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후죽순 새 여성지 ‘고급’표방의 뒷모습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0.03.1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문화 양상… “선정성 배제”뒤엔 과소비 부추김 역작용도

요즘 서울시내 육교에는 ‘고학력 중상층을 위한 최초의 고급여성지’라는 한 여성지의 창간광고가 많이 눈에 띈다. 비단 이 여성지만이 아니다. ‘품위있는 당신이 기다리던 여성지’, ‘지적 품위와 고상한 문화의식을 고취하는 고급여성지’등 저마다 문구와 표현은 다르지만 ‘뭔가’ 기존의 여성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애써 강조하는 고급여성지들이 연이어 탄생 선언을 하고 있다.

 올해만도, 중앙일보사가 ‘라벨르’를, 민주일보사가 ‘엘레나’를 선보였고, 서울신문사와 ‘우먼센스’를 발행하는 서울문화사도 머지않아서 고급여성지를 선보일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동안 정치인들의 속사정과 연예인 스캔들을 앞다투어 다루던 여성잡지계에 난데없이 고급 · 품위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마리안느’와 ‘세계여성’이 출현하면서부터이다. 한국언론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80년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격월간 및 월간 형태로 발행되어온 종합지 성격의 기 · 미혼여성지는 89년말 현재 모두 21종. 지금도 충분히 포화상태를 이룬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잡지가 줄이어 창간되고 또 한결같이 고급여성지임을 내세우고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광고주들의 높은 선호도도 창간러시에 한몫

 광고업계에서는 가장 큰 요인으로 ‘광고가 있는 한 절대로 밑지지 않는 여성지’의 특수성을 꼽는다. 지난 1월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이 조사한 결과로는 ‘여성중앙’ 90년 1월호의 경우 전체 5백2면 가운데 2백86면을 광고로 채워 광고비율이 56.97%에 이른다. 이처럼 본말이 전도된 경우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여성지의 광고비율은 평균 30%로 다른 매체에 비해 광고비중이 특히 높다는 것이다.

 광고대행업체인 제일기획의 한 관계자는 “텔레비전 광고가 폭주, 줄을 서도 따기 힘든 상황으로 변함에 따라 많은 광고주들이 여성지를 대체매체로 선호하고 있다”며 그 이유를 “소비생활이 주도권을 여성들이 쥐고 있는 데다 많은 사람들이 돌려보고 오래 모아두는 특성을 갖고 있어 광고효과가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89년 한해, 주요여성지 11종의 연광고액은 3백50억원선으로 우리나라 잡지업계 총광고액 8백억원의 4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 그러니 최소한 광고주를 끌어들일만한 부수만 유지한다면, 여성지는 광고료 수입만으로도 지탱할 수 있는 ‘땅짚고 헤엄치는 장사’인 셈이다. 더욱이 구매력이 상대적으로 높은 중산층들이 보게 될 고급여성지야말로 고가품 소비재를 선전하기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게 아니냐는 것이 이 관계자의 지적이다. 비록 여성지는 아니지만 고급인테리어 전문지인 ㅎ지는 한번 광고를 내려면 ‘줄을 대고’ 기다려야 할 정도로 광고주들에게 인기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3S(섹스, 센세이셔널리즘, 스캔들) 일변도의 여성지에 대한 독자들의 식상’과 ‘새로운 잡지에 대한 기대감’이 고급지 출현의 배경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元佑鉉교수(고려대 신문방송학)는 70년대 중반부터 여성지의 전문화 · 세분화 경향을 보인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이제 우리사회에서도 정보욕구가 높은 고학력, 중산층 주부들의 욕구를 수용해줄 잡지가 필요한 시점에 이른 것”이라고 분석한다. 다시말해 일조의 시장분화현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급여성지를 표방하는 잡지들이 연예인 스캔들 기사나 성문제를 줄이는 대신 취미 인테리어 · 건강문제로 채우고 있는 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라벨르’의 金炯秀국장은 “이제까지 여성지들은 주로 남의 이야기, 스캔들에 비중을 두어온 것이 사실”이라며, “여성들 자신의 이야기, 삶의 질을 높이는 문제에 더 역점을 둘 것”이라고 잡지의 방향을 밝힌다.

 일단 전문화 · 세분화라는 점에서는 여성지의 발전된 모습으로서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으나 또다른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우리나라 웬만한 여성들은 가볼 엄두도 못낼 ‘동경의 뷰티코스 33코스’, ‘백악관의 인테리어’ 등이 실린 한 여성지의 경우가 그것이다. 또다른 ‘고급여성지’도 ‘모피코트 컬렉션’, ‘전신마사지 시술소’ 등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李美卿부회장은 “폭로경쟁을 벌이던 여성지가 이제는 품위라는 명분을 내걸고 과소비를 부추기는 호사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이런 여성지들의 고급화 선언을 두고 기존 여성지와 별다른 내용상의 변화도 없이 “다른 여성과는 무언가 다르길 바라는 여성들의 허영심만 자극하는 영업상의 차별화 전략일 뿐”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나오고 있다.

 元佑鉉교수는 “3S가 빠진 대신 무엇을 더 채워야 할 것인가가 고급여성지의 숙제”라고 전제하며 “사회문제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을 충분히 반영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고급지의 상업적인 성패는 독자의 수용여부에 달린 것이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잡지를 만드는 이들이 ‘고급과 품위’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