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히 멀어져가는 코리! 코리!
  • 여운연 편집위원보 ()
  • 승인 1990.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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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아키노, 국민불신 증대로 임기전 퇴임 가능성

지난 86년 취임 이후 줄곧 국내외 도전에 시달리고 있는 아키노 필리핀대통령은 쿠데타 진압 3개월이 지난 현재도 좀처럼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 채 정치적 곤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내 제2인자인 라우렐 부통령을 비롯, 마르코스 정권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엔릴레상원의원, 舊재야세력인 살롱가 등 3분된 정치세력 틈바구니 속에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아키노가 과연 오는 92년까지 대통령직을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최근들어 또다시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아키노는 수일전, 한 때는 아키노를 도왔던 엔릴레 상원의원을 전격 구속시킴으로써 일련의 불안한 조짐들에 대해 단호하게 쐐기를 박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는 오히려 야당과 재야세력을 더욱 자극해 더 큰 혼란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4년전 마르코스를 몰아내고 아키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피플 파워’의 위력도 이제 한낱 ‘추억거리’로 퇴색해버린 것 같다. 필리핀 혁명기념일을 앞둔 지난 2월24일엔 쿠데타를 주도했던 군부내 우익세력을 비롯, 좌익세력들이 대규모 아키노 퇴진요구 시위를 벌여 4년전 뜨거웠던 열기를 무색케 했다. 혼미 속에 민중혁명 기념일을 맞은 아키노는 이날 기념식에서 국민들에게 자신을 대통령으로 추대한 지난 86년 ‘민중혁명’ 정신을 되살려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능력’에 대한 불신은 점점 증대되고 있다. 최대난제인 경제개혁과 부패척결에 이렇다 할 실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데다 정치권의 분열과 군에 대한 통치력 상실, 무엇보다 이제는 아키노 자신이 판단력을 잃고 있다는 비판이 측근들로부터도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아키노의 보좌관을 지낸 한 인사는 “그는 여전히 피플 파워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전했다.

지난번 쿠데타 진압에 미국을 끌어들여 국민들에게 환멸과 염증을 안겨줬던 아키노는 미국의 지지마저 확고하게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중산층도 지지대열에서 이탈

한달전 필리핀을 방문했던 로버트 게이츠 미백악관 안보담당 부보좌관과 짐 콜브 미하원의원은 귀국후 공개적으로 아키노 정부에 비판을 가했고 미언론들 역시 일제히 비우호적인 태도로 나와 아키노를 더욱 궁지로 몰았다. 또한 미국이 약속한 올해 9천6백만달러의 원조도 삭감돼버렸다.

아키노는 12월 쿠데타 이후 수습방안으로 재빨리 내각과 군부조직 개편을 단행하는 한편, 물가를 안정시키고 빈곤층과 부패추방에 전력을 다할 것임을 천명했으나 이같은 노력이 필리핀의 위기를 구해줄 것이라고 믿는 국민들은 별로 없다.

분명한 것은 아키노의 지지기반인 중산층도 시민들도 지지대열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현 정부를 더욱 위협하고 있는 것은 아키노 개인의 지지기반 상실보다 지식층 중에 현 정부에 대한 반대세력이 커져간다는 점이다.

아키노에 대한 국민들의 전반적인 낙담은 그렇다고 해서 군부통치를 지지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키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한 한 지지자는 “우리가 모르는 악보다 아는 악이 낫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집권 초기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바꿔놓았던 실질경제성장률은 계속 신장세를 보여왔음에도 아직까지 인구 총 6천만 중 50%가 극도의 빈곤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그동안 대만 등 신흥공업국가들과 일본 등지에서 늘어났던 해외투자 열기도 위축되어 얼마전 홍콩에서 실시된 한 조사에서는 필리핀이 천안문사태 이후 중국다음으로 두 번째 해외투자 기피국가로 나타났다.

이같은 불안한 국내정세 속에서 필리핀 국민들은 강박관념에 시달리다시피 변화를 원하고 있지만 새로운 돌파구의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변수로서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니나 아키노 사임 등을 포함, 몇 가지 경우를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조기 선거에 대한 가능성인데 이것이 실현되려면 무엇보다 아키노의 결단이 필요하며 헌법도 개정돼야 한다. 또 지난 12월 쿠데타 기도 주도세력, 혹은 피델 라모스 국방장관이 이끄는 군장교들에 의한 쿠데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웨스트 포인트 출신의 라모스 장관은 군부세력 규합에 역부족인 취약점이 있긴 하나 현재로선 가장 유력한 대통령후보로 지목되고 있다. 라모스는 지난 12월 쿠데타 진압에 미국측 군사개입을 요청함으로써 그의 신뢰도와 입지가 훼손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군장교들은 대중의 인기와 미국의 지지를 업고 있는 그를 아키노에 대체될 만한 최상의 인물로 꼽고 있다.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얼마전 구속된 엔릴레 상원의원이다. 86년 국방장관으로 있으면서 쿠데타를 주동해 마르코스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는 아키노 정권 출밤과 함께 국방장관에 기용됐으나 잇따른 불화로 9개월만에 사임했다. 87년 5월 상원의원으로 선출됐고 두차례의 쿠데타 미수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왔다.

그 다음 거론되는 사람은 에드아르도 코잔코 2세. 아키노의 사촌이기도 한 그는 한 때는 마르코스 측근이었다가 나중엔 엔릴레와 가까워진 인물이다. 마르코스 축출후 캘리포니아에서 근 4년간 망명생활을 하다가 지난해 쿠데타 발생 일주일전인 11월24일 소리없이 귀국했다. 코잔코는 필리핀 유수의 대기업체를 거느리고 있는 거부로 그 역시 현재 쿠데타의 자금지원혐의로 고소된 상태다. 그는 탄탄한 자금력에다 조직력을 겸비하고 있어 인척인 아키노家까지 동원해 대권의 야망을 불태우고 있다.

어쨌든 2월혁명 기념일을 전후로 필리핀의 대규모 시위 고비는 일단 넘겼으나 반정부 봉기는 앞으로 더욱 치열해져 아키노 정부를 점점 위기로 몰고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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