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공포24시 “남성이 두렵다”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1.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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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강간 25만건 추산…60?70%는 아는 사람 짓 직장 내 폭력 으뜸…어린 시절 추행 경험 여성 6.5%

 러시아워에 지하철이나 전철을 타는 여성들은 대부분 팔로는 앞가슴을 가리고 가방으로는 앞을 가린다. 단순히 여성의 방어본능 때문이 아니라 붐비는 틈을 타 달라붙는 치한의 손길을 막기 위해서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에 대한 공포가 여성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여성들은 택시를 타더라도 운전기사 인상을 보고 타고, 늦은 밤에 한적한 거리를 혼자 걷거나 여자들끼리 여행이나 등산가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심약한 여성은 대낮에도 길가에 봉고차가 서 있으면 피해간다고 한다.

 가슴을 졸이기는 딸 둔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입시준비를 하느라 늦도록 공부하는 딸을 마중나온 부모들이 매일밤 학교 정문앞에 장사진을 이루는 것도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다큰 성인이라도 딸의 귀가가 늦으면 안 좋은 생각부터 들어 안절부절하게 되는 게 요즘 부모들의 심경이다. 어떤 이는 “해방 직후 외군들이 들어와 아무 여자나 겁탈할 때의 딸가진 부모 심정이 꼭 요즘 같았을 것”이라고 개탄하기도 한다.

 여성들이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10대의 윤간, 떼강도의 부녀자 강간, 인신매매 등 끔찍한 사건이 거의 매일 일간지 사회면을 장식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현실생활에서 너무나 자주 정신이 멀쩡한 남자들로부터 성폭행 위협을 받는 탓이기도 한다. 최근 자신이 가르친 제자를 4년여 동안 상습폭행해 구속된 대학강사나 국민학교 5학년 여학생을 2차례 추행해 수갑을 찬 구의원도 겉으로 보기엔 사회적 위치가 버젓한 정상인들이다.

 형사정책연구원에서 89년 9월 주부, 여대생, 생산직·사무직 여성 등 2천2백9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76.4%가 가벼운 추행, 74.5%가 성기노출, 46.3%가 강간미수, 7.7%가 강간, 6.5%가 어린 시절 성추생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얼마나 성폭행에 시달리고 있는지 잘 말해주는 수치이다.

강간 신고율 2.2%에 불과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강간의 경우 신고율이 2.2%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88년 한해 동안 경찰에 신고된 강간건수가 5천여건에 달하는데 이 조사대로라면 우리나라의 실제 1년 강간 발생건수는 무려 25만건이 넘으며, 그 중에서 24만5천건은 유야무야되고 있다는 얘기다. 또 젊은 여성일수록 성폭행을 경험한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성폭행은 으슥한 장소에서 낯선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으로 인식돼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폭행의 60?70%는 피해자를 잘 아는 사람의 소행이다. 요즘 들어서는 특히 직장 내에서 상사나 동료에 의한 성폭행이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근친에 의한 강간사례도 무시못할 숫자라는 것이다.

 여성의전화와 지난 2월 문을 연 성폭력상담소가 올 상반기 동안 상담한 사례를 살펴보면 이같은 우리나라 성폭력 실태를 알수있다(19쪽 표 참조).

 성폭력상당소의 집계에 따르면 총 강간상담건수 1백41건 중 약 74%인 1백44건이 피해자가 ‘아는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가해자의 유형을 보면 직장 상사나 동료가 36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웃(23명) 선배·친구(14명) 근친(13명) 순이었다.

 여성의전화 경우도 양상은 비슷하다. 올 상반기 강간상담건수 70건 중 61%가 직장 상사, 선배나 친구, 근친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력 상담원들은 사장이 전권을 휘두르는 영세기업에서뿐만 아니라 어디라고 하면 금방 알 수 있는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도 성폭력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개탄한다. 직장 내에서의 성폭력사례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어떻게 유린돼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여성인 ㄱ씨는 회식자리에서 남자사원들이 강권하는 술을 받아마시고 인사불성이 돼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관이었고 옆에는 집이 같은 방향인 총각사원 ㅁ씨가 잠들어 있었다. 자신의 실수도 있었기 때문에 문제삼지 않고 넘어갔으나 이번에는 그 일을 빌미삼아 또다른 촉각사원 ㅂ씨가 동침하기를 요구해왔다. ㅁ씨에게 얘기를 다 들었으니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요구에 응하라는 것이었다. ㄱ씨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13세 이하 어린이 추행 급증
 ㅎ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직원이 3명인 작은 회사에 취직해 1년간 열심히 일했다. 어느날 사장이 갑자기 불러 “집안 형편이 어떠냐” “월급을 올려주겠다”면서 저녁이나 먹자고 했다. ㅎ씨는 사장이 억지로 권하는 술을 마시고 나서 그날밤 강간을 당한 뒤 2차례나 임신중절수술을 해야 했다.

 ㅎ씨의 경우는 여사원이 직장 상사에게 유린당하는 전형적이 예다. 그런데 이같은 경우에 해결에 나서는 것은 대부분 가해자 자신이 아니라 그 부인이라고 한다. 같은 피해자인 부인이 강간당한 여성을 모욕하고 피해배상액을 깎는 악역을 맡게 되는 것이다. 상담원들은 이같은 현상을 기업에서 노사문제가 노노문제로 변질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한다.

 여성의전화 신윤옥씨는 “직장에서 일을 당하는 여성은 이른바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이다. 여성들의 의식적으로라도 직업의식을 투철하게 가질 필요가 있다. 남성들에게 시집가기 위해 잠깐 머무르는 사람이 아닌 대등한 동료로서 인식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신씨는 또 직장여성들에게 소그룹 모임을 갖고 여성문제와 성문제에 대해서 공부하고 활발한 토론을 벌일 것을 권한다. 소그룹 모임을 통해 여성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갖고 사내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공개적으로 거론해 남성들의 의식을 바꿔놔야 한다는 것이다.

 신고가 거의 안돼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근친에 의한 성폭력도 심각하다. 근친강간 피해자들은 대부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상처를 받아 심신이 황폐해지게 마련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친오빠와 페팅을 한 뒤 내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27세 미혼녀, 19세 때부터 이모부에게 계속 폭행당하고 있는 25세의 여성, 의붓아버지와 같이 살다시피하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등 딱한 사연이 많다고 한다. 여성의전화의 한 상담원은 그런 경우 자신도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를 때다 많다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미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때조차 있따”고 얘기했다.

 소아강간도 급증하는 추세다. 성폭력상담소의 강간상담 1백41건 중 13세이하의 어린이에 대한 강간상담도 18건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관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발생한 소아강간의 경우, 부모의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자녀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말고 “머리나 허리를 다쳤을 때처럼” 담담하게 대할 것을 상담원들은 당부한다. 또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가 강간을 당한 후에 “끔찍해서” 상처부위는 살펴보지도 못한 채 질세척제까지 동원하여 “몸 씻기에 바쁘다”면서 강간사건은 사람이 안 보는 데서 발생한 만큼 ‘증거보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얘기한다.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이 급증하는 까닭은 여성의 치마 길이가 짧아져서가 아니라 성폭력에 대한 사회의 그릇된 통념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여성은 은밀히 강간을 원하고 있다” “품행이 단정하면 강간당하지 않는다”는 세계 공통적인 남성들의 편견 외에도 “정절을 잃은 여자는 생명을 잃은 것과 같다”는 한국적인 편견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여성은 강간당해도 한사코 입을 다물게 되고 남성들은 이 점을 이용해 여성을 마음놓고 유린하게 되는 것이다.

강간범과 결혼한 여성 대부분 구타당해
 정절이데올로기 때문에 강간범과 결혼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정절을 바친 남자와 결혼을 해야만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자’라는 비난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사정책연구원의 89년 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기혼여성 1천2백여명 중 11명이 강간을 당해 할 수 없이 결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결혼하기 위해서 강간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형사정책연구원 최인섭씨의 조사에 따르면 구속돼 형을 살고 있는 조사대상 강간범 1백89명 중 3명이 결혼하기 위해 강간했다고 밝혔다. 실형을 살고 있는 경우가 3명인 만큼 실제적으로는 훨씬 많은 숫자일 것으로 짐작된다.

 강간당하여 결혼한 여성들이 대부분 구타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여성의전화에 따르면 남편의 구타를 호소하는 주부 중 90%가 강간범과 결혼한 경우라고 한다. 남편들은 “그때 끝까지 반항했어야 한다” “몸을 함부로 굴렸다”며 매질을 해댄다는 것이다. 강간당해 임신한 뒤 할 수 없이 결혼한 30대 주부는 남편이 구타를 한 뒤에는 반드시 성관계를 요구해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거절하면 또다시 매질이 시작돼 거절도 못하고 시체처럼 누워있는 자신이 너무도 치욕스럽고 매번 강간당하는 기분이 들어 견딜 수 없다고 한다.

 강간은 강도 등 다른 범죄를 숨기기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지난해 검거된 상도 상습범 박현룡은 피해자들의 입을 막기 위해 국민학생 임신부 등 22명을 간강한 것으로 밝혀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성폭력은 경찰이나 회사측에 의해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 부천서의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이나 85년 백양메리야스에서 구사대가 저지른 여성노동자에 대한 성추행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지만 유신 때나 5공 때는 여성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자사에 붙잡아놓으려고 회사측에서 불량배를 동원 폭행하기도 했다. 또 시위하는 여성 노동자를 해산시키기 위해 구사대가 팬티만 입고 농성장에 돌입해 성추행을 가하는 일도 많았다.

 용기를 내어 강간사실을 경찰에 신고한 피해자는 사법처리 과정에서 재차 강간당하는 기분을 느끼기 일수라고 한다. 경찰은 신문과정에서 꼬치꼬치 캐물으며 피해자의 얘기를 듣는 것 자체를 즐긴다는 것이다. 검찰의 기소율도 낮아서 10년 평균 강간기소율은 39.2%에 불과하다.

 요행이 기소가 돼 법원에 가면 피해자는 다시 고통스런 경험을 반복해야 한다. 가해자측 변호인으로부터 평소의 성생활, 음주 및 흡연 여부 등 사건과 관련없는 질문을 받으면 ‘여자로서의 정숙함’을 삼핀받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또 강간 당시 가해자의 성기가 몸 속에 들어도는 것을 느꼈는지, 고통 외에 다른 느낌은 없었는지 등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야 한다. 그런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실형서고율은 33%에 불과하다.

 즉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강간 중 2.2%만 신고되며 그중에서 39.2%만이 기소되고 그중에서도 33%만이 실형을 선고받는 것이다.

 심영희 교수(한양대·사회학)는 “지난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이 강화되고 올해 피해자의 신고 없이도 처벌할 수 있는 특수강간죄가 신설됐으나 성범죄가 얼마나 수그러들지 의문이다. 여자를 물건으로 보는 사회불평등 구조가 개선되지 않으면 근본적인 치유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다.

매춘의 합법화가 성폭력 부채질
 밖에서는 외도를 즐기면서 자신의 자식이나 아내는 죽어도 정절을 지키기를 바라는 남성들의 이중적 사고방식이 고쳐지지 않는 한 여성에 대한 성폭행은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얘기이다.

 강간에 대한 대표적인 사회적 통념의 하나는 “강간이 충동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 거기서 파생한 통념이 “매춘이 당신의 처자를 강간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여러 학자들이 조사한 통계자료는 이런한 통념이 편견임을 입증하고 있다. 강간은 충동적 사건이 아니라 많은 경우 계획적인 범죄이며 특히 윤간은 90%가 사전에 모의된다는 것이다.

 또 이전에 매춘을 허용했던 도시에서 매춘을 금지시키고 난 후 강간사건이 감소했다는 조사보고도 나왔다. 결국 매춘의 합법화는 여성을 성의 대상물로 보는 경향을 부추겨 강간을 부채질한다고 볼 수 있다.

 강간은 성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정치적·사회적 사건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많은 경우의 강간이 권력욕구와 사회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다. 사회 지배계층에 대한 불만과 선망이 사회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 성폭력의 원인을 빈부격차와 박정희 정권에서 유래한 사회지도층의 성적 문란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남성문화’를 깨끗이 하고 사회민주화를 이루어야만 우리 사회는 성폭력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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