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대사 발언 시비에 한국 가톨릭 속앓이
  • 김당 기자 ()
  • 승인 1990.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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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들, ‘문제 인터뷰’에 “한국민 멸시” 비난

咸世雄신부 반박문 발표… 3월19일 주교회의 ‘관심’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어요.”

 지난해에 일련의 ‘방북사태’를 빌미로 틀이 잡힌 공안정국속에서 상영되었던 영화 <로메로>에서 한 신부가 엘살바도르 군사정권에 의해 암살당하기 전에 로메로 주교에게 한 말이다. 우리나라의 현실이 영화에서 그려진 엘살바도르보다는 ‘덜 과격’하달 수 있고 올해의 상황도 지난해에 비하면 다소 조용한 편인데 한 신부의 기고문이 발단이 된 보혁갈등이 갑자기 천주교안에서 재현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그 갈등은 엄밀히 말하자면 지난해 이반 디아스 주한교황청대사(대주교)가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와 그 인터뷰 내용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교회민주화를 주장한 咸世雄신부(가톨릭대 신학부 교수)의 기고문을 일부 언론에서 확대 보도한 데서 비롯되었다(아래 상자기사 참조).

 따라서 교황청대사관측에서 “왜 이제 와서 야단법석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한 대사관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해명을 한다 해도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결과만 낳을 뿐, 양쪽 다 도움이 안된다는 게 대사의 처지”임을 전제하고 “다만 지난해 인터뷰 시점과 인터뷰가 실린 <중앙일보> 기사와 <한국일보> 2월15일자 기사의 차이를 주목해달라”고 말하고 있다. <중앙일보>에 실린 “한국에 있어선 데모크라시(민주주의)가 데모크레이지(시위를 일삼는 것)로 바뀐 것 같아요”라는 표현이 <한국일보>에서는 “한국에 있어서는 데모크라시(민주주의)가 데모크레이지(광적인 민주주의)로 바뀐 것 같다”라고 달리 표현됨으로써 파문이 확산되었다는 것이 그 관계자의 해석이다. 또 대학가 시위로 몹시 시끄러웠던 인터뷰로 인해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대사관 관계자 말대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뒤에 평신도들은 지난해 10월 성체대회가 끝나자 유현석변호사(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성염교수(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 소장 · 외대 철학과) 등 신자 53명이 서명한 성명서를 통해 “디아스 대주교의 회견문은 사실에 대한 왜곡, 동료 성직자에 대한 매도, 주재국 국민에 대한 멸시에 찬 것”이라고 비난했었다. 다만 이번 경우처럼 교회 밖으로까지 시비가 확산되지 않았을 따름이다. 사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으로 줄임)과 평신도단체들이 디아스 대사가 본인의 보수적 시각을 한국천주교체 ‘감염’시켜왔다고 판단, 반발을 보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성염교수 같은 이는 이미 갈등이 교회 밖으로 불거지기 전부터 <가톨릭신문>같은 교회내 매체를 통해 대사를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다. 예를 들어“교회(주교)의 인가를 받지 않고 ‘가톨릭’을 자처하는 비인가단체(사제단 포함)에 대해 주교단이 단호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대사의 주장에 맞서, 성염교수는 이른바 비인가단체들은 오히려 “까사롤리 추기경(바티칸 국무부장관)의 말처럼 ‘민중이 무기를 들게 하는 원인을 제거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반박해왔다.

 진보적 천주교 신자들이 디아스 대사를 비판적으로 보는 까닭은(아래의 상자기사에서 나타나듯) 한국천주교의 최고기구인 주교회의에 정례적으로 참석, 연설을 통해 자신의 보수우익적 시각을 전파해온 ‘물증’말고도 또다른 ‘심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심증이란 이를테면 디아스 대사가 가톨릭신자임을 ‘자처하는’ 일단의 정부 고위당국자나 친여인사들과 잦은 접촉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천주교 관측통에 따르면 김기춘 검찰총장과 민자당 유학성의원 등을 비롯한 군장성 출신 신자모임인 미리내회 회원들, ‘재야’의 보수우익 선봉장임을 자처하는 김용갑 전총무처장관 등과 교분을 맺고 있는 디아스대사가 자신이 공감하는 정부당국의 주장을 대변,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보수화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주교 관측통들은 이와 같은 심증을 근거로 지난해 공안정국속에서 당국이 취한 강경조처들도 주교회의의 보수적 기류와 ‘관련’이 있다고 유추하고 있다. 이를테면 지난해 춘계 주교회의 직전에 김기춘 검찰총장이 “성당 등에도 시국관련 수배자의 소재가 확인되면 공권력을 투입해 연행하라”고 지시를 내린 점, 가톨릭관련 단체회원들의 구속, 7월에 명동성당 구내에 공권력을 투입하고 문규현신부 파북과 관련 사제단소속 신부3명을 구속한 것 등이 적어도 교회(주교단)의 묵인없이는 어려운 일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사제단의 시각도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를 비롯한 평신도 단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대외적인 견해 표명은 삼가고 있다. 지난 2월19일에 청량리성당에서 열린 사제단 상임위회의에서도 디아스 대주교의 발언과 함신부의 기고문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있었으나 자칫하면 “종교계에 보혁구도를 설정하려는 정보당국의 음모에 말려들 공산이 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 그날 회의에 참석한 이의 말이다. 이와 관련 장용주신부(사제단대변인)도 “미묘한 문제인 만큼 신중한 절차를 밟아 ‘결정적’인 시기에 사제단의 공식적인 태도를 표명하기로 유보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제단의 ‘관망’자세에 성이 안찬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에서 사제단 회의 바로 다음날 성명을 발표, 디아스 대사에게 ‘내정간섭’적 발언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한편 아직껏 사목적 태도를 표명하지 않고 있는 주교단에까지 ‘유감’을 표시하는 등 갈등이 수그러들 기미가 안보이고 있다.

 결국 사제단의 공식태도 표명은 없었지만 ‘선택’은 이미 정해진 만큼, 3월19일부터 열릴 예정인 춘계 주교회의에서 주교단이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먼저 택할 것인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쪽을 고수할 것인지에 따라 진짜 보혁구도의 틀이 잡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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