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
  • 박권상 주필 ()
  • 승인 1990.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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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3월 프랑스 정치에 전대미문의 이변이 일어났다. 左右가 합작하는 이른바 꼬아비따숑 政權이 들어선 것이다. 풀이하여 同居한다는, 또는 同棲한다는, 더불어 함께 산다는 뜻이다. 좌파 출신인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인데 이데올로기가 판이한 우파의 자크 시라크 총리, 그리고 그가 이끄는 우파 연립정권이 태어난 것이다. 헌법상 각료회의의 의장은 대통령이므로 비록 우파정권이지만 일주일에 한번 열리는 국무회의는 미테랑 주재하에 목요일마다 엘리제宮에서 열렸다.

 왜 이런 이변이 생겼을까. 미테랑이 7년 임기의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 1981년의 일, 아직 2년 임기가 남아 있었고 5년마다 갈리는 國民議會는 86년 3월 총선거에서 우파승리로 나타난 것이다. 즉 5백77석의 국민의회에서 미테랑의 사회당은 2백6석밖에 얻지 못하였고, 36석의 공산당을 끌여들여도 과반수에 태부족이었다. 반면 우파는 드골派인 시라크의 공화국연맹(RPR)이 1백49석이었고, 중도우파인 프랑스민주연합(UDF)이 1백27석이었다. 두파를 합쳐도 과반수에는 미달하였으므로 다시 우파계의 무소속 14석을 끌어들여 2백90석으로 간신히 우파 연립정권이 구성된 것이다. 프랑스는 우리 헌법과는 달리 총리를 임명하는 데 국회의 사전동의를 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회가 과반수로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와 비슷하다. 반면에 대통령에겐 국회해산권이 있다.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과 국민의회의 과반수가 같은 정당에 속해 있으면 별탈이 있을 수 없다. 당연히 대통령 중심제의 정부가 수립되고 운영된다. 그러나 與小野大의 이변이 생겼을 때 여야가 합작할 수밖에 없는, 합작하지 않으면 정부 성립조차 어려운 그러한 고충이 뒤따른다. 86년 3월 총선거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꼬아비따숑 정치는 정치 불안정 극복의 타산지석

 이때 미테랑은 소수파인 사회당 출신을 총리에 임명하지 않고 아예 제1야당의 자크 시라크에게 조각을 위촉하였고 시라크는 UDF와 무소속을 규합하여 보수연합 정권을 발족시켰다. 37명의 각료직은 RPR이 18석, UDF가 16석, 그리고 무소속이 3석이었다.

 그런데 지스카르 데스탱 전대통령이 이끈 UDF는 단순한 일개정파가 아니라 다시 자유주의적인 공화당과 기독교사회민주주의적인 사회민주당과 비기독교 우파인 급진사회당 및 기타 유력인사들의 연합체였다. 따라서 중도우파 세력이 연립한 것이고, 이 연합체가 다시 우파 RPR과 연립하고, 거기에다가 소수의 무소속 출신과 손을 잡아 우파 연립정권이 성립하였으며 이 우파정부와 다시 좌파대통령이 합작하여 나라살림을 맡았다. 이렇듯 어지럽도록 복잡한 이중삼중의 연립이었으나 별로 삐걱거리는 소리없이 1988년 대통령선거 때까지 꼬아비따숑 정치는 성공적으로 지속되었다. 미테랑이 대통령에 再選되자 곧 국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민의에 따라 사회당 주도의 정부로 돌아갔다.

 꼬아비따숑 정치는 여소야대 빚어내는 정치적 불안정을 슬기롭게 해결한 他山之石이요, 프랑스 사람들의 능란한 정치솜씨의 과시라고 말할 수 있다. 四分五裂 당파싸움이 많기로 이름난 프랑스인들인데, 그러나 정파마다 개성과 특색을 버리지 않고 그들을 뽑아준 국민의 의사를 제멋대로 깔아 뭉개지 않는 가운데 국민이 원하는 정치안정을 이룩한 희한한 성공사례에 속한다.

 나는 2년전 여소야대 국회가 생겼을 때, 기회있을 때마다 꼬아비따숑 모델을 권고하였다. 세계관과 이데올로기가 다른 左右가 동거하는 마당에 엇비슷한 빛깔의 정당끼리, 가령 민정 · 공화 양당의 연립이 왜 불가능하단 말인가. 정책 프로그램을 조절하고 권력분담을 협상하여 擧國一致 내각도 족히 시도할 수 있었겠고, 쉽지는 않았겠지만 만일 거국일치 내각이 출연할 수 있었던들 여야가 과거를 깨끗이 잊고 앞날을 내다보는 새로운 설계로 민족화합에 역사적인 계기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국민이 뽑아준 정치적 색깔과 구도는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한 채로.

야권. 연합전선 구축이 보다 수월하고 능률적

 민정 · 민주 · 공화 3당의 졸속하고 인위적이고 下向的인 합당은 당원과 선거민의 의사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또한 정당의 본질 · 생리 · 一體性을 망각한 억지춘향의 성격이 강하다. 그만큼 부작용이 큰 것도 당연하고 이 나라 정당정치의 건전한 발전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3당합당에 자극받아 야권통합의 목소리가 높게 들려온다. 그런 주장의 선의는 이해하지만 신경질적 반응은 금물이다. 야권만은 신여당의 졸속통합의 愚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마다 정책 · 체질 · 일체성을 살리면서 공통분모를 찾아 우선 UDF같은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보다 수월하고 훨씬 능률적이 아닐까. 과거 야당의 소모적이고 쓰라린 당내투쟁이 얼마나 비생산적이었던가를 회상하여야 하겠다. 對與투쟁보다 당내 파벌싸움에 대부분의 시간과 돈과 힘을 쏟아야 했던 민주당의 신구파싸움이라든가 신민당의 양 김씨 다툼이 얼마나 집권여당을 유리하게 만들었던가를 냉철하게, 그리고 다각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 통일민주당에서 신여당 참여를 거부하는 인사들이 새 야당창당을 추진하고 있으므로 평민당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신야당에 적극 참여하고 두 야당끼리 有機的인 연합체를 구성, 상설기구로 발전시키는 것이 압도적인 신여당에 대응하는 합리적인 방법이겠고, 시기와 조건이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야권통합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급하면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이말은 개인생활에도 해당하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강조하고 싶다. 좀더 차분하고 신중한 발걸음이 국민의 신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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