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老兵 “50년6월29일 수원서 맥아더 만났다”
  • 김동선 편집부 국장 ()
  • 승인 1991.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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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春河(67) 예비역 육군소장은 6 · 25동란 발발 직후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하기전날 육군보병학교 부교장에서 제2사단장에 임명되었다. 2사단은 의정부에서 인민군에 패죄하여 이미 부대가 아니었다. 그의 임무는 후퇴하는 2사단 병력을 수습하여 지금의 동작대교에서 광나루까지 방어진지를 구축 , 인민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의정부에서 T34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한 2사단 사병들의 대부분이 한강을 헤엄쳐 건너왔어요. 거의 세끼를 굶은 사병들이 헤엄을 치면서도 소총을 버리지 않고 가져왔을 매는 얼마나 고마웠던지…"

 임장군은 국립묘지 산등성이에서 그의 작전지구였던 반포 아파트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40년 전의 일을 회상했다.

  "사병들은 한강을 건너와서는 굶주림과 피곤에 지쳐 밭고랑에 그대로 드러누웠기 때문에 그들에게 밥을 먹이는 것이 제일 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취사장비나 부식은 아무 것도 없었지요. 그래서 민가에서 솥을 구해와 밥을 짓고 반찬과 그릇이 없으니 소금에 절인 주먹밥을 만들어 사병들에게 돌렸지요. 이게 6 · 25 때 유명했던 주먹밥의 효시입니다."

 다음날 맥아더를 만났던 일도 그는 잊을 수 없다.  6월29일 오후 사단본부가 있는 과천에 미군 대위가 지프를 타고 나타나 그에게 수원에 있는 육군본부에 가야 할 일이 있다고 해서 그는 그 차를 타고 수원고농으로 옮긴 육본으로 갔다. 그곳에는 미군들이 많이 보였는데, 주한미군고문단 대표 하우스만이 한 천막을 가리키며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는 영문도 모르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별 다섯 개를 달고 있는 미군장군이 앉아 있었다. 그 장군이 맥아더라고 직감했다. 그는 바싹 긴장했는데 맥아더는 무표정하게 몇가지 질문을 던졌다. 맥아더는 먼저 "당신이 받은 명령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는 한강방어라고 답했고, 이어 맥아더는 "언제 후퇴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 그는 현재 임무는 방어이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방어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맥아더는 "사령들은 밥을 먹었는가" "사병들 사기는 어떤가" 등등 의외로 '싱거운 질문'들만 했고 이런 대화는 약15분 정도 진행됐다. 맥아더는 시종 무표정하게 질문을 끝내고 잘 알았다며 가보라고 해서 임장군은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뒤 임장군은 하우스만에게 왜 사전에 맥아더 장군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안해주었느냐고 투덜거렸는데, 하우스만은 "저분은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될 때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는 말만 했다.

 한국전사를 보면 맥아더는 이날 아침 도쿄에서 전용기를 타고 수원에 도착해 한강 전선을 시찰한 뒤 이날 오후 도쿄로 돌아갔는데, 비행기 안에서 주요 작전구상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임장군이 맥아더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영어실력' 때문이었다. 그는 함남 영흥 출신으로 중앙고보(33회)를 나와 일본 메이지대학 법문학부 재학중 학병에 나갔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그는 고향에 갔다가 동생 · 조카들과 함께 월남했다.

 월남 후 학병동맹에 가당했으나 이 조직이 좌익으로 돌자 그는 동료 10명과 함께 탈퇴하여학병단을 조직, 군사부차장을 맡았다. 이 때가 1945년 10월 중순.

 그런데 미군정청은 군사단체가 난립하자 어느날 30여개에 달하는 군사조직 대표를 군정청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영어를 잘했던 이유로 학병단 대표로 참석했고, 이 인연으로 그는 군정청 국방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의 영어실력을 보고 그쪽에서 권유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군정 시절 미군의 역할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45년에서 48년까지 한국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더 많습니다. 기록도 없고 미국이 이야기를 안 하니까 그렇게 됐지요. 예를 들면 군사 영어학교도 학교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장교임관 대기소였지요. 군사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등록을 받아 임관할 때까지 기초 영어를 가르쳤을 뿐인데 일부 무학력자들이 군사영어학교를 이력서에 올리면서 그럴 듯한 학교로 둔갑한 것입니다."

 초창기 한국군을 주름잡았던 ㅊ장군 · ㄱ장군 등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는 것이다.
 임장군은 휴전회담 해는 한국군 대표(멤버)로 회담에 참가했고, 1960년에 예편했다. 그는 예편후 운수업을 했는데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을 그만두기 직전 그 회사를 뺏었다. 중정 지하실에서 그는 김형욱 직계 부하에게 조사를 받으며 회사를 빼앗겼는데 , 그 회사는 지금도 김형욱 친인척과 고향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임장군은 회사를 빼앗긴 뒤 71년 미국으로 이민갔다. 그리고 미국 ·독일 등에서 20여년간 살다가 고국에 정착하기 위해 돌아왔다. 그는 "예전엔 군이 신뢰받아 장교들이 데이트할 펀군복을 입고 나갔는데, 이제는 국민들로부터 군의 신뢰가 떨어져서 그런지 군복을 안 입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군의 위상문제를 매우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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