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권위의 外□과 內□
  • 김동선 (편집부국장) ()
  • 승인 1991.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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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 정치학자 뒤베르제는 그의 불후의 명저 ≪정치학 입문≫에서 국가의 궁극적인 지주는 군대 경찰 형무소 사형집행인이라고 말하고, 이 ‘물리적 강제수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물리적 강제수단은 실제로 일반 이익과 공통의 복지를 위해서 여하히 사용되는가에 따라 그 의의가 달라진다. 권력은 폭력을 이용하여 보다 큰 폭력을 저지한다. 이 합법적 폭력은 사설 폭력을 억제하는 수단의 일종이지만 반드시 이론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상식적인 애기지만 군대 경찰 형무소 사형집행인 등의 물리적 강제수단이 지배자에 예속되어 있다면 두말 할 나위 없이 독재라는 이름의 정치적 후진국가이고, 경찰과 형무소 사이에 존재하는 법원이 엄격한 3권분립에 의해 독립성을 유지하며 ‘법앞의 평등’이 실현된 사회라면 선진 민주국가라 할 수 있겠다.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사건 첫 공판에서의 유족과 민가협회원들의 소란행위가 법조게는 물론이고 여론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것은 그것이 민주주의 파괴행위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장은 유례없이 ‘법정난동사건에 즈음한 담화문’을 발표, “법정의 권위를 유린했다”는 강경한 표현으로 소란행위를 비난했고, 대한변호사회도 “관련자를 강력히 처단해달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런 여론 때문인지 과거 시국사건 재판에서의 법정 소란행위와는 달리 이번 사건 관련자들은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특혜비리사건으로 ‘특혜 재판’받고 특혜로 재기하나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사건 다음날 수서비리사건 선고재판이 열려 □□□ 회장이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보도에 따르면 시중 자금난에도 불구하고 한보는 이미 은행들로부터 1백67억원을 대출받았고 이달중 법정관리로 넘어가 정태수 회장은 재기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특혜비리사건으로 법의 심판을 받은 기업주가 재판에서 풀려나 다시 특혜로 재기하는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한보의 비리사건 재판에 어떤 외압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재판 결과에 승복할 수 없는 기분이어서 우리 사법부의 위상은 어떠한 모양인지 새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법관은 원래 판결로만 말한다지만, 현직 법관들이 이 불문율을 깨고 법원의 위상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꼭 20년 전인 71년 7월28일 서울지검 공안부가 출장체재비수뢰 혐의로 서울지법 형사부의 이범렬 최공웅 두 판사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법부 파동 때 법관들은 권력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을 다 쏟아냈다. 당시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였던 □□□씨(뒤에 대법원장 역임)는 “사법부 부패가 1이라면 입법부는 50이고 행정부는 1백이다. 1백의 부패가 1의 부패를 규탄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발언을 했고, “이것은 公知의 사실이기에 입증이 필요없다”는 말까지 했다.

 이 발언보다 더 주목할 얘기도 문건으로 나왔다. 서울형사 · 민사지법 판사 일동과 양 지법 수석부장판사 명의로 나온 ‘사법권수호 건의문’에는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은 영장발부에서 판결까지 검찰이 공공연한 압력을 가하고 있고, 행정부에서 관심 갖는 사건도 담당 판사에게 검찰이 재판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처사를 하고 있으며, 법관을 미행하거나 가정조사 예금통장조사 방법 등으로 은밀히 재판부에 압력을 가한다는 등 7개항의 외압 유형을 적시하고 있다. 법관 스스로에 의한 사법권 수호 투쟁 성격이었던 이 사법부 파동은 박정희 대통령이 법무장관에게 재판관의 기소를 백지화하라고 지시한 뒤에도 한달여 동안 계속 되다가 8월27일 사표를 냈던 법관들이 ‘급변하는 내외 정세’를 이유로 사의를 철회, 법원에 복귀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사법부는 자율권 확보 위한 치열한 운동 없었다
 그러나 파동이 진정되었다 해서 사법권 독립이라는 명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해 12월의 국가비상사태 선언, 다음해 10월의 유신선포, 그리고 10 · 26 이후 암흑의 80년대까지 겹쳐 사법권은 더욱 위축되었던 것이다. 이 독재치하에서 사법부에 대한 외압이 더 공공연하게, 그리고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졌다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현재도 외압이 존재할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6 · 29 이후 사법부가 환골탈태의 노력을 했느냐’라는 물음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학 · 언론계 · 노동계 등의 치열한 자율권 확보 노력에 버금가는 운동이 사법부에서는 없었다는 것은 외압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한보 정태수 회장을 집행유예로 석방한 것은 전후 사정으로 보아 ‘특혜 재판’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가는 것이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법원의 권위는 법정소란보다 더 크게 손상된 것이다.

 법정소란으로 법원의 권위가 유린된 것은 外□과 같은 것이어서 법의 응징으로 치유될 수 있지만, 외압의 의한 손상은 內□과 같은 것이어서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치유가 어렵다. 이에 덧붙여 한마디 더한다면, 사법권 독립의 관한 한 그것이 內□ 없이 굳건하다면 外 □ 재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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