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사범으로 체포된 워싱턴 시장
  • 워싱턴ㆍ이석렬 특파원 ()
  • 승인 1990.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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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의 희망’ 매리온 배리 FBI 함정수사에 걸려… ‘블랙파워’ 정계진출에 惡材

 마약사범과 이런 범죄에 관련된 살인사건이 미국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여 ‘범죄의 首都’로 낙인찍한 워싱턴 D.C.가 ‘행정의 수도’로서의 면모에 더욱 먹칠을 당하고 있다. 3선의 민선시장 매리온 배리(53)가 법무부, 연방수사국(FBI) 및 수도경찰국 합동수사반에 의해 마약사범으로 체포되어 고발된 사건은 워싱턴 정가뿐만 아니라 미국 전체에 큰 충격파를 일으키고 있다.

 인구 63만명의 상당부분이 흑인이고 또 이들의 거의가 민주당원인 워싱턴시의 행정을 지난 11년 동안 막강한 민선시장으로서 거머쥐어온 흑인 민권운동가 출신 배리 시장의 체포는 단순한 하나의 형사범 검거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었다. 작게는 미국의 흑인사회에 도덕적 부담을 안겨주고 크게는 미국정계에 여러가지 변수를 가져다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도시의 시장들을 둘러싼 각종 부정부패나 정치적인 비리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배리 시장의 체포와 고발은 지금까지의 어떤 정치인의 부정부패사건과도 그 성질이나 의미가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도 연방정부의 모든 기관이 모여 있는 한 나라의 수도 한가운데에서 시장 자신이 마약 현행범으로 검거되었으니, 정치의 심장부가 지닌 상징성을 여지없이 짓밟아 미국 전체의 위신을 깎아 놓은 일로 지탄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사건은 그동안 워싱턴을 市에서 州로 승격시키는 운동을 벌여온 흑인민권운동가들과 정치인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의회는 시장의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켜왔는데, 이에 새로운 구실을 주어 워싱턴 시장선거제도에 제동이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최근 중간선거에서 나타났듯이 사상 최초로 버지니아주에서 흑인주지사가 선출되고 뉴욕시에도 흑인 시장이 처음으로 취임하는 등 선거에 의한 흑인 지도자들의 고위직 진출의 문호가 막 열리려 하던 때에 이런 사건이 터졌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백인들보다 도덕적 결백이 더욱 요청되는 흑인들의 정계진출 부담을 한층 가중시켰다는 점이다.

 이에 못지않게 배리 시장의 체포는 하나의 우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을 흑인 청소년들에게 안겨주었다는 점도 있다.

 미시시피 남부 깊숙한 농촌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식모살이를 하는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목화밭의 삯일꾼에서부터 식당의 종업원과 신문배달로 대학을 나와 모든 사람의 선망의 대상인 수도의 시장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조만간 4선에 무난히 당선되고 그 뒤에는 부통령후보나 상원의원자리쯤으로 출세가도를 질주할 것으로 기대와 촉망을 한몸에 받아온 배리 시장은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이었던 것.

 흑인 민권운동의 최종 목표가 정치권력의 획득에 있음에 비춰볼 때 그의 출세는 흑인들에게 ‘미국의 꿈이 현실화한 희망의 상징’이었다.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에 때로는 너무 성질이 급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던 배리 시장에게 마약복용의 혐의가 있다는 말이 나온 것은 10년전부터였다. 마약상습자들이 출입하는 술집에서 그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다가 경찰은 2년전에 결정적인 단서를 잡았다. 한 호텔방에서 배리 시장이 찰스 레위스라는 마약밀매자와 동석하고 있는 것을 마약단속에 출동한 경찰이 발견한 것이다(공교롭게도 레위스는 배리 시장이 고발된 날 마약죄로 같은 법원에서 15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배리 시장은 친구와 우연히 동석했을 뿐 마약과는 전연 관계가 없다고 결백을 주장하면서 “나를 매카시즘으로 몰아 정치적으로 매장하려는 음모일 뿐”이라고 펄쩍 뛰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인 지난 1월18일 저녁 8시 배리 시장은 10년 동안 가까이 지내온 흑인모델 라시다 모어(38)의 전화를 받고 한 호텔로 그녀를 만나러 갔다. 방에는 낯선 또 한명의 젊은 여자(FBI요원)가 있었는데 모어는 자기 친구라고 소개했다. FBI에 의하면 이 때 배리 시장이 모어에게 코카인을 주문했다. 따라온 낯선 여자가 돈을 받고 코카인를 배리 시장에게 건네주자 그는 파이프에 놓고 몇모금 빨다가 들이닥친 수사관들에게 체포되었다고 한다. “네가 나를 유인해서 덫에 걸리게 했구나.” 그는 모어에게 고함을 쳤다고 한다.

 배리 시장은 이혼한 전부인에 의해서는 거액 공금절도혐의로 고발당한 일이 있고 여자들과 얽힌 추문이라든가 시정에 얽힌 부정사건 등에 대한 혐의도 받고 있다.

 유죄를 인정하고 갱생원에서 치유를 받아 배리 시장이 다시 4선에 도전할 것인가. 후원자들이 그를 지원할 가능성이 희박해서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제시 잭슨 목사가 시장출마를 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런 경우 2년뒤의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이 다소 쉬워질 것으로 보이지만 잭슨 목사가 시장직에 있다가 대권에 재도전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측근의 말이다. 마약과 여자가 한 정치인을 파멸시켰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좌절시킨 예를 배리 시장의 경우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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