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장벽은 누가 뚫었느냐”
  • 박중희 기자 ()
  • 승인 1990.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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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그게 평양의 <로동신문>이 서울의 KBS나 MBC의 방송 프로그램 내용을 매일 소개하고 있는 격이다. 또는 거꾸로, 서울의 <동아일보>쯤을 펼쳐보니 거기에  ‘조선중앙방송’ 프로그램이 매일 실려 있더라는 애기쯤이 된다.

 <노이에스 도이취란트>는 지금도 동독공산당의 기관지다. 그런데 “그걸 보니까 글쎄, 서독 텔레비전 프로그램 내용이 대단히 자세히 소개되어 있더라”고 런던의 어느 주요 신문  특파원이 쓴 기사가 보인다. 독일사람들이 자기네를 남보다 뛰어난 민족이라고 여기게 되긴  됐다.

 형편이 이쯤이면 설사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지 않았다하더라도 그게 있으나마나하게 되었을  법하다. 동독사람들이 서독 라디오나 텔레비전 시청을 마음대로 하고 산다는 것은 벌써부터  잘 알려져온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동독의 개방화 물결에 얼마나 크게 작용했을까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면서도 새삽스럽게 “역시!”하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베를린장벽을 뚫은 것은 누구였느냐?” 알 듯하면서도 다들 아리송해서인지, 지금도 이런 질문은 유럽 사랑방들에서 흔히 수수께끼 노름거리가 된다. 동독인민군 공병대, ‘피플파워’, 고르바초프, 호네커???. 이런 식으로 나가는 답들 가운데 빼놓기 어려운 게 하나 있다. 텔레비전 전파라는 것이다. 전파란 벽돌담으로 막아지지 않는다. 또 사람들은 ‘寫眞 ’이면 문자 그대로 진실된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그래서 그 힘은 세다. 그런 힘이 베를린의 벽을 뚫는 데 한몫했다고 보는 것은 전혀 어림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앞에서 “역시 독일사람들은”이란 말을 했지만 그러나 우리라고 독일사람들만 못해서 그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기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실상 얼마 전, 평민당의 金大中총재가 남북간에 서로의 텔레비전을 볼 수 있도록 하자고 제의했다는 게 서울에서 오는  신문에 실린 게 보여 “아하, 우리 정계에서도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거로구나”했었다. 그리고 그런 제의가 불러일으킬 논의들이 필경 활기띤 것이려니 하는 기대 또한 없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같이 신문들을 샅샅이 읽기도 했다.

 그런데 웬걸! 어디 한군데, 누구 하나 이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한마디 대꾸라도 하거나  관심이라도 돌린 흔적이란 없었다. 그렇다고 달리 엄청나게 큰 문제가 있어 그것을 둘러싼 화려한 논쟁이 벌어지고 사람들의 정신이 그곳에 쏠려 있었을 법한 일이 별달리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 많은 정치기사면에 그대신 무슨 얘기가 제일 많이 실렸는가를 굳이 여기에 다시 쓸 건 없다.

 “과연 독일인들은”하는 거야 좋다. 그러나 약간 고약한 건 그게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열등감 같은 것을 가져다주기도 한다는 것이고 더 고약한 것은 사실상 우리가 그런 열등감을 갖거나 열등할 까닭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만히 따져보면 독일사람들이라고 우리보다 그리 월등할 건 없다. 억센 맛 하날 따져도 우리쪽이 위다. 우리 역사에 그들보다 열등한 게 있다면 그건 딴사람들이지 우리 백성들은 아니다. 적어도 그렇게 우기고  싶어진다.

◆즐거움을 더불어 나누는 곳이라고 해서 ‘클럽’을 俱樂部, 입에 닿는 맛이 좋다고 해 ‘코카콜라’를 可口可樂 하는 식으로 영어를 제나라 글자로 고쳐놓은 데서 보이는 중국사람들의 솜씨가 재치있고 재미있다.

 요새 세계 어디서나 흔히 쓰게 된FAX(팩시밀리의 약어)의 경우도 그렇다. 며칠전 홍콩에서 온 중국친구가 주는 명함을 받아보니까 거기에 중국문자로 적힌 팩스란 말이 아주 그럴 듯하다. ‘圖文傳眞’, ‘그림과 글이 진짜 있는 그대로 전해진다’는 것이나 정말 얼마나 근사한 말이냐.

 여기다가 그것을 ‘진짜 있는 그대로’운운 한 건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서였다. 사실, 생각해볼수록 이 팩스라는 게 세계의 ‘검열관’들에겐 무슨 神의 재앙같은 것일 게 틀림없다. 전파라서 문자들이 목적지에 그대로 직행을 해 그게 ‘진짜 그대로’가 아니기 어렵게 됐다. 그래서 예전에 흔히 그랬던 것처럼 가위질하고, 먹칠하고, 깔아뭉개고 하는 거드름을  피우기도, 훼방을 놓기도 이제 쉽지 않아졌다. 그것은 말하자면 칼에 대한 글의 적지않은, 그리고 즐거운 개가다.

 그래선가. 여기 어느 잡지에 ‘중국의 민주화를 돕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단체가 이를테면 ‘圖文傳眞’의 운동을 벌이자고 광고를 낸 게 보인다. 팩스를 통해 중국사람들에게 바깥 세상소식을 있는 그대로 전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팩스 번호들도 앞으로 계속 광고를 해주겠다고 적혀 있다. 운동도 여러가지로 발달해가고 있는 세월인가 보다.

 하여간, 내겐 중국말은 좀 어렵고 혹시 누가 평양같은 데의 팩스번호들을 가진 게 있으면  그거라도 좀 보내달라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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