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산고겪는 ‘군정’ 왕국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2.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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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는 태국인 ‘생활방식’…중산층 대두로 민주화운동 확산



 태국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이 관광이다. 지난해 이 나라를 찾은 외국인은 5백50만명이 넘는다. 그 다음이 값싼 노동력. 외국인의 투자가 몰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태국경제는 88년 13.2%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 해 외국인의 투자액은 20억달러를 넘어섰다. 태국은 그 덕분에 지난 5년간 평균 10%에 이르는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외국투자가들은 태국의 정정이 불안한데도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 이들은 태국에는 으레 쿠데타가 나기 마련이고 그로 인한 정정불안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선례’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1932년 입헌군주제 채택 이후 17번 쿠데타와 11번의 불발쿠데타, 50번의 정권교체, 15번의 개헌으로 쿠데타?군부정권 창출?개헌?군부독재의 악순환을 거듭해온 태국 근대사는 바깥 사람들의 눈에는 ‘비민주주의’ 역사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정작 태국 국민들은 1932년 왕정이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들어선 후 군부에 의한 17번의 헌정중단을 저항감없이 받아들여왔다. 민주주의가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한 내각책임제 국가에서 흔히 그렇듯 태국에서도 부패한 정치인들을 일소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군부를 오히려 두둔했다. 지난해 2월 차티차이 추나완 정권이 쿠데타로 무너졌을 때 이에 항의한 방콕시민은 한사람도 없었다. 추나완 총리는 비록 군출신이나 하원에서 선출된 민선총리였다. 군부가 내세운 쿠데타 이유는 추나완 정권이 부패했다는 것이다. 일반 국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민주국가의 국민이라면 군부에 의해 민선정부가 쓰러진 마당에 한번쯤 헌정부인이란 반민주적 사태를 비판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당연시한 것이다.

 

“태국 군부는 기업을 운영하는 상업조직”

 입헌군주제가 들어선 이후 태국 국민이 군부의 쿠데타에 대해 이른바 ‘민주화 투쟁’을 벌인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투쟁에 나선 사람은 학생이지 일반 시민은 아니었다. 지난 73년 당시 타놈 독재정권에 반대해 학생들이 들고일어선 것이 단적인 예다. 태국민주화의 제 1의 걸림돌이 군부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렇다고 그 책임을 전적으로 군부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5천6백만 인구의 60% 이상이 아직도 빈곤에 시달리는 농민임을 생각할 때 불과 수년전까지만 해도 서구식 개념의 민주주의란 별 의미를 갖지 못했다. 먹고살기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빵을 가져다주진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투표율이 평균 30%에 머무를 정도로 국민의 정치참여도가 지극히 낮은 것이 이를 반영한다.

 타마사트대학 동아문제연구소의 리키드 디라베긴 교수는 “기본적으로 태국인의 정서에는 군부통치에 대한 저항감이 별로 없다”고 지적한다. 태국의 정치학자들도 쿠데타를 하나의 ‘생활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국민들 대다수가 누가 정권을 잡든 또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든 크게 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농촌사람들이 그렇다. 신흥중산층들이 많이 사는 방콕을 비롯한 대도시 사람들도 경제가 지난 5년 간 그나마 호황을 이룬 것이 군부의 개입을 통한 정국의 안정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민주화에 대한 염원이 낮은 데다 민주화를 위해 앞장서야 할 정치인들이 오히려 잇속 챙기기에 바쁜 형편이다. 선거 때만 되면 으레 돈봉투가 나돌게 되고 시골지역에선 매표행위가 극성을 부린다.

 민주주의가 스며들 여지가 없는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군부는 국민에게 별다른 저항감을 주지 않았다. 군부는 쿠데타를 명분으로 곧잘 부패한 정치인의 추방을 내세웠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군부가 정치일선에 개입하는 속셈은 딴 곳에 있다. 한마디로 군의 기득권 유지 때문이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태국 군부는 단순한 군조직이 아니라 마치 기업을 운영하는 상업조직과 같다. 5백명의 장성이 부하들과 보내는 시간은 별로 없다. 이들은 독점기업을 운영해 사리를 추구하기에 바쁘다. 따라서 이들은 현실정치에 늘 자기들 목소리가 반영되길 원한다.” 부패한 정치인들을 몰아낸다는 장본인들이 오히려 부패에 앞장서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밀림지역에 근무하는 고위장교들이 벌목이나 마약거래를 통해 돈벌이를 나선다는 것은 더 이상 뉴스가 못된다.

 태국사회에선 군출신이 아니면 출세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큰 모임에 가도 군출신이 아니면 명함을 제대로 내밀지 못할뿐더러 대접도 받지 못한다. 공장의 준공식이나 회사 창업식에도 군수뇌가 주빈으로 참석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푸미폰 국왕의 2명의 공주도 대령계급장을 단다고 하며 왕세자는 소장이다. 국역기업체의 장은 현역 군인이 겸임하며 TV나 라디오 방송까지도 군부가 운영하는 곳이 여러 군데다. 군인은 사업도 할 수 있고 지방행정기관의 장을 맡을 수도 있다. 법이 그렇게 허용하고 있다.

 이쯤 되면 태국사회는 말이 민간사회이지 그 구조가 ‘民軍혼합사회’라 볼 수 있다. 이런 배경 속에 군부는 막후에서 교묘히 정치를 요리해왔다. 역대 총리를 보면 1932년 쿠데타를 주도했던 피불 송크람 장군을 포함해 타놈?프렘?차티차이 그리고 이번에 실각한 수친다 등이 모두 군사령관 출신이다. 설사 민간인이 총리에 임명돼도 군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언제든 쿠데타로 몰려나야 했다. 지난해 2월 군부의 쿠데타로 물러난 추나완 총리도 그 한사람이다. 군부의 부패를 비난한 각료를 해임하지 않은 데 대한 ‘보복’으로 그를 제거한 것이다. 하원에서 선출된 총리라도 군부의 눈밖에 나면 단칼에 그 목이 날아가는 게 이른바 ‘태국식 민주주의’다.

 군부의 정치개입은 군부와 결탁한 일부 정당의 관료적 메커니즘 때문에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번 유혈사태의 도화선이 된 수친다 군총사령관을 총리로 추대한 것도 사마키탐당을 비롯한 5개 친군부 정당이다. 군부와 결탁한 제도권 정당은 군출신 인사가 합법적으로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든든한 발판이다. 태국의 중립영자지 <방콕 포스트>의 칼럼리스트인 리키드 디라베긴은 “군부와 정치권을 잇는 이같은 권력이양이 순조로운 한 태국의 민주화는 언제까지나 질식당할 것”이라고 비판한다.

 

경제성장과 함께 ‘군부’ 거부하는 중산층 확산

 현재 군부를 움직이는 대표적인 ‘정치군인’은 수친다 전 총리를 포함한 출라촘클라오사과학교 5기생들이다. 욱군에 65명, 공군에 4명, 경찰에 10명의 장성을 배출한 5기는 핵심 멤버가 수친다 전총리, 카셋 로자나닐 군최고사령관, 이사라퐁 눈파크디 장군이다. 이들은 마치 우리 군부의 ‘하나회’처럼 군부 내에 탄탄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군부가 오늘날처럼 사회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태국이 안고 있는 내외환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태국은 오랜 왕정국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한번도 외국의 식민통치를 받아본 적이 없다. 여기엔 국왕들의 외교력도 한몫 해왔지만 무엇보다 튼튼한 군사력 덕분이었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태국은 라오스?미얀마(옛 버마)?캄보디아?말레이시아 등 이웃나라와 갈등요인을 안고 있어 안보가 늘 국사의 우선순위를 차지했다. 내부적으로도 군부는 정정이 불안하거나 집권세력이 군부의 비위에 거슬리면 ‘나라의 보호자’란 이름으로 언제든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국민의 공감을 샀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태국이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면서 군부의 정치개입에 대한 염증이 신흥중산층에 빠르게 번지면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도 높아지고 있다. 3월22일의 총선에서 잠롱이 이끄는 진리의 힘당이 방콕시에서 35석 중 32석을 휩쓴 것이나 5월18일의 대규모 민주화시위는 이같은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코넬대학교 태국문제전분가인 데이빗 아이앳 박사는 “5월18일 시위를 통해 태국 중산층이 비로소 성년이 되었다. 문민정부를 위한 틀이 마침내 갖춰지기 시작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들 중산층은 지난 88년 이후 연평균 10%의 경제성장에 힘입어 현재는 방콕인구 (5백2만명)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대학교수를 비롯한 지식인과 상인, 은행가가 주류로서 더 이상 쿠데타를 원치 않는다. 군부의 정치개입으로 정정이 불안해지면 자칫 해외투자가나 관광객이 발길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중산층 시민이 주축이 된 이번 시위 때 나타난 야당의 결집력도 태국 민주화에 청신호지만 앞으로 어느 정도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지는 미지수다. 최대의 재야단체는 ‘민주연합’으로 잠롱이 이끄는 진리의 힘당을 비롯해서 4개 야당 대표와 전국대학생연맹, 교수대표단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원 내에서 민주화투쟁을 벌이기엔 역부족이다. 4개 야당의석을 합해야 1백65석으로 5개 친군부 정당의 1백95석에 못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많은 의원이 군부의 대폭 수술을 원치 않는 군출신 인사라는 점이 한계이다.

 태국의 대외개방이 비교적 폭넓게 이뤄진 것은 국내의 민주인사들에게 큰 힘이다. 민주화 운동이 탄압받으면 그만큼 국제사회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국 군부는 60년대 이후 경제 및 사회분야에서 일고 있는 엄청난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나라의 보호자로서의 군부 역할은 줄었지만 막상 군부가 군부를 바라보는 시각은 전혀 변한 게 없는 것이다. 결국 태국의 민주화는 군부의 환골탈태부터 이뤄져야 하고 그 과정에서 중산층은 또다른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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