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알제리에 ‘회교돌풍’
  • 김춘옥 국제부장 ()
  • 승인 1991.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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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근본주의 ‘집권당 독재’에 반발, 유혈사태 한달째

 엄격한 회교 율법에 따라 아직도 여자 혼자 거리의 카페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도시. 수도 알제의 유서 깊은 코우바 사원은 탱크와 헬리콥터의 격한 외침으로 덮여 있었다. 지난달 28일 금요일. 이슬람구국전선(FIS)당 지지자 2만여명은 이곳에서 정부군에 대항한 ‘지하드’(성전)를 외치고 전의를 다지면서 격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방금 전 이들의 지도자 아바시 마다니 FIS당수가 “계엄군과 바리케이드를 철수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지하드를 피할 수 없다”고 위협한 것이다.
 
이날은 6월 5일부터 알제리에 실시된 계엄 이래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최대의 격전이 벌어진 다음날로 마침 회교도들의 금식과 기도의 □□인 금요일이었다. 집권당 민족해방전선(FLN)의 일당독주에 항의하며 FIS를 중심으로 뭉쳐진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은 아랍인 특유의 기도문을 외쳤다.

 “신은 더 위대하다”(사회주의보다), “신이여 이 땅을 갈라서 우리 이슬람교의 적인 이 나라 지도자들을 삼켜주소서.” 이들의 격정은 런던대학 철학박사로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을 답습하고자 교수직을 버린 채 79년부터 ‘거리의 선동자’가 된 마다니 당수가 함께 울면서 “평화적 해산”을 요구하자 드디어 잠잠해졌다.

 6월 한달 동안 50여명의 사망자를 낸 알제리 사태는 작년 6월 시의회·주의회 선거에서 최대당으로 부상한(54% 지지표 획득) FIS가 6월 27일로 예정됐던 총선에 앞서 “선거법이 불공정하다”면서 전국 3백만 지지자들에게 시위와 파업을 종용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계엄선포 직후 10년 이상 알제리를 통치해온 차들리 벤제디드 대통령은 FLN당 중앙당원이기는 하나 큰 영향력이 없는 시드아메드 고잘리를 총리에 임명했다. 17일에는 정치적 성향보다는 행정능력 위주로 29명의 자료가 임명됐다. 급기야 지난 1일 새 내각은 마다니 당수를 체포하면서 “무정부 상태를 원치 않는다”는 정부의 의지를 확고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6개월도 못 갈 것으로 보여지는 새 내각이 엄청난 변혁을 결정하지 않는 한 “프랑스 식민지 가운데 가장 악랄하고 저항적이었다”는 알제리인들의 새로운 국내 봉기를 막기는 힘들어보인다.

“옛 영화 되찾자” 슬로건. 공감대 형성
 한반도보다 10배도 넘는 국토를 가졌지만 90% 이상이 사하라 사막으로 덮인 알제리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외세에 시달리다가 근세에 들어와서는 1백30여년간 프랑스 식민통치를 받는다. FLN이 주축이 돼 62년에 독립을 쟁취한 후 알제리 인민민주공화국은 30년 동안 독립·반제국주의·비동맹 3원칙을 내세우고 사회주의와 이슬람교리를 동시에 추구하는 일당 독재국가의 길을 치달아 왔다.

 그러던 중 식량난·주택난에 소비재의 절대적 부족, 국제시장에서 원유가 하락으로 세입이 현저히 줄어들고 실업자가 30%에 육박한 알제리에서 “모든 이슬람교도는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 이슬람제국의 영화는 되찾아야 한다”는 FIS의 슬로건은 공감대를 넓혀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주동이 된 88년 10월폭동(사망 1백73명)을 겪은 후 작년 2월 정부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다당제를 채택했다. FIS는 이후 9개월만에 3백만명의 당원을 확보하며 집권당을 위협해왔다.

1940년대 이집트에서 결성된 ‘이슬람형제단’을 주축으로 생겨난 이슬람근본주의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실망한 알제리인들에게 사회주의의 반서구 논리를 대체해주면서 빈곤층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이는 작년 하버드대학의 스탠리 호프먼 교수가 “공산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면서 앞으로 세계에는 민족주의와 근본주의(회교·힌두교 등) 이데올로기가 지역에 따라 힘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한 예언과 맞아 떨어진다. 회교혁명 전파를 두려워하는 인근 국가들, 알라신의 광신도를 두려워하는 서구 기독교국가들, 이들의 대응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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