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환부에 메스가 가해 “인주주의 실천한다”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1.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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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협 4년, 직업병 문제제기 등 큰 성과 올려

 인주주의 실천 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 소속 의사들은 요즘 어깨가 무겁다. 직업병 판정 시비가 일 때마다, 시국 관련 희생자의 부검 여부를 놓고 검찰과 유족이 실랑이를 벌일 때마다 학생들이나 재야는 물론 일반 국민까지도 인의협 의사들이 ‘심판’ 노릇을 해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검찰측에서 지명한 다른 동료의사들이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표시할 때도 종종 있어 인의협 의사들은 더욱 부담스럽게 하고 있다.

 최근의 성균관대생 김귀정양 사망사건 때는 인의협 대외협력위원장인 양길승씨(성수의원 원장)가 진상조사단장을 맡았는데 그 때문에 일부 다른 의사들로부터 “인의협이 의사의 본분을 망각하고 정치판에 휩쓸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동안 뿌린 씨앗이 결실을 거두고 있다는 생각에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나 언론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고 , 학생이 분신을 해도 배후에 뭐가 있지 않겠는가 하고 의심하는 요즘 같은 불신의 시대에 자신들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한 것이다.

87년 출범. 전국 의사 5백3명 가입
인의협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지지성명에 서명을 했던 의사들이 주축이 돼 87년 11월21일 출범했다. 인의협은 발기취지문에서 “도시빈민이나 농민이 열악한 보건환경 속에 방치돼 있고 사업장에서는 갖가지 질병과 재해가 일어나고 있는데 의사들의 관심은 직업적 기득권을 보호하고 확대하는데 쏠려 있다”고 자성하고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와 인술제세의 숭고한 정신의 젊은 날의 헛된 꿈이 아니라 의사들의 한평생 삶의 푯대라는 사실을 새삼 마음에 새기고 사위어가는 양심에 새로운 불을 당기자”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3년여가 지난 현재 창립 당시 1백87명에 부과했던 회원수가 교직의 46명, 봉직의 63명, 개원의 84명, 전공의 1백96명, 공중보건의 1백14명 등 5백3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전국의 의사 4만 5천여명 중 약 1%정도가 인의협에 가입한 셈이다.

 지방조직도 계속 확충되고 있는데 89년에 충남·대전지회와 전남·광주지회 준비위원회가 구성됐으며 올해 1월에는 전북지회가 출범했다. 회원수가 적어 지회를 구성하지 못한 인천, 부천·시흥, 서울 강동 등지에는 지역모임이 결성돼 있다.

 현재 윤종구(서울대 의대 소아과 교수) 심재식(한국보훈병원 산부인과 과장) 김기락(서울가정의원 원장) 곽영란씨(연세대병원 마취과 전공의)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구연철(이화여대 의대 예방의학과 주임교수 역임, 88년 정년퇴임) 김일순(연세대보건대학원장) 서한태(목포 서방사선과 원장) 홍창의씨(서울대학병원장 역임, 88년 정년퇴임)가 고문으로 있다.

 인의협의 활동은 크게 △의료악법 개폐와 정책대안 제시 △대국민 건강홍보 △소외계층에 대한 의료봉사 △보건 의료상담 △재난이나 집단 질병에 대한 의료구조 및 역학조사 사업 등으로 나뉜다. 그중에서 인의협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직업병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88년 7월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15세 소년 문송면군에 대한 조사작업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경제성장 정책 뒤에 은폐돼 있던 직업병의 실태를 집요하게 파헤쳐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 선로원들에게서 발생한 납중독사건에 대한 학술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선로원들이 직업병 판정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으며, 최근에는 사당의원 김록호 원장등 인의협 의사들이 원진레이온에서 집단 발생한 이황화탄소 중독이 직업병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피해자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 각 재야단체와 힘을 합쳐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독립된 직업병 판정 및 예방·치료기관인 산업보건종합센터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인의협은 환경과 공해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꾸준히 조사작업을 벌여오고 있다 88년 3월에는 서울 상봉동 연탄공장 인근 주민에 대한 설문조사와 집단검진을 실시해 2명의 진폐증 및 3명의 진폐의증 환자를 발견함으로써 진폐증이 공해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상봉동 인근 주민의 피해는 그 지역에서 개업하고 있던 의사가 진폐증에 걸려 있을 정도로 심각했다. 인의협에 따르면 체계적인 조사와 검진이 필요한 연탄공장 인근 주민은 전국적으로 3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인의협은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등과 연대해 반핵평화운동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이들 ‘한반도의 반핵과 군축을 위한 보건의료인’들은 지난해 9월22일 성명을 통해 “한반도에 배치되어 민족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미군의 핵무기는 즉각 철거되어야 하며, 남북 당국은 민족자멸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포기하고 한반도를 영구 비핵지대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인의협은 현재 매주 화요일 사무실에서 핵문제에 관한 세미나를 열고 있으며 <의학적 방사선 생물학> <핵시대를 위한 건강지침>등의 논문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제반 의료법의 개정운동도 인의협이 역점을 도고 펼치는 사업 중의 하나이다. 지난 89년 3월24일 조합주의에 입각해 운영되고 있는 의료보험제도를 통합주의 원칙에 따라 개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국민의료법안’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채택되지 않자 인의협은 즉각 성명을 발표, 거부권행사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인의협은 현재 재야단체들과 연대해 의료보장쟁취 공동위원회를 구성, 의료보험법 개정투쟁을 벌이고 있다.

 인의협측은 직장 지역 직종별 3백여개의 조합으로 분리 운영되고 있는 현행 의료보험제도는 국민을 위한 것도, 의료인을 위한 것도 아닌 한줌의 의료보험조합 직원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각 조합은 군출신이나 해바라기 인사들이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는 곳이 돼버렸으며 그로 인해 국민의 돈이 엄청나게 낭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의협측은 또 현행 의료보험제도에 따르면 "대재벌 회장이나 시골 유지가 같은 액수의 보험료를 내게 되어있다“ 면서 보험료는 소득에 따라 누진징수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의협이 짧은 기간에 의사 개인의 정의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해오면서 의료계 내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이들의 활동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의사들은 인의협이 자꾸 시국사건에 휘말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인의협이 의학보다 정치적 신념을 쫓아가는 집단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운동논리 중시하는 것 같다”비판도
 특히 강경대군 사건 당시 부검을 하지 않고 검안만을 하도록 해 재판에 있어서 문제점을 남긴 것이라든가, 김귀정양 사건 당시 유족이나 대책위측에 적극적으로 부검에 응하도록 권하지 않은 것 등은 의사로서는 취할 입장이 아니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 인의협 회원 중에 법의학을 전공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 점을 들어 인의협 의사들의 전문성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고려대 의해 황적준 교수는 “인의협 의사들을 보면 열의가 지나쳐 과학의 논리보다 운동의 논리를 중시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과학이다. 인의협 의사들은 보다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교수는  “원진레이온 김봉환씨의 직업병 판정 여부를 놓고 인의협 의사들과 대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조사를 해보니 인의협 의사들이 김봉환씨가 생전에 이황화탄소 중독증상을 보였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하나도 기록해놓지 않은 것이었다. 또 김봉환씨가 사망했을 당시 변사로 처리했어야 하는데 병사로 처리해 검찰과 경찰이 손을 떼게 만들었다. 그래서 김봉환씨는 걸국 ‘자료미비’를 이유로 직업병 판정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김봉환씨는 사건을 잘만 했으면 대법원까지 가서 직업병에 대한 좋은 판례를 남길 수 있는 사례였는데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의협 대외협력위원장 양길승씨는 “학생이나 노동자의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애쓰거나 직업병 판정제도의 개선을 요구한다고 해서 정치적 편향이 있다고 본다면 그야말로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과학적 사고’, 말이야 그럴 듯하다. 하지만 그동안 ‘과학’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횡포가 저질러져왔는가. 사업장에서는 사전에 다 알고 유해물질을 치운 다음 작업환경 측정을 받는다. 그러면 그것이 직업병으로 판정하는 데 유일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자료가 되는 것이다. 정부측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의사들도 그동안 그런 식으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을 속여왔다”고 말했다.

 양씨는 또 ‘검찰은 집단폭행사건의 경우 거의 부검을 하지 않고 처리해왔다. 누가 어디를 어떻게 때려서 죽게 했는지 따지지 않고 대부분 공동정범으로 처벌을 해왔다. 그런데도 검찰이 강경대군 사건의 경우 굳이 부검을 고집한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김귀정양의 경우 우리 인의협 의사들은 유족과 대책위에 수차례에 걸쳐서 부검에 응하라고 종용한 바 있다“고 말했다.

 인의협 홍보부장 김병후씨(종로신경정신과 원장)는 “시국사건 때마다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니까 우리를 무슨 정치단체처럼 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터무니 없는 오해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정치적 견해를 밝혀본 적이 없다. 유족이나 재야가 정부가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안믿기 때문에 우리가 자꾸 관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김씨는 “우리 내부에서 인의협의 진로를 놓고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대해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인의협 내부에선 '과연 지금과 같이 의료를 사고 파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하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도 80만명이나 되는 결핵환자가 존재하는데 쌍꺼풀과 유방 확대수술 기술은 눈부시게 발달하고 있는 이 기막힌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급진적인 방법을 택하면 오히려 의료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며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측도 있다고 한다.

 양길승씨는 “이같은 논의가 지극히 민주적인 분위기에서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훌륭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인의협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의협 같은 단체ㅔ가 필요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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