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속에 태어난 전노협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0.02.1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국 “반드시 와해시키겠다”에 사회운동세력 “구태의연한 탄압”

최근 공식출범한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에 가입된 것으로 알려진 노동자수는 20만. 이 숫자는 우리나라 ‘1천만 노동자’의 20분의 1, 지금껏 유일한 전국적 노동조합조직이었던 ‘한국노총’에 가입한 조직 노동자수의 8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조직의 출범을 둘러싸고 정부ㆍ재계ㆍ노동계는 물론이고 많은 국민들의 관심이 쏠려 있다. 이 조직을 어떤 시각으로 보든지간에 이 조직이 앞으로 20만이라는 단순 숫자 이상의 대단한 영향력과 파문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기 때문이다.

 1월22일 오후 12시50분. 전노협의 창립은 당국의 원천봉쇄와 주최측의 기습적인 장소변경과 대회강행, 뒤이은 경찰의 대회장 진입과 관계자 연행이라는 ‘낯익은 코스’로 치러졌다. 혹한과 당국의 저지망을 뚫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대의원 5백여명이 비밀리에 연락을 받은 성균관대 수원캠퍼스 학생회관에 모여들어 段炳浩(41) 서울노조협의회의장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마침내 이땅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번에 출범한 전노협은 87년 7, 8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폭발적으로 등장한 신규노조들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스스로를 ‘민주노조’라 부르며 ‘노총산하 노조’와 구별하고 있는 이들 노조들이 ‘지역별ㆍ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전국회의)를 만든 것은 88년 12월. 이로부터 1년간의 조직정비를 거쳐 ‘전국회의’에서 진일보한 ‘전노협’이 세워진 것이다. ‘민주노조’세력들이 전국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데 대해 金準龍(33) 전노협 사무차장은 “자본과 권력의 탄압과 노동악법이라는 제약조건에 개별노조의 약한 힘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었고, 조합원들의 유구도 단순한 임금문제만이 아니라 주택ㆍ세금ㆍ실업문제 등으로 더욱 넓고 다양해져서 단위노조 차원에서는 이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전노협이 이름에 걸맞는 전국조직으로 서는 데에는 적지않은 ‘장애’가 도사리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의 민주노조 열기로 현대자동차, 기아산업, 금성사 창원공장, 대우조선, 현대중공업 등 유력한 대기업 노조 집행부 선거에서 잇따라 ‘민주노조파’가 당선돼 전노협측에 자신감을 보태주긴 했지만, 6백여개의 가입노조 대부분이 여전히 중소기업에 편중되어 있는 한계를 안고 있다. 게다가 아직도 노총산하에 남아 있는 대다수 노조와의 관계도 껄끄러운 편이다. 이는 전노협측이 노총을 “태어날 때부터 권력의 하수인으로 등장한 만치 노동자의 편에 서서 급격히 성장한 민주노동자들의 요구를 진정으로 대변할 수 없는 어용조직”으로 규정하고 새조직을 출범시킨 만큼 피할 수 없는 갈등이기도 하다.

“아래로부터 올라온 정통성 가진 조직”

그 무엇보다도 전노협의 진로를 가로막는 가장 험난한 장애는 이 조직을 “산업평화를 위협하고, 정부와 자본을 적으로 규정하는 노동해방세력이자 급진용공집단”으로 보는 정부와 재계의 시선과 이에 따른 강경대처라 할 수 있다. 당국의 정책은 ‘산업평화조기정착’이라는 차원에서 반드시 전노협을 와해시키겠다고 선언한 데 이어 이 조직과 그 산하지역협의회의 단위노조 지원을 ‘제3자 개입’으로 처벌하는 한편 전노협에 관계된 일체행사를 원천봉쇄하겠다는 초강경대응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전교조’를 비롯한 사회운동세력들은 전노협의 조직적 기반에 비해 정부와 재계가 지날칠이만큼 ‘과잉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대해 스스로 불안정을 자초하는 구태의연한 노동자 탄압이라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노동관계자들도 이번 창립대회에 발표된 전노협의 강령이 ‘주44시간 쟁취’ 등 주로 노동자 생활의 기본적인 요구조건을 내걸었을 뿐 ‘노동해방’ 등의 요구를 전면에 떠올리지 않은 점, 올봄 임투에 대비한 임금인상안으로 지난해 ‘전국회의’ 때의 요구보다 10%나 낮은 23.2%를 제안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전노협을 급진세력으로만 몰아붙이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하고 있다. 경제학계의 원로인 金潤煥교수(단국대)는 “수긍하기 싫더라도 전노협은 아래로부터 올라온 정통성를 가진 조직”이라면서 “그 현실적 존재를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평화는 상대방을 ‘현실’로 서로 인정할 때 비로소 존재한다. 어느 한쪽만이 상정한 ‘산업평화’, 어느 한쪽의 이익만이 관철되는 ‘사회정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큰 갈등만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게 아닐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