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스트로이카는 체제구출의 비상구”
  • 편집국 ()
  • 승인 1990.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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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데덜러스》誌 게재 ‘Z’논문 요지 / 공산주의는 재편성 아닌 자체분해의 길로 들어섰다
 민족문제의 폭발과 공화국들의 연방탈퇴운동이 가열됨으로써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집권 이후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 소련내부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에 일대 소용돌이를 몰고온 그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의 의도는 무엇이며 서방세계는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이같은 물음에 하나의 답변을 제시한 익명의 논문이 1월 4일자 <뉴욕타임스〉에 발췌 소개돼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스탈린의 영전에 부친다’는 제목에 필자이름이 ‘Z’라고만 밝혀진 이 논문이 미국의 학술계간지《데덜러스》(Daedalus)에 실려 시판에 들어감으로써 페레스트로이카의 운명과 서방세계의 대응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장래에 회의적 견해를 보이고 있는 이 논문이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필자의 이름 (Z)이 1947년 《포린 어페어즈》에 실렸던 미국의 對蘇봉쇄정책에 관한 조지 케넌의 논문의 필자이름 ‘X’를 연상시키기 때문. 《데덜러스》의 발행인 스티븐 그러보드는 ”필자의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어쩔수 없는 이유 때문“이라고만 익명의 이유를 밝힌바 있는데 로버트 게이츠(현 대통령 안보담당 부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카터 전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 폴 월포위츠(국방차관), 컨돌리자 라이스(국가안보회의 소련전문가)등이 거론되고 있다. 논문의 관점이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점에서 필자가 우파 인사일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하지만 《데덜러스》의 발행처가 미국 진보파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동북부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미국학술원이라는 점은 그 반대의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발췌문의 전문을 번역, 게재한다, 〈편집자〉

 1989년은 공산주의가 종말적 위기에 접어든 해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위기가 비단 소련에서만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발트海에서 중국海에 걸쳐, 그리고 베를린에서 北京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발생한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또한 분명한 것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의도는 좋았지만 현실 적용에 있어서는 체질적 위기를 완화해보자는 의도와는 달리 도리어 체질적 위기를 악화시켰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 원인은, 다른 軟性 공산주의가 모두 그렇듯이,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도 현 체제의 기본 원리에 반대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현 체제를 구출해보겠다고 나서는 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의 여러 기구들과 사람들은 强性 공산주의쪽으로 가도록 꾸며져 있는데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그러한 상황에 軟性 공산주의를 적용, 추진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여러 소비에트主義 중에서 제일의 정수는 强性 공산주의뿐이다. 왜냐햐면 소비에트주의에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해도 핵심은 다름아니라 黨의 절대적 우위성을 인정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르바초프가 개혁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바로 그 黨이야말로 소비에트 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고민의 근본원인인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란 어떤 것인가, 지난 6월에 열린 인민대표자회의가 끝났을 때 소련의 한 개혁지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소련은 지금 기로에 서있다. 앞으로 갈 길은 중국식 길 아니면 폴란드 · 헝가리식 길이 될 것이다. ” 이 사람의 의중은 후자의 길로 갔으면 하는 눈치였으나, 소련의 경우 사실은 ‘홉슨의 선택’이란 故事에서처럼 어느 쪽을 택해 봐도 소용없는 선택 밖에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擬似 민주주의 · 시장경제의 길
 1989년 6월 이후의 중국식 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세가 점점 꺾여가는 형편이지만 비교적 풍요한 시장경제와 정치 · 군사적 억압을 일삼는 정권을 의미한다. 소련도 억압의 길은 열려 있지만 시장경제의 번영은 가망이 없으며 얼마나 기다려야 그러한 가망이 생길 것인지조차 불투명한 형편이다. 이에 반해 폴란드 · 헝가리식 길은 무엇을 의미하나?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뜻한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 이룩한 헌정질서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경제적 파탄 상태를 의미한다.

 소련의 경제파탄 상태는 사실 폴란드나 헝가리보다 더 심각하며, 단순한 민주화가 아닌 진정한 민주주의는 아직 의제에도 못올라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보면, 소련의 길은 중국식과 폴란드 · 헝가리식의 가장 나쁜 점만을 합쳐놓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한편에선 경제의 실패, 또 한편에는 공산당의 요지부동인 지도적 역할을 놓고 끌고나가는 상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공산주의체제의 개혁은 그 진로가 모두 막다른 골목에서 끝나버리는 것이 상례처럼 생각된다. 레닌주의 정권들이 종말적 약화단계에 접어들면 폴란드 · 헝가리 · 동독 · 체고슬로카비아 · 루마니아의 경우처럼 내부폭발을 일으켜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1989년의 鄧小平 치하에서처럼 내부폭발을 군사적 억압으로 방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권력을 마음껏 누리던 낙원이 왜 이러한 막다른 골목으로 끝나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러한 권력이 만들어놓은 구조물들의 산물이다. 레닌과 스탈린이 이룩해놓은 거창하고 매우 엉뚱한 체제는 그 체제에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인적 · 물적 자원이 정권의 무게에 견뎌내는 힘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만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또 黨의 독점적 지위를 밑에서 받쳐줄 만한 물질적인 성공이 어느 정도라도 존재하는 동안에만 유지될 수밖에 없는 성격의 것이다.   鄧小平의 1979년 시장경제화 조치와 1980년 솔리대리티 항쟁(폴란드)을 시발점으로 하여 이러한 여건들이 없어져버리자 공산당들은 정권유지에 대한 의지가 약해지기 시작했으며 국민들은 겁을 내는 버릇에서 차차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소비에트 一黨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라는 편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진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모호한 대용물에 불과하다. 이것들은 고작해야, 시민사회가 새로 살아남으로써 분출하는 활기찬 세력들을 당의 지도적 역할과 상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圓을 네모로 만들어보자는, 半만 내딛는 조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 圓을 네모로는 만들 수 없게 되어 있다. 만약 시장경제 도입과 私有化 인정이 경제개혁의 목표라면, 당에 의한 경제계획은 소용없을 뿐 아니라 완전히 기생적인 것이 되고 만다. 만약 多黨制 · 選擧 · 政治가 개혁의 정치적 목표라면 黨은 국가의 불필요한 이중체제이며, 실로 매우 유해무익한 존재가 된다.

 레닌주의와 시장경제의 중간인 제3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볼셰비즘과 憲政 중간을 가는 제3의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시장화 민주화는 자연히 시민사회의 부활을 가져올 것이며, 이러한 사회는 마땅히 法治를 요구할 것이다. 법이 다스리는 시민사회는 법을 모르는 당의 영도적 역할을 유지 ·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얼마 안가서 개혁은 어느 선에 도달하게 되며, 그 선을 넘어서면 당의 영도역할과 그것의 소산인 구조 전체의 청산으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소련과 중부유럽은 그러한 결정적인 선에 접근하고 있다. 레닌주의를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 하는 잘못된 문제제기는 물러가고 이제는 현 체제를 어떻게 해체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공산주의에서 탈출할 것인가라는 알찬 문제가 대신 제기되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이러한 이탈로 이어질 하나의 과정이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초기에 밀로반 질라스가 예언했듯이 공산주의는 스스로를 재편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체 분해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내부폭발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경의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 장벽 뒤에서 그토록 기나긴 세월 동안 보호받아온 체제들이 몇가지 개혁 조치만으로 變容될 것으로 속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1989년에 일어난 일들이 혁명적인 속도로 일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한 일들이 예고하고 있는 공산주의에서의 이탈 그 자체도 신속하게 일어나리라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경우가 바로 소련일 것이다. 소련은 소비에트主義를 45년 동안 겪은 것이 아니라 70년간이나 겪어왔다. 그뿐 아니라 소련공산당은 그 나라의 정당이지 외국의 강요로 생긴 당이 아니며, 제2차 세계대전의 애국적인 성공에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궁극적으로 한 나라의 당이면서 帝國主義的이기도 한 이 당은 초강대국 소련의 군사력도 지배하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를 도와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의미있는 답변을 하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무엇에 성공한다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 돕자는 것인가? 만약 페레스트로이카의 성공이 경제적으로 활기에 차고 정치적으로 민주적인 공산주의 제도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대답이 나와야 할 것이다. 레닌주의 체제의 근본적 구조들을 70년대말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으며, 페레스트로이카의 모순 증대는 소련 체제의 재조정이나 개혁은 불가능하며 오로지 정체가 지속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장구한 세월에 걸쳐 해체되어 시장체제로 서서히 대치되는 일밖에 없음을 알리고 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공산주의 체제
 그럴 경우 현 제도를 구출하거나 개선하자는 의도로 서방측인 소련에 원조를 제공해도 허사일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우리로서는 고르바초프를 도울래야 도울 길이 없다. 또 그러한 원조는 불안정 상태에 있는 소련의 여러 민족들의 실질적인 이해관계에도 해로울 수 있으며 따라서 국제적인 안정에도 도움이 안될 것이다. 70년대에 서방국가들이 폴란드에 차관을 제공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련정부에 원조를 준다는 것은 현재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일밖에 안될 것이다.

 또한 만약에 우리가 페레스트로이카의 성공을 말할 때 一黨국가 체제에서 민주주의로, 중앙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성립된다는 것을 뜻할 경우, 불행히도 그 대답 또한 성공 못하리라는 것일 수밖에 없다. 첫째, 그러한 과도적 변화는 페레스트로이카가 목적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목적은 경제적 · 인간적 현실앞에서 반발자국 내딛는 식의 완화 조치를 취함으로써 현 체제의 일부나마 건질 수 있는 것은 건져보겠다는 것뿐이다. 둘째로 더 중요한 이유를 들자면, 이러한 과도적 변화는 당의 절대적인 영도 역할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며 결국은 공산주의의 자체분해나 다름없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것을 분명히 고르바초프는 원치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반 상황은 소련 지도부의 의도와 관계없이, 또 장차 누가 소련 지도자로 등장할 것인가와도 상관없이, 현 체제가 점점 위축되어 없어져버리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라면, 서방측이 소련에 도움을 주어 어떤 건설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해도 될 것이다.

 첫째, 군비부담을 서로 줄여나가는 방법이다. 만약 마땅히 지켜져야 할 안보상의 이해관계에 충분한 배려를 하면서 상호 군비감축을 진행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소련이 처한 위기의 심각성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위기의 구조적인 원인들에 변화를 일으키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고르바초프 자신이 소련의 국제무대에서의 역할 축소가 완전한 敗走로 변질되지 않도록 유의한다는 전제하에서라면 소련은 군비삭감 조치를 실현시킬 용의가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둘째, 서방측 원조가 소련경제의 국영 부문을 떠받들어주는 데 쓰여서는 안되겠지만, 국영기업들과는 별도로, 시장원리에 따라 운영되는 민간부분의 기업체나 기구들이 개별적으로 조금씩 발전하는 것을 돕는 쪽으로 서방측 원조가 사용된다면 유용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발전은 경제면에서의 多元현상을 촉진할 것이며, 결국은 정치적 多元현상까지도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합작기업형태건 어떤 다른 종류의 기업형태건 서방의 소련투자는 자본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승리감을 보이지 않으면서 소련의 민족적 자부심을 적절히 감안하여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서방의 목적은 옛 라벨은 고스란히 남겨둔 채 소련의 현실 변화를 촉진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주의를 유명무실한 일본황제와 같은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소련이 공산주의로부터의 그 나름의 독특한 탈출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미지의 행로는 멀고 험난한 길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은 ‘유럽공동의 집’과 같은 통합을 향한 단일적이거나 점진적인 과정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 이상의 보다 진정한 개혁을 이루는 데는 오히려 그 이상의 위기를 맞게 되기 십상일 것이다. 안정을 깨는 개혁을 완전히 억제함으로써 파멸을 막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은 소련의 개혁파들이 그렇게도 두려워하는 군부의 반발을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어떠한 전망도 흔쾌한 것은 아니며 서방세계에 평탄한 앞날을 제시해주지도 않는 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즉각적으로 민주주의를 가져올 것이라거나 역사의 갈등에 종말이 올 것이라는 환상에 탐닉하기보다는 공산주의 사회의 진정한 선택을 현실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패한 유토피아의 70년 역사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공산주의가 비록 거의 모든 창조적 분야에서는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점에서는 언제나 크게 성공적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다름아닌  권력독점에서의 뛰어난 책략과 집요성이 그것이다.

 소련권의 세계가 정상상태로 이전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공산당은, 비록 그것이 지금은 개방과 민주화의 색채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마치 ‘독묻은 네서스의 의상’처럼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감싸온 나라들에 마지막까지 달라붙으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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