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對美카드 가네마루 라인
  • 도쿄 채명석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2.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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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美때 북미 관계개선 나설듯…‘국내용 정치가’ 벗어나려 후견인 자처


 지난 4월15일 낮, 김일성 주석의 80회 생일을 축하하는 오찬이 평양의 금수산의사당에서 열렸다. 굽높은 구두를 신고 뒷짐을 진 채 등장한 김정일 서기가 일본 자민당?사회당의 ‘조공 사절단’과 가볍게 악수를 나누다가 한 일본인 앞에 멈춰섰다. 자민당 부총재 가네마루 신(金丸信)의 둘째 아들 신고(信吾)였다. 김서기는 ‘가네마루의 밀사’ 신고의 손을 굳게 잡으며 몇마디 인사말을 건넸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일본 언론들이 전하는 이같은 일화는 북한 당국이 對日수교를 추진함에 있어 ‘가네마루 라인’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가를 드러내주는 한 예이다. 그 가네마루가 곧 미국을 방문해 부시와 회담한다고 한다. 일본 정계 최고막후 실력자, 북한의 최대 후견인은 이제 극동의 실력자로 부상한 것이다.

 가네마루의 평양행을 석달 앞둔 재작년 6월, 일본의 한 광고잡지가 ‘현대의 요괴(妖怪) 10걸’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압도적으로 1위에 뽑힌 사람이 당시 다케시다파 회장 가네마루였다. 일본의 정치 풍토에서는 학벌이 정치적 출세를 좌우하는 한 요인이다. 그러나 가네마루의 학벌은 고작 동경 농대. 그것도 유도선수로 대학 4년을 보냈다. 이 때문에 가네마루는 실언을 연발하는 정치가로 알려졌다. 예를 들면 정치강연회장에서 타임?리밋을 타임?메릿으로, 패러볼라 안테나를 파라파라 안테나로 혼동해 청중들의 실소를 자아낸 것 같은 일이 허다하다.

 이렇듯 학벌도 지식도 별로 갖추지 못한 가네마루가 어떻게 일본 정계의 최대 실력자로 떠올랐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광고잡지는 지적했다. 이후 가네마루에게는 ‘헤이세이(平成:일본의 현재 연호)의 요괴’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가 붙게 됐다.

 야마나시(小梨)현 한 양조장 집의 장남으로 태어난 가네마루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43세 때였다. 자민당이 결성된 후 두 번째로 치러진 1958년 5월의 중의원 총선거에 처음 입후보해 당당히 1위로 당선됐다. 엄청난 선거자금을 뿌린 결과였다. 금배지를 달고 사토파에 소속된 가네마루가 그 무렵 만난 사람이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였다. 열 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타협’ 터득해 정계에서 출세

 그로부터 10년 후 가네마루는 큰 며느리를 다케시타가에서 받아들인다. 가네마루의 장남과 다케시타의 장녀가 결혼하자 두사람은 의원 동기생에서 사돈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와세다를 나온 다케시타가, ‘사토파의 프린스‘로 성장하고 있는 데 비해 가네마루의 정치적 출세는 더디었다. 그에게 전기가 찾아온 것은1972년. 국회 운영을 요리하는 국회대책위원장으로 발탁되면서부터였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자민당의 국대위원장으로서 야당과의 막후절충을 맡게 되었고, “합해서 둘로 나눈다”는 타협의 정치를 터득하게 되었다.

 이때 사회당의 국대위원장이었던 사람이 현재의 사회당 위원장 다나베 마코토이다. 국회운영을 둘러싸고 매일같이 머리를 맞대던 두사람을 이때 당파를 초월한 친교를 맺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가 90년 9월 평양에서 ‘3당 공동선언’으로 나타난 것이다.

 능란한 국회 운영 솜씨로 정치권 발판을 마련한 가네마루는 사돈 다케시타를 총리에 앉히기 위해 85년 정치적 모반극을 연출한다. 사토파를 거쳐 다나카파로 이적한 두 사람은 당시 자민당 최대 파벌 다나카파의 중간 보스였으며, 다케시타는 다나카파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자로 지목되고 있었다.

 그러나 록히드사건의 피고인으로 재판에 계류중이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좀처럼 파벌 영수자리를 물려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다케시타는 계속 망설였다. ‘오야붕’ 다나카를 도저히 배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앞장서서 다케시타를 질책한 것은 가네마루였다. 85년 2월 끝내 다케시타는 다나카파를 뛰쳐나와 ‘창정회’를 발족시킨다. ‘다케시타 정권’이 탄생한 것은 그로부터 2년반 뒤였다.

 가네마루가 사돈 다케시타를 제치고 일본 정계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한 것은 그가 동물적 정치감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케시타는 리크루트 사건으로 총리직을 사임한 뒤 우노, 가이후 등을 내세워 이른바 ‘다케시타 院政’을 펴고 있었다. 89년말 다케시타는 총선거를 연내에 실시한다는 방침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가네마루는 다음해 실시를 주장했다. 결국 가네마루 안이 받아들여져 자민당은 2월 총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의 정치평론가들은 이 시점을 전후해서 자민당 최대파벌 다케시타의 주도권이 뒤바뀌었다고 분석한다. 다시 말해서 파벌 운영의 주도권이 다케시타의 손에서 가네마루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후 일본 정치가 최대 파벌을 장악한 가네마루에 의해 요리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가네마루가 對北 관계개선에 관심을 보이게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가네마루는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용 정치가에 불과한 존재였다. 국대위원장, 방위청장과 자민당 간사장 등으로 이어진 그의 정치 이력이 말해 주듯 외교 분야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 없었다. 또한 그는 ‘반공 정치가’이기도 했다. 72년 일? 중국교수립 이후 일본 정계에 중국러시현상이 일었다. 그러나 가네마루는 “대만에 대한 신의를 져버릴 수 없다”며 끝내 ‘친대만파’ 정치가로 남았다.

 이러한 그를 ‘북한의 후견인’으로 끌어들인 것은 당시 사회당 부위원장 다나베였다. 가네마루는 자신의 지론인 정계개편론, 즉 ‘自?社 대연합’을 추진하기 위해 다나베가 필요했다. 다나베 역시 사회당의 마지막 숨은 카드인 ‘북한 카드’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자민당의 실력자 가네마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러한 양자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도출된 것이 90년 9월 평양에서 발표된 ‘3당 공동선언문’이다. 가네마루는 이때 김일성 주석이 연출한 ‘묘향산 독대’에 감격해 “정치적 생명을 걸고 관계정상화를 추진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스스로 ‘북한의 후견인’이 되겠다고 나섰다. 가네마루는 지난 1월 미야자와 총리로부터 자민당 부총재 취임 요청을 받았을 때도 “일?조 관계정상화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다짐을 미야자와로부터 받아냈다.

 

다나베와의 친교가 ‘북한 후견인’ 길 터

 이 ‘가네마루-다나베 라인’이 최근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나는 가네마루의 미국 방문이 이달 중순에 실현된다는 점이다.

 가네마루는 ‘3당 공동선언’ 이후 미국 정부에 “북?미 관계개선을 위해 다리를 놓고 싶다”는 의사를 수차례 표명해왔다. 그러나 미정부의 회답은 그때마다 ‘NO'였다. 그가 너무 북한에 기울어 있다는 것이 거부 이유였다. 심지어 미정부 당국자들은 가네마루를 ’북한의 앞잡이‘로 혹평하며 그의 제의를 무시해 왔다.

 가네마루가 지난 4월15일 평양행을 포기한 것도 실은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북한의 초대장과 다나베의 동행요구에 망설이고 있던 가네마루에게 미정부 당국자는 이렇게 경고했다. “지금 북일관계에 깊이 개입하는 것은 당신에게 결코 이로운 일은 아니다.”

 결국 가네마루는 미국의 경고를 받아들여 평양행을 포기했고, 그 대가로 그는 이번 미국행 티켓을 손에 쥐었다. 또 덤으로 그에게 백악관 입장권까지 발부되었다.

 일본의 관측통들은 이 백악관 회담에서 가네마루가 부시 대통령에게 북한의 대미 관계 개선 메시지를 전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내다본다. 또 하나는 대북관계의 민간창구 역할을 맡을 ‘일?조우호협회’가 이달 중 도쿄에 설립된다는 점이다. 가네마루, 다나베 등은 일?조 수교를 측면 지원하기 위해 작년 9월 이후 이 민간창구의 설립을 서둘러왔는데 지난 4월 이미 준비절차를 마쳤다. 대일수교의 총책임자인 김용순 노동당세기도 이때를 즈음해 방일할 것으로 알려졌다.

 가네마루 다나베 그리고 김용순 라인이 또 다시 관심을 끄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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