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과 감동의 양심선언
  • 이세용 (영화평론가) ()
  • 승인 1990.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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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박스
감독:코스타 가브라스
주연:제시카 랭

인간이 흘리는 액체, 피와 땀과 눈물 중에서 피가 가장 극적인 빛깔을 띠고 있다. 피는 생명과 죽음, 전쟁과 혈연의 이미지를 갖는다. 그것은 법보다 위에 있고 어느 때는 죽음보다도 위에 있다. 그런데, 그 빛깔만큼이나 선명한, 그래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이런 믿음이 영화 <뮤직 박스>를 보고나면 조금씩 엷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변호사인 딸이 나치 전범으로 고발된 아버지를 위해 혼신의 노력 끝에 무죄를 입증하는 순간, 유죄를 입증하는 사진을 얻게 되고, 핏줄과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마침내는 양심의 명령을 따른다는 내용의 <뮤직 박스>.
금년도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상을 받아 화제가 되고 있는 이 영화는 <Z>의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최신작. <Z>와 마찬가지로 진실이 아무리 두렵고 뜨거울지라도 이를 끌어안는 것이 인간의 몫임을 힘있게 설득한다.
사실, 이 작품속에서 주인공인 변호사 앤탈보트는 검찰측의 마지막 증인인 멜린다 칼만 부인이 아버지인 마이크 라즐로에게 침을 뱉을 때, 아버지가 전범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헝가리까지 따라가서 아버지를 옹호한 것은 ‘죄인의 딸’이 되기 싫어서가 아니다. 결국은 ‘뮤직 박스’속의 사진(경찰제복을 입고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을 법원으로 보내지만, 앤은 아버지를 믿었고 진정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장면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긴장감을 쌓아올리는 연출의 솜씨는 변함없이 탁월한데 자유자재로 구사하는(일종의 지적인) 서스펜스 효과이다. 서스펜스란 뭔가 명확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 믿음과 믿지 않으려는 보류 사이의 밸런스로 이루어진다.
<뮤직 박스>는 피고와 증인이, 검사와 변호사가 평팽하게 힘겨루기르는 구성에서 벌써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증인들의 증언은 마치 라벨의 ‘볼레로’처럼 비슷하지만 조금씩 달라지면서 강도를 높인다. 마지막에 가서야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데 이 작품에서는 딸인 앤으로 하여금 매듭을 짓게 함으로써 그리스的인 비극성, 진실 앞에 선 인간의 엄숙함을 더욱 심화시킨다.
영화를 생전 처음 보는 관객이 아니라면, 라즐로가 손자인 마이커와 함께 하던 ‘팔굽혀 펴기’동작이 재판정에서 증인들에 의해 재현될 때 그의 범죄를 확신한다. 이것은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시나리오의 힘이지만, 좇는 자가 쫓기는 자의 私的공간을 침범함으로써 긴장을 고조시키는 서스펜스의 포석을 원용한 구성의 묘라고 하겠다.
그래서 이 필름은 ‘진실’과 ‘핏줄’, 과거의 상처를 둘러싼 3대의 고통스런 싸움의 현장이다. 이 현장이 증오하고 절망하는 연기자들에 의해 단연 활기를 띤다. 실제로 2차대전중 나치에 부역했던 사실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출연을 결심한 라줄로 역의 아르민 뮐러 슈탈과 검사역의 프레데릭 포레스트 등 배우들의 조화가 매우 훌륭하다. 특히 육감적인 볼륨으로 관객을 사로잡아온-<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에서의 그 여자-제시카 랭이 변호사역을 맡아 놀랄 만한 연기를 보여준다.
진실을 손아귀에 쥐고 있지만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마침내 펴보이는 제시카 랭의 절제된 연기는 ‘핏줄’에 매달리는 사람들한테 충격과 함께 아프게 떨리는 감동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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