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 지키는 ‘샘물’들
  • 김형국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본지 칼럼니스트) ()
  • 승인 1991.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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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영문학자 김우창 교수가 소개한 해학적인 영시 한 구절을 인용한다.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나열한 시다. 떨어지는 별똥 잡기, 외국 갔다온 사람 입 다물기도 어려운 일 중에 어려운 일로 꼽았다. 외국은 아니지만 최근 다녀온 향기로운 내 나라 땅 사정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바야흐로 무더위가 깊어가는 초여름, 난세라 할지라도 돌 틈에서도 한 줄기 샘물이 솟는 법. 이 땅의 진솔한 삶이 바로 그런 샘물이다. 지방의 매력은 자연의 아름다움 못지않게 그 풍토와 하나가 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데 있다. 개인적 명리만이 간판인 도시사람과는 다르다.

 여기 두 사람 이야기에 대해 입 다물고 있기가 역시 어렵다. 경주의 신라문화 흔적에 신앙을 갖고 있는 윤경렬씨와, 7대조가 도자기 가마를 처음 연 경북 문경 땅에서 가계를 이어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 김정옥씨가 그 사람이다. 전국 곳곳을 다녀보는 것이 국토개발이 전공인 내 공부의 필수인데도 바쁘다는 핑계로 가보기를 미룬 지 몇 년만, 올 상반기에사 소원을 풀었다.

신라문화를 발로 뒤지는 ‘최후의 신라인’
윤씨는 경주의 유적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의 글을 읽어본 사람들에겐 진작 익숙한 이름이다. 6·25때 피난와서 경주에 자리잡은 뒤 경주 일대에 파묻힌 신라문화를 일일이 발로 뒤져 마침내 ‘최후의 신라인’이란 애칭을 듣는 분이다. 특히 신라의 민간 불교유적이 산재한 남산에 대한 식견은 문화재 전문가들이 귀담아 들을 정도로 전문적이다. 또 그곳 문화의 선양을 위해 어린이 박물관 학교도 꾸려간다. 외지인들이 이것저것을 물어올 때 대답을 못하면 경주사람의 수치라면서 열심히 어린이들에게 신라문화를 가르친다.

 남산의 산등성이나 계곡의 여러 가지 자연석에다 새겨둔 불상들은 정통한 사람의 안내 없이는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가리기 어렵다. 윤옹에 대해서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나이 □ 80의 그에게서 안내는 기대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아침 식전에 맥주 몇잔 들이키곤 신명이 난다면서 불쑥 안내를 자청했다. 도시의 근교 산치고 높이가 만만찮은 남산을 오르는 데 젊은 사람은 족탈불급, 실례 말씀이지만 다람쥐처럼 산길을 뛰어올랐다.

 1년에 1천만명이 다녀간다는 국립공원 경주이지만 고작 왕실 불교의 걸작품 불국사와 석굴암을 거쳐, 그 다음 보문관광단지를 보는 것으로 경주관광은 끝난다. 이게 경주관광을 나선 한국사람의 보통 체험이다. 그탓에 그곳 지리에 훤해야 할 관광버스 운전사도 남산가는 길에는 까막눈이라 윤옹이 일일이 찻길을 가르쳐줘야 했다.

 나는 그 남산을 보고 이 땅에 태어난 자부심을 뼈저리게 느꼈다. 남산을 보지 않고 경주를 봤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밖에는, 감격에 겨워 말문이 막힌다. 대신 고미술학자 김원룡 박사의 감격을 인용한다. “솔나무 옆의 두리뭉실한 바위가 갑자기 부처가 되고 흐르던 시간이 소리없이 멎어서 신라로 돌아간다. 천년, 부처는 그렇게 앉아 계시고, 천년, 그렇게 서계실 것이다. 부처는 바위, 바위는 부처, 우러러보는 사람도 부처, 모두 피가 통하는 일심일체이다.”

 유적을 설명하면서 지역감정도 경계해 마지 않았다. 통일신라 형성 이후 빼어난 백제 땅 출신 명공이 대거 참여, 불교문화를 꽃피웠는데도 지역감정의 속좁음을 벗지 못하는 이 시대의 얄궂은 우리 백성은 통일신라의 문화가 마치 경상도 땅의 문화인양 치부하는 잘못을 저지른다고 개탄하다.

7대를 이어 한길 걷는 도공
 수안보를 지나 이화령 고개를 넘으면 경북 땅 문경이다. 그 길가에 눈을 닦고 보면 겨우 영남요란 간판을 찾을 수 있다. 선대로부터 배운 대로 그 주인 김씨는 매일 혼자서 도자기를 빚는다. 1백50년이나 된 옛가마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문화재 전문가들에 의해 확인되기 전까지는 일본 사람 취향의 찻그릇을 만들어 호구해왔다. 최근에사 전문가들의 청에 따라 재현해본 도자기는 몇백년 전 우리 백자 그대로였다.

 물레질에 바쁜 그에게 백자 보여주기를 청했다. 요즘 만든 게 없다면서 종이상자에서 몇 개 부스스 꺼내면서 좋지 않은 것이라 겸양했다. 옛 도공이 꼭 저랬을 것이라 싶었다. 사람을 만나는 태도가 백자처럼 해맑았다. 온갖 천시와 가난에도 7대를 이어 한길로 걸어온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향기였다. 가마를 전시장처럼 만들어둔 서울근교의 기업형 도공과는 딴판이었다. 옛것이 새롭다더니, 장작불티가 옥의 티처럼 표면에 작은 점을 연출하는 것도 한 아름다움인 우리 백자의 묘미에 착안, 그걸 세계적인 유명 도자기로 만든 덴마크 그릇의 원조가 거기에 있었다.

 지방은 아직도 땅이 푸근하다. 향기로운 사람이 있어 푸근함이 더해진다. 한길에 정진하는 사람들이 마침내 지방의 땅을 빼어나게 만든다. 이 여름, 그런 지방을 발견하는 것도 보람의 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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