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 6공 걸쳐 ‘뜻’ 관철시킨 ‘소신파’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0.03.1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國保委 거쳐 ‘실세’로 성장 … 주변에 견제세력 불러들여

朴哲彦정무제1장관에 대한 세론의 평가는 엇갈려 있다. 신경정신과 의사 ㅈ씨는 그와 같은 ‘수재형’ 인물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승부욕이 강하며 경계심이 많은 편”이라며 “選民의식이 강해서 스스로를 다스리기보다는 남을 조종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따라서 심리적으로 자학형으로 바뀔 소지가 많다”고 진단한다.

기자들은 어떻게 보는가. 지난 연말 중견언론인 친목단체인 관훈클럽의 몇몇 실무팀은 박철언씨를 오찬에 초대, 그의 위인됨을 면밀히 취재한 바 있다. 동석했던 모일간지 정치부장의 ‘박철언론’은 이렇게 시작된다. “인상 자체가 거부감을 주는 얼굴이라서 처음엔 무척 불편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솔직한 인물이며 무엇보다도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소신파임을 깨닫게 됐다.”

그의 한 핵심측근 의원인 ㄴ씨는 “논리적이며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는 사람이어서 비사교적이고 냉정하다는 말을 들으나 이는 거꾸로 얘기하면 비정치적인 사람이란 뜻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그의 한 측근은 자기 보스를 축구의 센터포드로 비유, 게임논리를 가지고 설명한다. “누구나 다 센터포드가 되는 건 아니잖은가. 함께 뛰다보면 역할분담은 자연스런 것이 되고 멋지게 뛰다보면 관중들의 박수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언제부턴가 여야 정치인의 뇌리에 ‘질시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굳어진 박철언,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평범한 법학도가 꿈이었다는 박철언을 우선 성장배경부터 추적해본다. 그는 1942년 8월5일 염색공장을 경영하던 朴泰亨씨(80년작고)와 金棠漢씨 사이에 6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낸다.

박철언은 국민학교 6년간 1학년 때를 빼놓고는 모두 우등상을 탔고 경북중학에 입학해서도 줄곧 우등생으로 일관한다. TK(대구·경북)의 산실로 알려진 경북고에 진학해서는 학업뿐만 아니라 서클활동에도 열성을 보여 <靑脈>이라는 계간지를 만들기도 했고 탁구·핸드볼 등 스포츠에도 능했다고 동생 吉彦씨(42·수성섬유 대표)는 전한다. 60년 경북고를 졸업한 철언군은 ‘축농증 수술’ 때문에 한해 쉬고 이등해에 서울법대에 지각입학, 수석으로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법대 동기생들은 법대 수석졸업자를 高基訓씨(사망)으로 기억하고 있다. 박철언씨의 지각입학도 낙방했기 때문이며, 그의 낙방은 당시 경북고 동기동창들 사이에서 하나의 화제가 됐었다는 것이다.

박철언은 서울법대 재학중 고시에 실패, 졸업 2년만인 67년에 8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서울대 사법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는 육군법무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72년 부산지검에서 첫 검사생활을 시작, 80년 국보위 참여로 일대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는 당시 신군부의 핵심이었던 廬泰愚장군의 부인 金玉淑씨와는 서로 내외종사촌간이었다.

80년초 현직 검사로서 국보위의 법사위원으로 발탁된 그는 5공 출범 후엔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발돋움한다. 당시 각종 개혁입법을 다루는 데 관여했던 朴元出씨(현 정무장관실 제1정책조정실장)에 따르면 박철언씨는 “남을 합리화시켜주는 법률기술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유난히 강조했다고 한다. 특히 全斗煥대통령의 자의적인 법률 강화 내지는 개정지시로 퍽이나 속을 앓았다고 한다.


5공핵심 주변에서 ‘영향력’ 발휘

박철언씨는 85년 안기부장특보로 자리를 옮기면서 당시 노태우 민정당대표와의 관계도 단순한 친인척 관계를 넘어 밀착관계로 바뀌기 시작한다. 박씨 측근들의 분석에 의하면 그의 ‘노태우대통령만들기’ 작업은 이때부터 가동됐다는 것. 박씨가 張世東안기부장의 지시로 4·13호헌조치의 발표문을 작성하면서 ‘단임제 실천’ 문구의 삽입을 강력히 주장, 관철시켰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노대통령의 오늘을 있게 한 6·29선언문 작성과 관련, 그는 지난해 5월 “안기부 소속이었으나 올바른 일을 위해서는 굳이 소속체계에 얽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술회, 당시 그의 의중엔 ‘노대통령만들기’ 작업이 하나의 소명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노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은 그의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으나 반면 여권내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그를 ‘독주’와 ‘월권’의 인물로 보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난 4·26총선 때 전국구 공천에 깊이 간여했다는 설도 문제가 됐지만 특히 박씨가 소위 노대통령의 ‘3단계 통치구상’을 밝혔다거나 후계자 요건 중 군출신은 안된다고 발언한 점은 통치권 영역까지 간섭했다는 비난을 샀다. 5공청산 과정에서 鄭鎬溶씨의 견제책을 맡았다거나 3당합당 작업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점, 정책보좌관 시절 외무부·안기부·통일원을 무시한 채 대북관계에서 밀사외교를 감행한 점도 비난거리다.

이에 대해 그의 분신처럼 행동하는 한 핵심 측근은 그러한 비판이 다분히 ‘오해’나 ‘시샘’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측근은 한 예로 박장관이 헝가리와의 외교수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당시의 박장관 모습을 상기하며 박장관이 공항에서 헝가리로 떠날 때마다 매번 “지나온 내 생애를 정리하고 간다”고 말해 분위기가 숙연해지더라는 얘기를 전한다.


“노대통령 이후의 정치안정 위해 노력할 뿐”

박철언을 지켜봐온 사람들은 그가 오늘과 같은 막강한 실세의 위치에 오른 데는 무엇보다 노대통령이라는 강력한 후견인이 있었기 때문이라 입을 모았다. 이에 대해 그의 한 측근은 “그는 6·29선언, 북방외교, 5공청산, 3당합당 등과 같은 중대한 사안에서 실패한 적이 없다”며 “노대통령으로부터의 신임은 그의 능력으로 얻은 당연한 결과”라며 노대통령의 후광론에 반론을 편다. 대통령과 친인척이라는 관계는 그에게 힘인 동시에 부담이 된다. 대통령의 신뢰와 ‘총애’를 받고 있는 만큼 그의 주변에는 숱한 견제세력이 포진해 있는 것이다. 그는 과연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그를 잘 아는 한 여당 의원은 일부에서 거론하는 박장관의 정치적 야심에 대해, “그는 정치적 야심이 없는 사람이다. 다만 노대통령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고 노대통령 이후의 정치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 이라고 말한다. 국내 정치상황에 정통한 한 미국외교관은 “그에게 천재성이 있다면 앞으로의 정치발전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를 감별해내는 투시력이 있다는 점일 것” 이라며 “그러나 金泳三씨나 金鍾泌씨가 있는 한 그의 정치적 입지는 결국 그에 대한 노대통령의 지지와 연결될 수밖에 없을 것” 이라고 분석했다. 현재로서는 노대통령과의 연결고리가 박철언장관을 떠받쳐주는 힘의 원천이다. 따라서 과연 이 고리를 끊고 언젠가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느냐에 그의 정치적 장래가 좌우될 수 있다고 하겠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