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蘇 ‘밀착시대’ 다가온다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0.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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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미·소정상회담 등 중요 계기될 듯 … 남북관계 개선으로 북한 고립화 막아야

한·소관계가 급진전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상호 영사관계 수립에 합의함으로써 경제관계에서 정치관계로 한발짝 전진한 한·소관계가 최근 들어 국교수립이 운위되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한·소의 관계개선은 한반도의 냉전구조에 변화를 가져오고 이에 따른 연쇄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도 관심이 집중되고 잇는 문제이다.

최근의 한·소관계 급진전의 움직임은 2월들어 소련 고위인사들의 강도높은 한반도 관련 발언이 계속되면서 시작되었다. 2월초 있었던 미·소 외무장관 회담 직후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문제의 ‘한반도장벽’발언을 하여 소련인사들의 한반도 관련 발언 러시의 포문을 열었다. 물론 그가 언급한 ‘한반도장벽’을 둘러싸고 시비가 일기는 했지만 그의 발언은 소련측 고위인사로는 최초로 한반도 분단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됐다.

셰바르드나제 발언에 이어 고르바초프의 對한반도정책 입안자로 알려진 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의 게오르기 크나제 한·일 정치연구부장도 일본 <마이니치신문>과의 회견에서 한·소간의 국교수립은 시간문제라고 언급,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이 회견에서 △소련과 북한의 동맹관계는 변질되었다 △소련은 한국의 유엔 단독가입에 반대하지 않는다 △소련과 한국의 관계진전은 북한-미·일 관계에 연계되어 있지 않다고 언급, 한반도정책에 대한 소련의 新思考 정책을 처음으로 명확히 표명하였다.


蘇관리 對韓발언 러시에 정부 움직임 활기

소련 고위관리들의 한국관계 발언이 잇따르자 이를 한·소 국교정상화의 기회로 삼고자 하는 정부의 움직임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2월15일 崔浩中 외무장관은 “한반도 긴장완화와 공식외교관계 수립을 위해” 중국과 소련에 외무장관 회담을 공식적으로 제의했는데, 여기에는 외무장관 회담이 국교정상화의 전초가 되었던 타국의 사례에 비추어 이를 한·소 국교정상화 과정에도 적용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정부는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金泳三 민자당 최고위원의 소련방문을 한·소관계 정상화를 위한 중요한 계기로 삼는다는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장관의 외무회담 제의에 대해 겐나디 게라시모프 소련 외무부 대변인 2월19일 한국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유엔과 같은 중립적 장소에서 한·소 외무장관 회담이 수교전이라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했는데, 이로써 소련측이 경우에 따라서는 외무장관 회담에 적극적으로 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국제정치적인 맥락에서도 올해와 내년 상반기는 한·소관계의 진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 지적된다. 소련 고위인사들의 발언 러시가 2월초의 미·소 외무장관 회담에서 한반도 긴장완화에 대해 미·소가 일정하게 합의를 본 직후에 나온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반도 관련 의제가 정식으로 채택될 것이 거의 확실해보이는 올 6월의 미·소정상회담도 또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년 상반기에는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일본 방문이 예정돼 있다. 현재 일·소관계에서는 북방영토 문제가 장애가 되고 있는데, 고르바초프의 방일을 계기로 양국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면 이후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소련측의 움직임이 일층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이에 다라 올해안 아니면 내년 상반기까지 한·소 국교수립 문제를 매듭짓는다는 방침아래 정부·민간·정계 등 우리의 자체역량과 미국 등 주변국 외교채널을 총동원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소관계 급진전의 토대는 이미 양국간에 상당기간 동안 축적된 내적인 동력에 의해 마련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80년대 중반부터 가속화된 한국정부의 북방외교와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신사고외교에 따른 對韓觀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정부의 북방외교는 사회주의권 개혁의 흐름속에서 동유럽과의 정치관계 수립과 중국·소련에 대한 경제진출을 축으로 진행돼왔다. 물론 가장 중요한 목표는 중·소와의 정치관계의 수립, 즉 국교정상화에 놓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중·소와의 정치관계 수립은 양국이 모두 북한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정경분리의 원칙을 고수함에 따라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어왔다.

소련정부의 정경분리 원칙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이후 소련의 개혁정책이 더욱 가속화됨에 따라 극동 및 시베리아의 개발문제와 생필품 부족의 해소를 위해 한국과의 경제교류 확대가 더욱 요구되면서부터이다. 소련과의 경제교류는 한국기업의 입장에서도 부족한 천연자원의 공급처로서, 그리고 상대적으로 발달한 소비재나 전자제품 등의 판매시장으로서의 소련의 잠재력이 매우 높기 때문에 가능성이 큰 것으로 평가된다.

경제적 이유 외에 주목해야 할 것은 소련이 한반도정책에서 신사고적 관점을 도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한·소 경제교류가 그렇듯이 86년 7월 고르바초프 사기자의 블라디보스토크 선언과 88년 서울올림픽 직전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이 계기가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에서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아시아·태평야 국가’로 규정하면서 체제의 차이를 넘어 이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할 것을 명확히 하였고,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에서는 한국과의 경제관계 수립 가능성에 대해 언급, 한·소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갈 것임을 시사했다.

전문가들은 이때를 계기로 소련의 한반도 정책이 국익우선의 현실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재검토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즉 그 이전의 소련의 정책은 독자적인 입장이 없이 대체로 북한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었는데, 이때부터 한국을 의식한 정책을 수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무엇보다도 한국을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곧 한반도에 ‘두개의 국가’가 존재한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또하나의 주권국가인 한국과의 국교수립이 소련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 점차 분명해져간 셈이다. 또한 교차승인이 한반도의 분단을 영구화할 것이라는 북한의 입장에 대해서도 소련은 한반도 분단 영구화 반대에 대해서는 북한의 입장에 동의하면서도, 교차승인 곧 분단 영구화로 이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를 달리 해석하기 시작했다. 즉 분단된 상태에서 남북한이 서로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해도 남북한이 통일되면 통일국가와 새롭게 외교관계를 수립하면 되기 때문에 교차승인이 곧 분단 영구화로 이어질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蘇 한반도에 新思考외교 적용

한반도의 긴장상태 완화를 통해 군사비 부담을 줄이고 싶어하는 소련으로서는 교차승인이 한반도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북한이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우선 한국과 소련이 국교관계를 수립하고, 그것의 파급효과로서 미·북한간의 관계정상화를 촉진하는 전략으로 방침을 수정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최근의 게오르기 크나제 한·일 정치연구부장의 도쿄 발언은 이러한 소련의 한반도정책에서의 신사고 관점을 공식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소련이 한국과의 국교수립 문제에 대해 내부에서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곧 가시화될 것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시기와 조건의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소 국교정상화의 조건으로 소련은 한국의 대소경제진출 확대를 요구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이는 지난해 9월 한국을 방문한 미하일 카피차 소련 과학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장(전외무차관)이 “한·소 국교정상화는 한·소 경제교류가 한·중간의 수준(연 30억달러)으로 발전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발언한 것, 그리고 최근 게라시모프 소련 외무부 대변인이 국교수립을 한·소 경제관계의 확대와 연계하여 언급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시기의 문제에서 소련은 한·소관계의 급진전이 북한의 고립화로 귀결되지 않을 시점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소련의 외무부 등 관료층은 한·소 수교로 북한이 고립되는 것에 대해 강한 우려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북한의 고립화는 결국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화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소련의 국익이라는 관점에서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련은 북한에 대해 개방압력을 가하는 한편 미국 및 한국에 대해서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촉구하는 정책을 병행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최근의 한·소관계의 급진전 양상은 분명히 한반도 냉전구조의 한 귀퉁이를 무너뜨려 긴장완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것이 결과적으로 북한의 고립화로 귀결된다면 역으로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화라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소 국교정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잇는 정부당국이 남북관계 개선에도 그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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