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그레그 美대사
  • 진철수 부주필 ()
  • 승인 1990.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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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 북한 접촉 한국 동의”

 중앙정보국(CIA) 출신을. 하필 반미 감정 등으로 한미관계가 미묘한 시기에 주한 대사로 보낼 것이 무엇이냐는 도하 신문사설의 항의대상이 되었던 도널드 그레그 미국 대사, 게다가 이란 · 콘트라 사건과의 관련여부를 놓고 상원 인준 절차가 오래 걸리는 바람에 그는 지명후 8개월만에야 부임했다.

 그만큼 화제가 되었으면 우선은 조용한 외교 스타일을 택할 법도한데 그는 최근 光州를 방문하여 폭넓게 각계 인사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또한번 주목을 끌었다. 그가 왜 광주에 갔으며 거기서 무엇을 얻었는가. 동구권의 급변이 북한에 미칠 파급 효과를 그는 어떻게 보는가. 반미 감정의 뿌리를 그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밖에도 북경에서의 미 · 북한 접촉, 한미간 경제마찰, 미군철수 전망 등 미국 대사에게 묻고 싶은 것은 너무도 많다.

 서울 세종로의 정부종합청사 건너편에 자리잡은 미국 대사관 건물에 들어가자면 철저한 보안장치와 신분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대사의 집무실은 8층 800호. 백발 장신의 그레그 대사는 선뜻 테니스가 취미라고 대답할 만큼 운동으로 잘 단련된 활기찬 모습으로 기자를 맞았다.

● 동유럽의 정세가 급변하는 것을 보고 한반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 베를린 장벽이 없어지듯 비무장 지대도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높습니다. 한반도 사정이 달라지리라 보십니까.

 작년 10월에 서독의 빌리 브란트씨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들은 말이 있습니다. 독일과 비교할 때 한반도의 통일이 훨씬 어렵게 생겼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북한에 손을 내뻗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가 며칠후에 휴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왔을 때 또 만났더니 한반도 사정은 정말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서독의 경우 그들의 생각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서 동독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 한국에는 뚫고가지도 넘어가지도 못하는 정신적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습니다. 한국은 인내를 가지고 임해야 될 듯 합니다. 북한의 집권자는 단절된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북한에도 10년 안에 통치자가 바뀌는 상황이 올 것이며 그렇게 되면 불안정한 기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북한도 융통성이 있는 개방적인 사회로 변해가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미국과 한국이 공연히 긴장을 늦춤으로써 상대방이 오해할만한 신호를 보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줄 압니다.

● 동서관계가 개선되고 냉전 분위기가 퇴조하면서 아시아에서도 소련의 위협에 대처한다는 뜻에서의 美 · 日 안보협력체제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등 한국의 주변 사정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전망하는 견해도 있는데, 한국에 미칠 영향을 생각할 때 아시아 정세의 장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

  저는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활기에 차 있으며 긍정적이라고 봅니다. 미국과 미국의 파트너인 한국이 함께 자기 카드를 잘 다루기만 하면 몇해후에는 엄청난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군사적인 지원과 한국 국민이 스스로 최선의 노력을 해온 것의 결과일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군사적인 억지력을 유지하며 약세를 보이지 않는다면 결국에 가서는 북한에서도 불가피하게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보다 안정된 관계가 이루어져 나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 지난 17일에 북경에서 제7차 미 · 북한 외교 접촉이 있었는데, 이 접촉을 통해서 미국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접촉 수준이 참사관급에서 앞으로 승격될 것입니까 ?

 우선 이러한 접촉은 한국 정부의 전폭적인 찬동하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주된 대화는 남북한간의 대화이며 이 접촉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의미밖에 없습니다. 접촉 수준을 참사관급에서 승격할 계획은 없습니다.  의제는 앞서 국무부가 밝혔듯 북한내 미군 유해의 송환, 남북한 대화의 촉진, 핵확산 금지협정의 부수 조치로 북한이 안전 절차에 동의하는 문제 등입니다.

● 주한 미군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설이 있는데, 그 용도는 사실상 북한이 아니라 소련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습니다. 또 한반도에 핵무기를 두는 것이 한반도 데탕트에 해롭다는 의견도 있는데 … .

  잘 아시다시피 핵무기 보유에 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않고 논평을 일체 삼간다는 것입니다.

● 한국은 유엔 가입을 원하고 있습니다. 소련과 중국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가능성을 어떻게 보십니까.

 북한의 책임자들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위성으로 그들 사진을 찍을 수는 있지만 불행히도 그들 마음속을 읽어낼 수는 없습니다. 소련이 한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을 보면서 북한은 소련에 대해 좋지않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련의 대북 영향력이 약해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계엄령을 해제함으로써 국제적 고립 상태에서 다소 벗어나려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중국은 너무나 큰 나라입니다. 따라서 중국이 북한과 더불어 국제적으로 고립상태에 머물기로 한다면 한국에도 이롭지 않을 것입니다.

● 현재의 한국 경제상황이 한 ? 미 경제관계에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십니까.

  작년 한국의 대미 경제 활동은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한 무역 적자는 다른 어떤 적자보다 큰 폭으로 줄어들었고, 이를 위한 한국 노력에 감사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지속되길 바라며 쇠고기, 지적 소유권, 통신 부문 등 2~3개의 현안이 있지만, 이 부분의 타결을 위해 협상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 실적은 뛰어난 것으로 따라서 그 장래도 밝게 봅니다. 한 ? 미 관계는 보다 신뢰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합니다. 한 ? 미 간의 서로 다른 입장을 조정해 나가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미국은 정통적인 우방인 유럽 제국과도 심각한 의견 대립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본 관계를 위협받지는 않습니다. 한국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 부임 당시 국내에서는 대사의 부임을 반대하는 논조의 사설도 빈번하게 실렸습니다. 반미 감정, 한 ?미 관계의 변화를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소위 ‘반미 감정’ 이라는 추세에 대해 크게 염려하지는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외국인이라하면 골치꺼리로 생각한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한국이 이루어놓은 것들을 지정학적인 이유에서 중국, 일본 또는 북한이 하루아침에 짓밟아 버리곤 했기 때문입니다. 1950년 미국은 이 나라의 통일을 위해 북한군을 쫓아 압록강까지 몰고 올라갔다는 사실을 상기하십시오. 부산 유엔군 묘지에는 한반도에서 숨진 3만3천8백60명의 미국의 넋이 잠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한국 통일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젊은이들이 이러한 사실을 잊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세대의 교체가 있었고, 한국에서 또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일부 젊은이들은 수정주의 역사의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위에 미국의 존재가 거대하므로 이러한 것에 대해 참지 못하게 된 것 같습니다.  ‘왜 우리가 아직까지 이들을 필요로 하는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외국인들을 좋지 못한 것과 연상시키는 오래된 패턴으로 때로는 문화적 오염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습니다. 광주 사태에서 이러한 현실은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얼마전 광주를 찾았을 때, 방문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미국이 정녕코 광주 사태와 관련이 있고, 책임이 있었다는 감정이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분명코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며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했습니다. 물론 10년간의 침묵을 깨고 나온 지금 그같은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시킬 수는 없었습니다마는 … .

● 최근 光州에 가서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돌아오신 것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광주의 어떤 여자분 의견이 신문에 실린 것을 보면, 그레그 대사가 여러 가지 말을 하고 갔지만, 어떻게 미국이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느냐고 여전히 못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광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험은 광주사태 때 부상자들을 포함한 5명의 젊은 시민들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들 요구에 따라 기자들도 배석시키고 3시간반 동안 질문을 받았습니다. 첫 질문이 누가 발포를 명령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은 모른다. 그것은 한국 사람들의 문제이다. 한국 사람만이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소리는 못 믿겠다고 했습니다. “당신들은 위성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자동차 번호판까지 읽을 수 있다지 않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만능이라는 생각이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이 그런 것은 할 수 있지만 김일성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며, 광주의 보통 시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그 물음에 대해서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내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그 당시 미 항공모함이 부산에 입항했다해서 광주시민들을 구출하려고 왔나 했더니 전두환씨를 지지하려고 왔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전두환씨를 지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북한이 개입할 생각을 가질까봐 북한에 경고 신호를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다음 저는 이승만 박사 때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미국의 행동 패턴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한국측이 어떤 강압적인 조치를 취하려하면 첫째 미국측은 한국 정부쪽에 가서 그런 일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고 조용히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는 공개 성명을 통해서 북한이 간여할 생각을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대북 공식 입장은 항상 공개되고 극적으로 과장되는 반면에 우리가 조용하게 한국측에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알려지지 않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광주사건 때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우리들 (미국측)의 한국측에 대한 항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전단을 인쇄했습니다. 광주시 상공에서 뿌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특전사 병력은 떠나고 20사단 병력은 들어오기 전이었습니다. 전단은 양측에게 사태를 평화적으로 처리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한국정부는 이 전단을 인수했습니다. 그러나 뿌리지를 않고 말았습니다. 미국이 그런 전단을 준비했다는 사실 자체도 물론 아무한테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대해 경제적인 보이코트를 단행하거나, 혹은 미국의 불쾌감의 표시로서 미군의 일부 철수를 단행할 경우 북한쪽에서 훨씬 더 흉악한 일을 꾸밀까봐 항상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해 동안 미국은 민주주의쪽으로 나가달라고 조용히 권하기만 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편 강력한 군사적 저지력을 유지해왔던 것입니다.

● 金大中씨 구출에 관한 이야기를 광주 사람들이 반겨들었다고 느꼈습니까? 80년말에 金大中씨를 살리는 대신 전대통령을 워싱턴에 초청한 것에 관해 설명하셨다지요.

 반응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이 광주에 전혀 안 알려져 있는 데는 정말 놀랐습니다. 무등일보의 편집국장 말씀이 마국은 광주사태 때 전두환씨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레이건 정권이 들어서자 전두환씨와 밀월 관계까지 가졌기 때문에 광주 시민들의 미움을 샀다는 것이었습니다. “밀월이라니 당치도 않다”고 저는 말했습니다. 80년 12월에 저는 해롤드 브라운 국방장관과 함께 와서 전두환씨를 조용히 만나 金大中씨에 대한 기소 사실은 근거가 없는 것이니 석방해 줄 것을 권했습니다.

● 그때 전두환씨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는 매우 유교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문제는 金大中씨가 한국 국민과 한국의 지도자들을 이간시켜놓는데 책임이 있는 것이라면서, 따라서 유죄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실패했다고 느끼고 돌아갔습니다. 곧이어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자 리처드 앨런 특별 보좌관이 서울을 방문하여 金大中씨의 석방 방안이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81년초의 미국 신문에는 이런 얘기들이 실렸지만, 한국에는 통제 때문에 알려질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전에 그런 사정을 앨런씨에게 말했더니, 작년 여름에 앨런씨가 서울에 와서 平民黨에 들러 이야기를 공개함으로써 약간 보도가 되었던거지요. 그렇지만 광주에서는 깜깜 무소식이라니 놀랐습니다.

 제가 이번에 광주에 도착했을 때 기자가 물었습니다. 광주시민에게 사과하러 왔느냐고. 저는 아니다, 사과할 이유는 없다, 슬픔과 유감을 표시할 뿐이라고 답했습니다. 그후 3일째 되는 날 저는 “실은 사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침묵을 지킨 데 대한 사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침묵은 한과 의심과 슬픔을 푸는 데 하나도 도움이 안되었습니다. 제가 광주에 감으로써 그동안 안으로 쌓인 감정을 일부라도 밖으로 내뿜게 하는데 조금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약간의 씨를 심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황을 바꾸는 일은 도저히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뿌리가 깊기 때문입니다. 저는 광주에 또 갈 것입니다. 제가 광주에 간 이유는, 한미 관계가 지금 군사동맹에서 정치적, 경제적 파트너 관계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처해 있다고 믿기 때문인데 그런 전환이 이루어지자면 광주의 상처가 아물어야 된다고 굳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여 상처가 아물지 않고 아픔이 계속된다면 원한의 근원이 되며, 강한 반미 감정의 뿌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도널드 그레그 대사 약력
 30여년간 美 CIA에 근무한 아시아 전문가. 1927년생. 美 동북부 윌리엄스 대학에서 철학 전공. 60년대 후반 주일 미대사관 근무를 거쳐 82년까지 CIA에 근무. 70년대 중반 CIA 주한 책임자. 82년부터 88년까지 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 당시 부시 부통령을 수행 65개국을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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