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 ‘印度고행길’ 나설 만하다
  • 뉴델리 · 박순철 편집위원 ()
  • 승인 1990.02.0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급자족’ 빗장 열려 ‘기회의 땅’으로…까다로운 투자 절차. 카스트제 등 걸림돌 많아

 뉴델리의 1월은 제법 쌀쌀하다. 시내에서 동쪽으로 40㎞쯤 떨어진 노이다수출가공지역(NEPZ)을 향해 4차선 도로를 달리면서 누추한 옷차림의 행인들이 어쩐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남북으로 가로누운 야무나강을 건너 노이다지구로 들어섰다.

 낡은 버스와 트럭이 띄엄띄엄 다니는 외에는 칠이 벗겨진 낡은 스쿠터와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썰렁한 도로위를 달렸다. 길가에 홀로 앉아 사과를 파는 소녀 옆에는 땔감으로 쓰려는지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엮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농촌지역으로 들어서자 쇠똥을 호떡처럼 동그랗고 얇게 빚어 노적가리처럼 가지런히 쌓아놓은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농촌의 땔감이었다. 한쪽의 널따란 벌판에는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주위의 황량한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노이다공단은 새로 지은 공장들이 산뜻하고 정돈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外資의 교두보’ 수출자유지역
 노이다공단은 최근 몇 년 동안 인도에 갑작스럽게 늘어나기 시작한 수출자유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그전에만 해도 인도의 수출자유지역은 칸들라 등 두곳에 불과했으나 최근 몇 년간 네곳이 새로 생겨났고 한곳이 건설중이다. 수출자유지역내의 입주업체에 대해서는 생산설비 · 부품 · 원자재에 대한 관세의 면제, 소비세 · 판매세 · 도시세의 면제, 투자후 처음 5년간 법인세의 면제 등 세제상의 특전뿐 아니라 100% 출자의 가능함 등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지고 있다.

 인도정부 정책이 외국자본의 국내진출에 대해 매우 엄격한 규제를 가하는 것임에 비춰볼때, 수출자유지역은 외자가 비교적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수도 뉴델리와 근접해 있는 데다 30㎞ 지점에 국제공항이 위치한 노이다공단은 국내외기업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다. 이제까지 개발된 3백에이커의 땅위에 이미 1백27개의 업체가 투자승인을 받아 40개는 가동중이고 45개는 공장을 전설하거나 기계를 들여놓고 있는 중이다.

 이곳에 입주하려고 하는 한국업체도 3개나 된다고 동행한 무역진흥공사(KOTRA)의 뉴델리관장 李奎完씨가 밝혔다. 온도계를 제작하는 유일계량기제작소의 경우 인도인 파트너와 50대50의 합작투자 조건으로 이미 인도정부의 허가를 받았고, 인도중앙은행의 외환사용 승인이 나오는 대로 한국에서 기계설비를 수입할 단계에 있다고 한다. 수술용 장갑을 생산하려는 신우상사도 75만달러 규모의 합작투자 승인을 받았고, 신발류의 어퍼슈즈를 생산하는 토칸양행은 1백만달러의 100% 단독투자를 신청, 금명간 승인될 것으로 보인다고 이씨는 말했다.

 공단내에서 의류용 지퍼를 생산하는 옵틸론 지퍼사는 인도인이 100% 투자한 중소기업체. 그다지 넓지 않은 공장은 지퍼를 제조하고, 여기에 부착되는 천을 짜고, 염색을 하는 등 6개의 공정에 따라 조그만 방들로 나뉘어졌고 수많은 작은 기계들이 쉴새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공원50명이 월2백만야드의 지퍼를 생산하는데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등으로 전량 수출된다고 했다. 사장 나레시 바티아씨는 수출자유지역 밖에서 공장을 세우려면 수많은 절차를 거쳐야 하고 자재를 들여올 때 많은 관세를 물어야 하는데 이곳은 ‘관세없는 나라’ 같다고 흡족해 했다. 그는 근로자들에게 최저 월 40달러를 주고 있으며 “적정한 임금을 주면 문제가 없기 때문에” 자기 회사에서는 노사분규가 없다고 말했다.

 공단사무소장의 집무실은 뜻밖에 뉴델리시내 로디호텔 안에 있었다. 비좁고 검소하게 꾸며진 집무실에서 사무소장 헤멘드라 쿠마르씨는 공단입주를 위해서는 상공부산하의 1개 부서만 거치면 되며 6~8주면 승인이 나온다고 했다. 그는 인도가 ‘기회의 나라’라면서 특히 수출산업부문에서 외국인 투자에 대해 개방되고 있다고 말했다.

 인도는 과연 열리고 있는가? 갑자기 늘어나고 있는 수출가공지역들은 그동안 다분히 폐쇄적이었던 인도경제가 외부에 대해 빠끔히 열렸던 문을 좀더 활짝 열기 시작했음을 상징하는 것인가?

1인당 국민소득은 3백60달러
 지난 60년대와 70년대에 세계의 개발도상국들은 경제개발이란 경제의 양적성장과 동의어라 판단, 앞다투어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성장률을 극대화하는 데 열중했다. 하지만 이때 인도는 자급자족(self-reliance)의 경제를 구축한다는 원칙을 굳게 지켜나갔다. 인도의 정책담당자들에게는 ‘무엇을’ ‘누가’ 생산하느냐는 문제야말로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는 문제 못지 않게 중요했다. 자급자족의 철학은 높은 보호장벽에 의해 수입의존도를 극소화하고 외국인투자를 기피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인도는 상당한 정도의 중화학공업화를 이루었고 철강 · 군함 · 항공기는 물론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는 공업국가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내지향적인 자급전략에는 그 나름대로 비싼 대가가 따랐다. 힘에 벅찬 중화학공업화 전략은 자본의 효율을 낮춰 독립 이후 30여년간 인도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이 4%를 밑돌게 했다. 80년대 들어 인도는 조심스럽게 무역장벽을 조금씩 낮추었고 해외의 최신 기술과 투자도입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경제자유화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고 이에따라 제조업의 성장률이 빨라졌다. 인도경제는 지난 87~88년도에 6%의 성장률을 보였고 88~89년도에는 8.5%의 높은 성장을 달성했다. 그러나 인도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아직도 3백60달러 정도에 불과, 인도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로 남아 있다.

 깨끗하고 널찍한 길들이 시원스럽게 뻗어있는 뉴델리에서 이웃 올드델리로 넘어가면 거리의 모습과 체취는 갑자기 달라진다. 장엄하고 우아한 건물들은 낡고 더러운 건물들로 바뀌고 좁은 거리는 자전거와 삼륜택시, 누더기를 걸친 듯한 낡은 버스로 혼잡하다. 1월의 오후가 기울어지면서 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한기로 인해 보도위에는 가끔 때가 찌든 천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꼼짝 않고 누워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나 지나가는 행인이나 좁은 차도를 가득 메운 차안의 누구도 그들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국기관에 근무하는 한 인도인 직원은 지난 12월부터 날씨가 추워지면서 길거리를 집으로 삼아 길잠을 자는 사람들 가운데 1백50여명이 얼어죽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도의 빈곤은 결국 실업자들이 많다는 사실과 직결되며 실업률은 20~25%쯤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극도의 빈부격차는 인도사회의 흉한 상처처럼 두드러져 보인다. 이것을 인도의 경제정책 또는 사회정책의 실패로 보는 것은 외부인의 피상적인 관찰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소련의 어느 경제학자가 인도를 방문하고 귀국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전에는 무신론자였으나 인도에 가보고 신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도경제를 운영하는 신이 있다는 것을.” 그는 인도의 경제와 사회가 너무 복잡해 그것을 운영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신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사실 인도는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는 하나의 대륙이며 어쩌면 ‘인도는 세계의 축도’라는 말처럼 하나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인구 8억6백만명에 공용어만 14개나 되며 지방 토속어는 2백개 이상이다. 주요한 종교만도 힌두교, 이슬람교 등 6가지나 된다. 그러나 인도사회를 수많은 단층으로 나누어놓는 것은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카스트 신분제도로 인도사회는 2백내지 3백가지의 엄격한 카스트로 나뉘어져 있다.

활발해지는 한국기업 진출
 이렇게 언어, 종교, 신분, 종족의 복잡한 이질적 요소로 구성된 나라가 하나의 국가체제 아래 제3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으로 평가되는 정치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은 기적처럼 보인다. 또한 이처럼 크고 다양한 요소를 내포한 국가가 외부와 벽을 쌓고 자급자족의 길을 걷겠다고 결정한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외자유치에 발벗고 나서는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과는 달리 인도는 들어오려는 외자도 엄격하게 가려낸다. 인도는 자본도입보다는 공업화 추진에 필요한 기술도입을 선호하며 국내기술로 생산 가능한 분야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외자와의 제휴를 금지하고 있다. 외자비율도 일반적으로 40%까지 제한하고 있으며 100% 수출산업인 경우 예외적으로 100%단독투자를 허용하고 있다.
 이처럼 높은 투자의 장벽 때문인지 최근 2~3년간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로 새로운 투자의 기회를 찾아 발걸음이 바빴던 한국기업인들도 인도에는 선뜻 손을 내밀지 않고 있다.

 인도 주재 한국의 상사들도 대개 인도의 투자환경이 그다지 신통치 않다는 반응이었다. 국영인 아쇼크호텔의 3층으로 현대상사의 지사를 찾았을 때 지점장 金世中씨는 인도의 정부와 사회가 매우 보수적이어서 바깥쪽을 바라보기보다는 안쪽을 지킨다면서 “인도인들은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대우의 지점장 尹大勳씨도 인도정부가 외자를 받아들일 태세가 전혀 안돼 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또다른 아시아 ·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합작투자의 경우 턴키 베이스로 기계장비 등을 다 팔 수 있지만 인도는 하이테크에 대한 합작만을 원해 “곰탕에서 고기빼고 기름빼 국물만 남듯이” 실속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삼성지점장 金英煇씨는 인도시장을 좀더 낙관적으로 보았다. 그는 인도의 내수시장이 매우 크고, 현재도 임금이 싸지만 많은 유휴노동력이 있어 급격한 임금상승이 예상되지 않으며, 인도의 노조를 꺼리는 한국기업인들이 있으나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인허가절차가 까다롭고 과실송금이 어렵다고 아는 사람이 많으나 이는 과장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한국기업이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다음에 나갈 만한 적지는 바로 인도라고 힘주어 말했다.

 인도의 투자환경에 대한 판단이 어떠하든 한국 대기업들의 인도에 대한 투자진출은 점차 활기를 띠어가고 있다. 삼성은 일본의 NEC와 함께 인도의 모디그룹과 손잡고 총 8천만달러 규모의 브라운관 공장의 설립계획을 상당한 단계까지 추진해놓고 있다. 그동안 8백CC짜리 인도국민차의 생산을 위해 마루티社에 금형을 수출해왔던 대우도 자동차부품 회사의 합작투자문제를 마루티사와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다. 현대의 경우도 지난 1953년 반공포로로 인도에 건너온 池基哲씨 소유의 인도회사와 1천만달러 정도를 합작투자, 석재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현재 인도정부에 투자승인을 신청중이다.

南印度의 돌에 홀린 한국기업인
 뉴델리에서 남쪽을 향해 비행기로 2시간 반정도 날아가면 인도 東岸의 항구도시 마드라스에 도착한다. 이곳에 인도의 풍부하고 아름다운 화강암에 매혹돼 9년째 돌과 씨름하고 있는 한국기업인이 있다. 미주라 스톤社의 宋鴻德사장은 80년대초 한국 동인석재의 지사장으로 나왔다가 88년 독립해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음식과 기후가 안맞는데다가 ‘코끼리 모기’에 물려 팔이 퉁퉁 부어 보름 동안 누워 있다 수술을 받는 등 고생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또한 현지법규를 몰라 현지인에게 ‘많이 당하기’도 했고, 스스로 합작회사를 차린 뒤에는 파트너를 잘못 만나 어려운 처지에 빠지기도 했다. 인도 남부 타밀 나두주의 쿤남 등 3개 지역에서 채석한 돌을 안드라 프라데시 주에 있는 공장으로 옮겨 건축자재, 석재장식품, 묘석 등을 생산한다. 생산된 석재품은 전량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미국 등으로 수출된다. 그는 지난해의 매출액이 1백만 달러 정도였다며 앞으로 계속 공장을 확장, 연간 3천만달러까지 올려놓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인도의 화강암은 매장량이 엄청날 뿐 아니라 색상도 없는 것이 없고 재질도 뛰어나다고 한다. 마드라스 시내의 깨끗하고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미주라 스톤의 사무실에는 매끈하게 표면이 다듬어진 여러가지 색깔의 아름다운 표본들이 놓여 있었다. 서울의 어느 유명한 빌딩을 우아하게 꾸며준 이른바 ‘이태리 대리석’은 인도의 화강암 원석을 이탈리아에서 가공, 한국에 수출한 것이라는 데 그 뒷 얘기가 실감있게 들렸다.

 같은 마드라스 시내에는 동인석재가 지난해 100% 단독투자해 설립한 디스코 스톤 인도社의 사무실이 있다. 남국의 식물들이 자라는 아름다운 정원을 안고 있는 깨끗하고 산뜻한 2층건물에서 이곳 책임자인 인도인 마헤시씨를 만났다. 그는 현재 석재가공을 위한 공장을 짓고 있으며 오는 6월경 생산이 시작되면 전량 일본, 미국 등지에 수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인과 인도인은 여러가지로 공통점이 많습니다”라면서 그는 나이든 사람을 존경하고 친구를 아끼는 태도를 예로 들었다. 인도인 직공들에 대한 기술지도를 맡고 있다는 趙甲壽씨는 외국인 단독투자로는 인도에서 첫 케이스라면서 이곳에서 1백m쯤 떨어진 현장에 가끔 찾아가 기술지도를 하고 있는데 한국인에 비해 기술습득의 속도가 매우 느리다고 말했다.

 인도는 잠재적으로 방대한 내수시장, 정치적 안정성,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 상당한 수준의 공업화, 풍부한 자원 등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한국의 기업인들에게도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는 대륙이다.

 그러나 현재에는 인도진출의 어려움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미주라스톤의 송사장은 두손을 30m 가량 벌려 보이며 “처음 허가받을 때 이정도 분량의 서류를 17군데나 내야 되는데 한국기업인들은 여기에 질려버립니다”라고 말했다.

열리는 ‘인도의 성벽’
 문화적 차이도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이다. 특히 인도의 복잡한 카스트제도를 이해하는 것은 외국인에게는 쉽지도 않고 시간도 걸리는 일이다. 천민인 하리샨 카스트를 통솔하는 사람으로는 그보다 높은 카스트의 사람을 써야지 하리샨 출신이 똑똑하다고 윗사람으로 쓰면 일이 전혀 안된다고 어느 한국기업인은 말했다. 그러나 인도사회의 이해는 인도에 뛰어들어 인도사람들의 힘을 빌어 돈을 벌려고 하는 외국인들의 당연한 의무일 수밖에 없다. 다만 4천년 이상 거대한 인도대륙 위에 전개되어온 복잡한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것은 좁은 반도위에서 오랫동안 동질적인 사회를 누려온 우리 한국인에게는 매우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에게 인도는 중동보다도 낯설고 유럽이나 미국보다도 심정적으로 훨씬 ‘먼 나라’이다. 그러나 ‘인도의 성벽’ 안으로 통하는 문이 점점 넓게 열리기 시작하고 있고, 한국인들로서도 급격히 바뀌는 경제의 상황에 쫓겨 낯선 이국의 대문들을 부지런히 두들길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인도인들도 한국인들도 어느새 너무나 비좁아져버린 세계에서 어느덧 옆에 다가온 ‘낯선 이웃’을 사랑하며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울 시점이 된 것이 아닌가.

반공포로 출신의 한인회 회장
 한반도 면적의 16배 가까운 인도의 넓은 땅에서 한국인들은 외롭다. 인구 8백만의 수도 뉴델리에는 상사 직원 25가구, 대사관 12가구, 교민 3가구 등 모두 40가구에 아이들까지 포함해 2백명 가량이 한인회에 등록돼 있을 뿐이다.

 한인회 회장을 4년째 맡고 있는 玄東和씨는 반공포로 출신. 지난 53년에 제3국을 택해 인도에 건너왔다. 당시 반공포로로 인도를 찾은 사람은 모두 86명인데 현재에는 3명만이 남아 있다.

 북한에서 교편을 잡다가 보충장교로 중위에 오른 그는 거제도에서 2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다. 낯선 인도땅에서의 처음 생활은 물론 고통스러웠다. 그는 인도정부로부터 1만루피의 융자를 받아 양계를 시작했다.

 일본사람이 경영하던 여행사에서 일하기도 하고 한국공관의 현지 고용인 노릇도 하던 그는 68년 한국에 가발산업붐이 일어나면서 머리카락의 무역에 나섰다. 인도여인들은 마음속으로 소원하던 일이 성취되면 사원에 찾아가 기도를 드릴 때 머리를 깎기 때문에 머리카락의 조달은 쉬웠고, 이것이 당시 가발 수출붐을 타고 머리카락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던 한국시장과 잘 연결됐던 것.

 현씨는 그후 70년대에 중동 건설붐이 일어나자 인도인력의 송출사업에 손을 댔고 인도산 면제품을 한국에 수출하는 등 무역업도 계속해왔다. 최근에는 소련에서 구매단이 자주 찾아와 텔레비전, 카세트 테이프 등의 구매에 관한 상담을 벌이곤 한다.

 인도에는 찾아오는 한국인 관광객도 드물다고 하면서 그는 이곳 생활이 쓸쓸하다고 말했다. “여긴 살기도 힘들고 인종차별도 심해 화교들도 발을 못 붙입니다.”라고 현씨는 말했다.
 뉴델리의 한국인들에게 인도는 여전히 서먹한 異邦의 땅인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