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기나긴 비극
  • 박순철 (편집국장대우) ()
  • 승인 1991.06.2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6월 8일자 <한국일보>의 2면 한 구석에는 짤막한 1단 기사가 실려 있었다. 한 문장으로 끝났다. “훈 센 캄보디아 총리가 이달 하순이나 7월에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할 예정이라고 일본의 <지지통신> (時事通信)이 6일 보도했다”가 그 전부였다.

 어쩌면 하찮은 이 기사에 눈길이 끌린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태국 국경지대의 캄보디아 난민들을 구호하기 위한 국제기관에 잠시 동안 일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ㄱ자를 옆으로 뒤집어 놓은 것 같은 태국과 캄보디아의 긴 국경선을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수용소들에는 지금도 30만명 이상의 난민이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월 옛 동료가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오늘 현재 난민 수효는 32만5천명을 좀 넘습니다. 캄보디아 내부 사정은 아주 나쁜 것 같습니다. 이곳도 물이 큰 문제입니다. 지난 우기에 비가 내리지 않아 인간의 수원지들이 거의 말라 버렸습니다. 물을 공급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듭니다. 모두들 평화협상과 난민의 본국 송환이 임박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포격의 굉음이 들리는 상황에서는 믿기가 힘듭니다.”

 방콕에서 동쪽으로 4시간쯤 차를 달리면 아라냐프라테트라는 국경의 소도시에 도착했다. 지난날 태국과 캄보디아를 연결하는 철도가 지나던 이 국경도시는 보통 ‘아란’이라는 이름으로 줄여 부르는데 서부영화 같은 다소 난폭한 분위기가 떠돈다. 그것은 태국어로 서양사람을 뜻하는 ‘화랑’들이 이곳 거리를 누비고 있다는 사정과 관계가 있다. 이 도시에는 태국 국경의 난민을 돕는 유엔기구와 각국 자원봉사단체의 이를테면 ‘전방사령부’들이 자리잡고 있다. 약간은 위험하지만 인도주의적 일에 봉사한다는 흥분이 도시 분위기를 지배하는 이곳에는 ‘돈많은’ 서양인을 노리는 범죄자들과 정보원들도 몰려든다. 가끔 이 도시의 외곽이나 북쪽의 소읍 타프라야에는 캄보디아쪽으로부터 포탄도 날아와 긴장된 분위기를 돋운다.

주민 38%는 수용소에서 태어나 바깥세상 구경 못한 어린애
 아란에서 차를 타고 국경을 따라 북쪽으로 2시간쯤 달리면 유엔이 ‘사이트2’라는 군사적 냄새가 나는 이름을 붙인 난민수용소가 나온다. 이곳은 농담조로 ‘세계 제2의 캄보디아인 도시’로 불린다. 수용인원이 18만명이나 돼 프놈펜 다음으로 큰 ‘도시’인 셈이다. 대나무로 골격을 세운 위에 이엉으로 지붕으로 덮은 엉성한 원두막 집들이 총총히 들어선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10년 이상 거주하고 있다. 주민의 38%는 이 수용소에서 태어나 바깥세상을 전혀 구경 못한 어린애들이다. 뙈악볕이 내리쬐는 어느 8월 오후에 이곳에서 난민들을 위해 고생하는 한국인 가톨릭 수사 두분을 만난 것은 뜻밖의 즐거움이었다.

 아란에는 또다른 한국인 부부도 살았다. ‘닥터 리’와 그의 부인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지 2년 만에 미국의 자원봉사단체에 들어가 태국 국경을 찾았다. 그들은 이 국경도시의 남쪽에 위치한 크메르 루주파의 수용소 ‘사이트8’에서 일했다. 환자들은 몰려드는데 의사소통도 안되고 약품이나 치료기구도 부족해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영어도 서툴러 동료들과도 오해가 잦았다.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수용소 내에 포탄이 떨어질 때, 규정에 의해 난민들을 두고 자기들만 다른 외국인과 함께 수용소 밖으로 피신하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보수만 받으며 무섭게 일했다.

국민에게 고통만 주는 못된 지도자들이 늘 지배했다”
 캄보디아 난민들이 이 동남아의 작은 나라의 국명이 1970년에 ‘캄보디아 왕국’에서 ‘크메르공화국’으로 바뀌고, 1975년에는 다시 ‘민주캄푸치아’로, 그리고 1979년에는 ‘캄푸치아인민공화국’으로 바뀌는 정치적 격변과 내전의 산물이었다. 특히 크메르 루주 치하의 악몽 같은 3년여 동안 기아와 정치적 처형으로 적게는 1백만명, 많게는 3백31만4천7백68명(현정권의 공식발표)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직도 많은 캄보디아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예전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공은 지난해 이렇게 말했다. “캄보디아 국민은 겸손하고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불운은 국민에게 고통만 주는 못된 지도자들이 늘 지배했다는 것이다.” 20대에 외무장관이 되고 30대 중반에 총리 자리에 오른 훈 센은 캄보디아 평화협상과 국민의 운명을 손에 쥔 가장 중요한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훈 센 총리가 한국에 온다고 한다. 어떤 이유로 방문하려는지 궁금하다. 아마 파탄한 경제의 재건을 도와달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달 《시사저널》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미국의 원로 경제학자 월트 로스토우 교수는 1989년 11월9일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기구(APEC)의 출범은 같은 날 일어났던 베를린장벽의 붕괴보다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한국은 신국제질서의 모든 차원에서 주요한 기여를 할 위치에 있다고 역설했다. 국내에서의 격렬한 갈등과 진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국제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자라났다. 몸집만 커버린 아이로 남아서는 곤란하다. 나라 안팎 모든 문제에 대한 성숙한 시각이 시급하다. 이제는 ‘이웃’을 돕기 시작할 때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