면서도 여야 합의를 유지하려는 일단의 노력을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전두환씨의 국회 출석증언 등 야권의 끈질긴 공세에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는데, 당시 원내총무였던 金潤渙의원이 “어느 야당과든 연합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푸념을 털어놓은 것은 이같은 노대통령의 심정을 대변한 것으로 풀이됐다.

 이런 구상은 12월2일 당시로서는 아직 구체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야당과의 정책연합이 가시화되는, 어쩌면 야당공조가 ‘무적함대’에서 ‘난파선단’으로 전략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89년도 예산안 일반회계 19조3천여만원을 민정-민주-공화 3당의 연합으로 표결 통과시킨 것이 바로 그것이다.

 민정당은 정책연합이란 이름 아래 야3당공조를 각개격파전략으로 와해시켰고, 야3당간의 정국주도 경쟁을 이용해 ‘목구멍 속의 가시’를 빼내는 데 성공했다.

 2기에 접어들어 노대통령은 김영삼총재의 중간평가 고집을 뜻밖에 굴러들어온 동해시 보궐선거에서의 민주당 후보매수사건을 이용해 잠재울 수 있었고, 그대신 김총재에게 소련방문이라는 초당외교의 기회를 열어주어 입지를 넓혀주었다.

 한편, 당시 김대중총재의 유럽순방과 관련된《주간조선》보도의 왜곡시비로 지쳐 있던 평민당에게는 공안정국이라는 파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대통령은 공안정국을 통해 분열된  여권내의 보수 반공세력을 재규합하는 한편, 야권이 끈질기게 요구하는 전두환씨의 국회증언과 5공 핵심인사 공직사퇴 문제를 희석시키는 효과를 얻었으나 이에 따른 비난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가 88년 7월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에서 ‘남북한 동포간의 상호교류’를 약속했고, 뒤이어 10월19일 UN총회 연설에서 ‘상호교류와 자유로운 왕래’를 제의했던 사실에 비춰보면 공안정국은 모순되게 출발한 것이었다는 지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사람들의 시대’ 약속 지킬 차례

 노대통령은 이 시기에 5공청산을 강력히 요구하는 평민 · 민주 두 당을 저울질하다 80년대가 저무는 89년 연말에야 이들 문제의 매듭을 서둘렀다. 그는 12월4일 유럽순방을 마치고 돌아와, 정계개편의 전조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가운데 ‘과거 매듭’에 박차를 가해 3김총재로부터 ‘대타협’을 받아냈다.

 정호용의원의 의원직 사퇴 등 핵심인사의 처리는 그런 대로 실현되었으나, 전두환씨의 섣달 그믐날 국회증언은 중도하차하는 해프닝을 거치면서 90년대의 원단은 밝았다.

 노대통령은 ‘과거’시비는 끝났다고 거듭 밝혔고, 김영삼총재는 상도동 자택에서 원단 휘호를 예년의 大道無門과는 달리 草木之時라고 힘차게 썼다. ‘하찮은 풀과 나무도 제 때가 있다’는 말이었고, 그 '때‘는 불과 20여일뒤 3당 합당으로 나타났다.

 3기는 하늘도, 땅도, 모두 함께 놀란 대지진의 충격으로 시작된 셈이다. 노대통령은 자신에게 대권을 안겨준 민정당의 간판을 끝내 자신의 손으로 내렸고 재기의 기회를 엿보는 5공세력이 설 자리를 원천적으로 없앴다.

 민주자유당이 출범한 뒤 노대통령의 표정은 지난해 연말과는 딴판이라는 것이 청와대를 다녀온 인사들의 이야기이다. ‘목구멍 속의 가시’도, 숙명적인 명에도, 발목을 붙잡고 있던 족쇄도 모두 제거한 그는, 앞으로 3년동안 민자당으로 모인 기존 3당의 구성원들을 생화학적으로 융합시켜 나가야 하는 새로운 점을 두 김최고위원과 나눠지게 되었다.

 그의 앞에는 이미 벌여놓은 산적된 일들과 남북한의 관계개선 · 내각제로의 개헌 등 새로운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 외교적 과제보다 침체된 경제를 회복시키고 분배와 사회정의를 바로잡아 보통사람이 진실로 사람대접을 받는 시대를 여는 일이 더 급해 보인다. 이것은 바로 ‘그날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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