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비법으로 빚는 전통술, 이강주
  • 박상기 편집위원대리 ()
  • 승인 1990.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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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趙鼎衡씨 집안에 전래해온 최고급 약소주 배 생강 울금 꿀 배합…맛 향기 빛깔 뛰어나
 일찍이 당나라의 시인 李商隱이 “한잔 신라술의 기운이 쉬 사라질까 두렵구나” (一盞新羅酒浚恐左銷)라는 찬사를 남길 만큼 우리 민족은 옛부터 맛과 방향이 뛰어난 술을 빚어왔다. 우리 전통주의 대종은 순곡 증류주로, 누룩을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각 지방마다, 또는 각 집안마다 秘傳되어온 家釀酒가 있어, 이 술로 관 · 혼 · 상· 제와 집안 대소사를 치르고 명절을 쇠며 손님을 대접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고급 전통주를 맛볼 수 있기는커녕 구경하기조차 어렵다. 일제시대 이래 줄곧 가양주 제조가 금지된 데다 끼니때우기마저 급급했던 먹거리 사정으로, 집안마다 대물림하던 전통주 양조법도 시나브로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나마 최근들어 먹고살기가 좀 나아진데다가 외국의 고급 위스키와 와인 등이 ‘문화상품’으로 밀려들어오자 우리도 전통 銘酒를 되살려보자는 바람이 일어, 온 고을을 뒤지는 법석을 떨었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향토민속주 중의 하나가 전주의 이강주(梨薑酒). 이강주는 전라북도의 전주 · 익산 · 완주지방에 전해내려오는 술로서 옛날 상류사회에서 즐겨마시던 최고급 藥燒酒다. 각 지방의 특산품을 기록한 서유구의 《임원십육지》나 홍만선의《산림경제》에 이 고장의 명주로 ‘이강주’에 대한 기록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일본인이 쓴 《조선주조사》에도 “이강주는 담황갈색의 감미 주정음료의 한 종류로 (조선의)상류사회에서 애용되어온 것”이라는 기록과 함께 제조법이 상당히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강주는 저희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술이지요. 집안의 6대조 어른이신 始啓公 할아버지로부터 빚어 전수되어왔는데, 일제 때 이후로 관청의 단속이 심해 집안잔치때나 조금 만들곤 했습니다. 다행히 제가 술 제조분야에서 20년 넘게 일해온 덕택으로 아버님 代에서 끊어질 뻔했던 제조법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부드럽게 취하고 뒤끝도 깨끗
 전북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이강주의 제조기능 보유자 趙鼎衡(49) 씨는 전북대 농화학과를 나와 지금 ‘보배소주’의 생산부장으로 있는 양조분야의 전문인이다. 어린 시절 이강주를 빚느라 온갖 정성을 쏟는 부모님을 지켜보며 ‘술 빚는 법’에 흥미를 가졌던 그로서는 대학 전공학과와 직업의 선택이 안성맞춤으로 들어맞은 셈이다.

 배와 생강의 한자 ‘梨薑’을 쓰는 이강주의 제조법을 보면, 먼저 멥쌀 · 보리쌀 · 누룩을 써서 증류식 전통소주를 만든다. 여기에다 배 · 생강 · 울금 · 계피 · 꿀 등을 각 제조단계에 따라 배합하는데, 그 공정이 매우 까다롭고 힘이들어 ‘마시는 사람은 춘풍이고, 만드는 사람은 열통 터진다’는 말이 절로 실감난다.

 이강주는 재래 증류식 소주의 특유한 향에 생강의 매콤한 맛과 계피의 향이 조화되어 그 은근한 맛이 비할 데가 없다. 또 전주 근교인 이서의 배와 봉동의 생강을 넣는데 배는 담백한 기운을, 생강은 강장효과를 낸다.

 “배는 술에 청정미를 더해서 맑게 하는 작용을 하고, 생강은 건위에 좋아 술을 마신 후 위에 자극을 주지 않고 서서히 취하게 만들지요. 한약재인 울금은 담황색의 빛깔을 내게 하고 꿀 · 계피는 피로회복을 빠르게 하지요. 그래서 우리집 술은 부드럽게 취하고 마신 다음날 뒤가 깨끗하다는 칭송을 듣습니다.”

 趙씨의 말대로, 백자기 술잔에 따라놓은 이강주는 이태백이 술색깔 중 으뜸으로 꼽았다는 담황색으로서 한여름밤의 초생달빛 같은 느낌을 준다. 맑고 온화해보이되 그 안에 방향이 배어 있어, 한 모금 마시면 혀끝에 부드럽게 와 닿는 감미와 함께 은은한 향기가 입안에 퍼진다. 옛 선비들이 자연을 대할 때에 그랬듯이, 풍류에서도 청아한 기품을 무엇보다 먼저 손꼽았음을 전통명주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강주를 잘 빚으려면 우선 누룩이 좋아야죠. 햇밀을 거칠게 빻아서 물로 버무려 누룩틀에 넣고 밟아서 동그란 형을 뜹니다. 이 누룩을 마루 시렁에서 10일간, 다시 더운 방에서 7일간, 그후 건조한 곳에 옮겨 14일간을 두어야 쓸 만한 것이 됩니다. 그 다음에 밑술을 만드는데, 여기에는 백미로 지은 고두밥 5에 누룩 4, 물 9의 비율로 섞어 첫 담금을 하는 걸 말합니다.”

 밑술은 담근 지 3일후에 덧술을 만든다. 덧술은 솥에서 찐 쌀보리 10, 누룩3, 물 13의 비율로 섞어 30℃ 정도의 온도에서 4일간 발효시킨 것이다. 숙성된 술을 큰솥에 옮겨 고리(옹기로 된 재래식 소주 증류기)를 솥위에 설치하고 서서히 장작불을 지펴 소주를 내린다. 한번 내린 소주를 2차로 증류하는데, 이때 배와 생강을 갈아 헝겊에 싸서 증류되는 소주가 이를 통과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소주가 울금 조각을 거치게 하여 이강주 특유의 빛깔을 낸다. 쌀 5㎏, 보리쌀 11㎏, 누룩 3.5㎏, 배 5개, 꿀 0.6리터와 약간의 생강 · 울금 · 계피를 원료로 하면 대개 30도짜리 이강주 10리터 정도를 만들게 된다.

 趙鼎衡씨는 단지 이강주만 잘 빚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민속주를 발굴하고 그 제조법을 연구하느라 20여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닌 향토주 연구가이다. 그래서 그는 술에 관한 고서와 자료가 많고, 그가 찾아낸 각 지방의 전통주를 그려놓은 <민속주 지도>가 있다.
 “이강주의 제조허가가 나와서 널리 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바라는 일은 그동안 조사해온 자료를 정리해서 책을 펴내고, 고서와 각종 전통 양조도구들을 모아서 토속주 전시관을 꾸며보는 것이죠.” 누가 알아주건 말건 전통주 연구와 제조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이강주의 맑고 은은한 술빛처럼 선량해보였다.

                                                        


70년만에 해금될 ‘우리의 술’
 일제강점 초기에 강제로 그 명맥이 끊겼던 한국의 토산 銘酒가 70여년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된다. 현재 ‘한산 소곡주’ ‘서울 문배주’를 비롯한 24종의 민속주가 국세청 기술연구소와 국립보건원의 주질검사를 통과, 실질적인 양조 · 시판 허가인 ‘주류 제조면허’를 기다리고 있다.

 그 지방의 토산물과 양조법에 따라 저마다 독특한 맛과 향기를 지닌 민속주들은 앞으로 ‘한국의 술’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일본의 정종, 중국의 마호타이주, 프랑스의 포도주, 소련의 보드카, 영국의 위스키 등이 각기 그 나라를 대표하는 술로 각광받고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그동안 우리 고유의 술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삼한 시대에 술에 관한 첫 기록이 나올 만큼 긴 양조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한국의 명주’가 개발되지 못한 것은 1916년 일제에 의해 전통주 제조가 전면금지된 이래 대물림으로 비전되어온 향토 명주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각 고을마다 독특한 맛과 향을 자랑하던 수백종의 전통주 가운데 현재 제한적으로나마 제조 · 판매가 허용되고 있는 것은 서울 태릉의 삼해주, 경기 용인의 민속주, 부산의 금정산성 막걸리, 제주의 오메기술 등 4종류에 불과하다. 여기에 문공부가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맛 · 향기 · 빛깔 · 마신 후의 느낌’ 등을 조사하여 국가 · 시 · 도 무형문화재로 선정한 10종, 교통부가 추천하여 주질검사를 마친 14종 등 총 24종의 향토 명주가 제조면허를 취득하는 대로 앞다투어 시판될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막걸리 · 소주 · 약주 등의 재래주와 맥주 · 위스키 등 외래주가 석권해온 기존 ‘술시장’에 향토색 짙은 전통 민속주가 등장, 애주가의 사랑을 다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 민속주 중 서울의 문배주, 안동의 제비원 소주, 전주의 이강주, 경주의 교동법주 등은 酒度가 법정 도수를 넘거나 쌀을 1백% 사용하는 것이 현행 주세법 및 동시행령과 양곡관리법에 저촉되고 있어 제조면허 취득에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안동소주 기능보유자인 趙玉花(67)씨는 “쌀이 남아서 주체를 못하는 실정에 우리의 전통 민속주인 쌀소주를 못만들게 하는 것은 이해가 안된다”고 말했다.

 또한 주세법 시행령 제1장 2조에 약주 · 곡주는 알코올 11~16도, 소주는 20~30도로 규정되어 있는데, 이들 민속주는 주세법 상의 알콜 허용도수보다 높다.

 “물론 주세법시행령에 맞게 희석시키면 되겠지만, 그렇게 하면 전통 민속주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게 기능보유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이 문제를 놓고 문화부 · 농수산부 등은 해당부처인 국세청에 관련법규의 개정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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