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간호학과 문화인류학의 만남
  • 남원ㆍ이문재 기자 ()
  • 승인 1990.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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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 ‘간호학연구소’ㆍ한양대 姜信杓교수팀, 전북 남원서 ‘돌봄과 보살핌’ 공동학술조사

 간호(의료)행위에서 사회문화적 측면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미국의 의학계에서 1950년대 후반 간호학자 라이닝거(Leininger)가 인류학에 눈뜨고 ‘문화간호’를 주창하면서부터였다. 자연과학적인 간호이론만으로는 각기 다른 민족문화를 가진 환자들을 효과적으로 간호거나 치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내에서는 80년대 초반부터 문화현상과 관련된 건강ㆍ질병ㆍ정신건강 개념 등의 연구가 조금씩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문화간호’의 목적은 ‘환자들의 문화욕구에 부합하는 효과적이고 만족스러운 간호의 제공’에 있다.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간호나 치료행위의 오류는 유학생들이나 이민을 떠난 사람들로부터 손쉽게 확인된다. “반드시 한국인 의사를 찾아가라”는 유학생 사회의 ‘금언’은 문화의 차이가 곧 의료의 차이로 드러남을 잘 말해준다. 최근 국내 간호학계에서 우리의 사회문화에 걸맞는 ‘문화(민족)간호’를 정립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이 시도되고 있어 주목된다.

서구의 간호이론 우리 문화에 안맞아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는 ‘돌봄’과 ‘보살핌’이라는 독특한 간호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다. 엄청난 속도의 산업화에 의해 비롯된 농촌의 空洞化와 핵가족 현상은 우리의 전통적인 간호(돌봄과 보살핌)의 모습을 여지없이 증발시키고 있다. 전통적인 문화는 그 문화 속에서 자라난 모든 구성원들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간호현실은 서구에서 들어온 서구의 간호이론에 바탕해왔다.

 지난해 ‘간호학연구소’(소장 金文實)를 개설한 이화여대 간호대학 崔榮熙학장은 “우리 간호개념은 그동안 다름아닌 우리의 사회 문화적 측면을 무시해왔다”고 말한다. 간호사의 간호개념과 환자가 기대하고 있는 간호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환자들의 불만은 당연한 것이었다.

 ‘간호학의 정립과 한국의 전통문화’를 주제로 지난해 이대 간호학연구소가 마련했던 심포지엄은 간호학과 문화인류학의 만남으로,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 깃들어 있는 돌봄의 구조를 우리의 현대 간호(학)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학문적 노력이었다.

 지난해 심포지엄에서 그 필요성이 제기된 우리의 총체적인 ‘문화간호’ 현실화를 위한 하나의 연구팀이 구성되었다. 이화여대 간호대학장 최영희교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姜信杓교수(한양대 민족학연구소장), 군산 개정간호전문대 조명옥교수(이대 간호학과 박사과정), 수원간호전문대 강사 원종순씨(〃), 이미숙씨(〃), 김애정씨(이대 간호학과 석사과정) 등이 그들인데, 이 연구팀은 지난 1월15일부터 20일까지 전북 남원군 사매면 서도리 노봉부락을 찾아 가족주의로 대표되는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공동체적인 돌봄과 보살핌의 원형을 찾아보는 학술조사를 펼쳤다.


돌봄과 보살핌이 곧 우리네 삶

남원 노봉부락은 전주-남원간 국도의 명물인 춘향이고개 앞에서 오른쪽으로 시오리가량 비포장도로로 들어가는 산기슭 오지이다. 연구팀이 이 부락을 택한 까닭은 노인들이 많아서 전통적인 모습들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학술조사는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주의와 공동체(마을)문화속에서 ‘생로병사’가 어떻게 돌보아졌는지에 일단 초점을 맞추었다. 연구팀은 이번 조사에서 노인들의 개인사를 전반적으로 인터뷰하면서 민속용어와 행위 속에 자리잡고 있는 돌봄과 보살핌을 분석, 그것을 체계화하기로 했다.

 55호되는 노봉마을의 가구당 평균 경작지는 논 15마지기 정도이며 농업소득 이외의 부업은 송이버섯 채취와 겨울철에 외지로 나가 막노동을 하는 집도 있다. 그렇게 빈한하지는 않은 한국농촌의 평균적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노봉마을에도 젊은이들이 없다. 2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청장년층이 전체 3백여 주민 가운데 서너명에 불과하다.

 연구팀이 일주일간 만나기로 한 다섯 노인들은 80세 전후의 고령으로 이 마을 토박이였다. 홈실할아버지 부부, 순몰할머니, 보성할머니, 나산할머니 등 노인들은 본명 대신에 ‘택호’로 불리었다.

 홈실할아버지 부부는 할아버지가 85세, 할머니가 89세로 단 둘이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12세 때 부모를 여의고 그때부터 집안살림을 꾸려나왔다. 건강해보인다는 연구팀들의 인사에 노부부는 “지금 죄받니라고 이렇게 살어” “제 얼굴 제가 뜯어먹고 사는 거여”라고 답했다. 이들 부부는 십수년전 장성한 아들을 마을 앞에서 교통사고로 잃었다. 홈실할아버지 부부의 개인사에서 가장 뼈아프게 자리잡고 있는 기억이 아들의 죽음이었다.

 8개월 동안 문 밖 출입을 끊을 만큼, 5년 동안 눈물이 나올 만큼 커다란 아픔이었지만, 늙은 부모는 그 아픔을 견뎌냈다. “고생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하면서도 홈실할아버지 부부가 들려준 ‘견뎌냄의 미덕’은 우리 옛 삶 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는 생존의 한 방식이다.

 8남매를 키워낸 순몰할머니(76)는 큰아들 내외와 손자들고 함께 살고 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혼자서 임종하고 수족을 반듯이 펴 드렸다는 순몰할머니는 효도와 참음의 미덕을 강조했다. 특히 “여자는 남편에게 부모도 되고 아내도 되는 거야”라면서 대가족제 속에서 여자의 역할을 이야기했다. 옛할머니들의 말에 따르면 돌봄과 보살핌의 주체는 바로 한 집안의 여성(어머니, 아내, 며느리)이었다.

 이 마을에서 나고 지금까지 자란 최정용(55)씨는 “친목계나 우친계(상여계) 등 오래전에 만든 계조직과 쌀계가 있다”고 말했으나 품앗이도 예전같지 않아서 공동체 고유의 의미는 거의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최씨의 기억에 따르면, 6ㆍ25전까지는 마을의 동제나 농악대가 있었으나 60년대 이후 특별한 까닭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새사도교회 장로이기도 한 최씨는 조부모와 부모 모시기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그는 네 어른들의 죽음을 전통적인 장례의식에 따라 꼬박꼬박 치러냈다. 역시 토박이인 장순환(60)씨는 “효자는 천성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면서 자신이 효자 소리는 못들었지만 “아버님 살아 생전에 불편하지 않게 해드리려고 마음을 많이 썼다”고 돌이켰다. 장씨와 죽마고우인 허광욱(60)씨는 “우리가 떠나면 농촌을 지킬 사람들이 없는 걸 알면서도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흙냄새 맡지 말고 도시로 나가라고 말한다”고 했다. 흙냄새와 더불어 살아온 이들은 마을의 옛이야기를 하다가 농촌문제로 화제가 바뀌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병원과 환자의 관계는 사회문화적 관계

 연구팀이 이번 학술조사에서 ‘의미있다’고 추려낸 민속용어들은 ‘보살피다’ ‘모시다’ ‘심중을 헤아리다’ ‘마음을 건드리지 않도록 한다’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표정만 보고)알아서 한다’ ‘하늘같이 받든다’ ‘위해준다’ 등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는 말 이전의 ‘이심전심의 문화’여서 전통적 행위 속에도 돌봄과 보살핌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가령 ‘손을 꼬옥 잡아준다’ ‘같이 울어주고 같이 있어준다’ ‘마실을 다닌다’ 등과 더불어 품앗이나 장례에서도 농경사회의 공동체 문화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용어와 행위들에 대해서 강신표교수는 “우리 문화 전체가 돌봄의 문화이다. 대대로 우리의 돌봄과 보살핌은 상대의 기대와 합일하는 총체적 삶으로, 우리의 전통적 생활의 골격이었다”라고 1차적인 해석을 했다. 최영희학장은 “가놓는 기본적으로 주고 받고 갚는 전달체계”라고 말하면서 “서양의학에서의 간호는 의료와 같은 말이면서 동시에 육아나 양육의 의미로 넓게 사용된다”고 말했다. 간호는 단순히 질병의 회복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을 포괄하는 ‘총체적 돌봄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병원이 불친절하다”는 일반인들의 푸념은 이미 새삼스런 반응이 아니다. 특히 병원의 간호현실에 대한 불만은 구체적이다. 몸과 마음이 극도로 예민한 상태에 있는 환자나 환자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병원의 치료행위 자체가 ‘거대한 권위’로 보인다, 그러나 그 권위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의사나 간호사 개인의 기질이나 성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서양의 의료이론과 우리의 문호현실과의 간격이 환자와 병원을 서로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그 간격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강신표교수는 앞으로 보건소, 도시의 병원 현장에서 나타나는 “환자와 가족, 환자와 의료진, 환자와 방문객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역으로 다시 농촌현장을 찾는 등 비교ㆍ반복적인 연구를 계속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1년후쯤, 이번 연구가 결실을 맺어 간호현장과 아울러 간호교육에 도입이 된다면, 병원을 찾는, 병원을 나서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울 것이다. 강신표교수와 최영희학장은 이번 한국적 문화간호학에 대한 연구가 “한국간호학의 새로운 전환기를 앞당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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