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시대 카운트 다운
  • 제네바 · 남유철 기자 ()
  • 승인 1994.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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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역의 심장부 가트 사무국 현장 취재

 ‘국제 협상의 도시’라고 불리는 제네바는 대부분이 프랑스에 둘러싸여 있는, 스위스에서는 다소 돌출된 지역이다. 이 도시의 쿠앵트랭 국제공항도 사실은 부지의 절반이 프랑스 영토이다. 시내에서 버스로 10분이면 국경에 도달하는 작은 도시이다. 잠시 길을 잃고 헤매다 보면 어느새 프랑스에 들어가 있다는 여행객들의 우스갯소리가 실감이 난다. 이 고급 도시의 물가는 유럽에서도 악명이 높다. 엔화로 무장한 일본 관광객조차 혀를 내두른다. 한 관광 안내서는 ‘일반 관광객에게 제네바는 부담스런 도시’라며 점잖게 경고한다.

 높은 물가와 지리적으로 프랑스에 가깝다는 사정 때문인지 가트(GATT ·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사무국 직원들 중에는 프랑스에 거주하며 제네바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네덜란드 국적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출생인 아넷 블랑크 전문위원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죽은 듯이 조용한 제네바보다는 프랑스가 살기에 좋다고 한다. 영어를 비롯해 5개 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블랑크 위원은 라오스와 벨기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 ‘다국적 배경’을 가진 국제화한 가트 직원의 한 전형이다.

 매일 국경을 넘나들며 출퇴근하는 가트 직원들에게 ‘자유무역’이라는 가트의 이상은 자신들의 생활과 밀접한, 생활의 편의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다. 불과 10분도 안되는 거리를 두고 (세계의 다른 지역처럼) 수입 관세와 각종 규제를 감당해야 한다면, 스위스와 프랑스를 매일 오가는 이들에겐 이만저만한 불편이 아닐 수 없다. “유럽에서 살다 보면 국경이 별 다을 의미가 없다”라고 블랑크 귀원은 말한다. 자기는 네덜란드가 아닌 유럽연합 시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스위스 국민들은 노동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유럽연합 가입을 거부했다. 우루과이 라운드도 노동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까지는 다루지 못했다. 서비스 협상에서 전문직 종사자들의 취업에 대한 규제 문제를 다루었을 뿐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상품’으로 불리는 서비스 부문을 처음 다루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서비스 교역은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의 세계 경제 질서가 어디로 움직여 갈 것인지를 예고한다.

UR의 최대 성과는 서비스 개방
 서비스 교역을 다룬 라운드(다자간 무역협상)는 가트가 여덟 번 열었던 라운드 중 우루과이 라운드가 처음이다. 가트 경제학자들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의 가장 중요한 성과가 세계 총생산의 60%를 차지하는 서비스 교역을 다룬 데 있다고 강조한다. 이는 선진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관심을 끌었다. 가트의 추산에 의하면, 교역 대상이 되는 서비스 시장의 규모만도 한 해 3조달러에 달한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되자 가트는 ‘서비스 교역을 다룬 것이 우루과이 라운드의 가장 큰 성과’라는 보도 자료를 냈다.

 그러나 한국에서 서비스 협상은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다. ‘UR = 개방 = 피해’라는 등식을 가진 시각으로 보면, 서비스 시장의 개방폭은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에 크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하트리지 서비스협상 담당 국장은 개방 폭이 크지않다고 해도 “서비스 시장의 확대 개방은 한국과 같은 선발 개도국에겐 엄청난 서비스 수출 기회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한국은 89년 세계 15위 서비스 수출국이었다. 수입은 세계 18위로, 교역 규모로 세계 20대 서비스 교역국에 들어섰다. 이런 객관적인 통계 숫자를 보고 한국 경제를 분석하는 가트 전문가들에게, 우루과이 라운드를 기회가 아니라 피해라는 시각을 가지고 접근한 한국내 사정을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지나치게 방어적인 측면에서 피해의식을 갖고 우루과이 라운드를 바라본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보고서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우루과이 라운드의 ‘영향’을 개방과 그로 인한 피해, 수출과 수입이 얼마나 늘고 주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반대로 우루과이 라운드로 우리의 수출이 늘어난다는 식으로만 국민을 계도한 것도 협상을 무역수지 차원에서만 이해했기 때문에 빚어진 잘못이다.

 리처드 블랙허스트 경제분석국장은 “가트의 이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 무역이라기 보다 교역에 관한 투명한 법칙을 확립해 궁극적으로 경제 복지를 높이는 데 있다”라고 말한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단순한 수출입 증가가 아닌 교역 조건의 투명성 확보로 높아질 경제 전반의 효율성을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트가 공식으로 발표한 우루과이 라운드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2005년까지 세계 소득이 매년 2천3백50억달러씩 증가)은 이런 개념을 기초로 계산된 것이다. 그는 “물론 이를 정확한 숫자로 표현하는 데는 기술적인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지역주의’가 가장 큰 도전
 세계무역기구(WTO)로 대변되는 이른바 ‘포스트 UR' 시대의 도전은 우루과이 라운드가 다루지 못한 영역에서 나타날 전망이다. 그 대표적이 문제가 지역주의와 다자주의의 불투명한 관계이다.

 가트 협정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가트1조에 나타나 있는 최혜국(MFN) 대우이다. 회원국은 상호 교역에서 최고의 조건을 모두에게 동등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가트 협정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의무 조항이고 약속이다. 유럽연합(EU)과 같은 관세동맹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같은 자유무역협정은 엄격한 의미에서 이 최혜국 대우 조항에 위반된다. 가트 회원국에게 부여하는 대우보다 자유무역지대나 경제동맹에 속한 국가에게 실질적으로 더 좋은 대우를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 지역주의 문제는 전혀 거론하지 않고 넘어갔다. 다자주의와 병행해 지역주의를 이끌고 있는 당사자가 바로 미국과 유럽연합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가트가 추구하는 ‘다자주의’와 ‘지역주의’는 줄곧 긴장관계를 가져왔다. 하지만 가트는 출발부터 지역주의가 발행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한 정치적인 국제 협상의 산물이다. 가트 24조는 자유무역협정이나 관세동맹이 역외 회원국을 그 이전보다 더 불리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 지역주의를 가트에 합치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유럽 통합과 북미자유무역지대 창설로 가속화한 지역주의는 계속 강화되는 추세이다. 현재 지역간 경제협정은 85개에 달하며, 그 중 28개가 92년도 이후에 생겨났다. 미국이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창설할 때, 일본 정부는 가트 협정을 위반한 요소가 있는지 따져보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적이 있다. 하지만 지역협정이 가트에서 ‘위반’판정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다 협정 체약국 전원의 합의가 있어야 사소한 결정이라도 내릴 수 있는 ‘가트 1947’ 체제에서 불공정이라는 판정은 기대하기 어렵다(47년 제정된 가트 협정은 ‘가트1947’,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으로 생겨난 협정은 ‘가트 1994’라고 불린다). 쌀시장을 개방하고 대신 미국과 유럽에 지역주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압력’을 넣으라고 한 국내 전문가의 주장은, 지역주의가 한국에 가장 큰 도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가트의 아서 던켈 전임 사무총장과 피터 서덜랜드 현 사무총장은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은 가트가 보장하는 다자주의의 최대 수혜국’이라고 강조했다. 그 말에는, 다자주의가 막고 있는 지역주의가 발호하게 되면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기도 하다.

 제네바에서 활동하는 한 통상 전문 변호사는 “법리적으로 지역주의와 다자주의는 분명히 모순된다. 다만 가트의 다자주의는 힘의 현실을 인정한 논리 위에서 다자주의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자간 질서 그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는 “세계무역기구의 분쟁해결 조항은 가트 체제에 비해 상당히 엄격하다. 이는 선진국과 개도국이 모두 강화된 분쟁해결 기구가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계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이 어떻게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선진국과 개도국, 미국과 유럽연합간의 동상이몽에서 강력한 분쟁조정 권한을 가진 세계무역기구가 탄생하게 되었다. 세계무역기구의 분쟁해결 방식은 가트 체제와 큰 차이가 있다. 가트 체제에서는 회원국 간의 분쟁이 상호 합의로 해결되지 않으면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다. 심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것도 당사국이 합의해야만 가능하다. 설사 심사위원회가 구성돼 판정이 나오더라도 협정 체약국 전원이 이의가 없어야 집행된다. 분쟁 당사국 중 한 쪽은 늘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므로 결국 심사위원의 판정은 약간의 정치적 압력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면 세계무역기구는 분쟁해결 기구를 상설 기구로 두고 있다. 어느 나라에 의해서든 일단 분쟁이 제기되면 반드시 심사위원회가 구성된다. 심사위원회의 최종 판정에는 무조건 승복해야 한다. 끝내 승복하지 않을 경우 세계무역기구는 피해국에게 그에 상응하는 무역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미국이 세계무역기구 출범에도 불구하고 슈퍼301조를 유지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경우에 이 무역제재 조처를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WTO는 무역분쟁 ‘급행’해결
 캐나다 출신의 한 통상 변호사는 “일단 판정이 내려지고 나면 (승복하라는) 국제적 압력을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18개월을 못 넘도록 명시되어 있다. 개인간 송사도 몇 년씩 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계무역기구의 분쟁해결 절차는 엄청나게 빨리 진행되는 셈이다”라고 강조했다. 강화된 분쟁해결 방식 때문에 더 많은 분쟁이 접수될지, 서덜랜드 사무총장이 기대하는 것철검 사전에 협상과 조정을 통해 해결될지, 현재로서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세계무역기구는 4백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현재의 가트 사무국 수준에서 큰 변화가 없을 전망이다. 세계무역기구가 의회에서 거부당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미국행정부는 세계무역기구를 최소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예산이나 인력에서 현 가트 사무국 수준을 절대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의회에 거듭 확인하고 있다.

 현재 가트 사무국은 세계무역기구로 전환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직 재편이나 실무 차원 준비를 전혀 진행하지 않고 있다. 누스라트 나지어 대변인은 “준비위원회 모임이 몇 번 있었으나 아직 이렇다 할 변화는 없다”고 말한다. 미국 의회가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을 비준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구 설립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서덜랜드 총장은 미국 의회가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을 거부하는 경우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하지만 그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최근 들어 점차 높아지고 있다.

미 의회 비준 거부는 ‘최악의 사태’
 미국 하원 톰 폴리 의장은, 최근 미국 의회가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 비준을 놓고 “매우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이론적 가능성으로만 점쳐졌던 협정 부결 수위가 점차 높아져 가는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을 상반기에 비준 받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의회는 우루과이 라운드로 관세가 내력가고, 그로 인한 관세수입 감소가 재정적자로 나타난다는 점 때문에 심각한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우루과이 라운드로 인한 미국의 관세수입 감소액은 10년간 약 4백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 의회의 고민은 다분히 법률적이고 다소는 기술적인 문제이다. 지난 90년에 제정된 미국의 예산집행법은 세입 감소나 세출 증대를 수반하는 모든 법안은, 당해 회계 연도를 포함해 5년간 재정적자 증가를 유발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 연방 예산을 무조건 삭감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상원은 단 한 해라도 재정적자 증가를 유발하는 법안에 대해서는 단 한명의 의원이라도 의사진행 발언 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면 법안 심의 자체를 아예 못하도록 결의해 놓고 있다.

 이 두 규정으로부터 예외를 인정 받으려면 상원 재적 의원의 5분의 3(60명)과 하원 재적 의원의 과반수 이상으로부터 동의를 받아내야 된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미국 정치의 현실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예산을 삭감하는 쪽을 선택할 경우에도 어려움은 마찬가지이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어느 분야에서 어떻게 예산을 줄일 것인가에 합의하는 것은 미국 정치에서 가장 고되고 힘든 연중 행사이다.

 또 다른 비준 거부 가능성은, 세계무역기구협정이 미 의회의 고유 권한을 침해한다는 시비이다. 미국은 2차대전 직후 세계 경제를 떠받치는 세 축으로 세계은행(IBRD) · 국제통화기금(IMF) · 국제무역기구(ITO)를 구상했었다. 그러나 미국 의회는 국제무역기구가 통상에 관한 전권을 가지고 있는 의회의 권한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대할 의사를 명백히 했다. 당시 미국 행정부는 비준 거부가 확실해 보이자 이를 철회하고 대신 가트 사무국으로 하여금 협정이 필요로 하는 조직의 기능을 대신하도록 했다. 그래서 가트 사무국은 지금까지 국제법적으로 어중간한 보조 기구로 존재했던 것이다. 미국은 55년에 국제무역기구보다 훨씬 느슨한 기구인 무역협력기구(OTC)를 다시 제의했으나 역시 미국 의회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미국 상무부는 세계무역기구가 미국 의회의 고유 권한을 침해하게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의회는 행정부가 협상에 실패했다고 보는 분위기이다.

 블랙허스트 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극적으로 타결된 배경에는 위기의식이 작용했다. 협상 실패는 단순히 현재상황의 계속이 아니라 엄청난 악영향을 수반하는 퇴보를 의미한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은 끝났다. 그러나 세계무역기구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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