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깽, 90년 만에 ‘본토’ 상륙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4.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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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한인 이민사 처음 밝혀져…‘노예 이하의 삶’속에서 독립운동 지원

망국 식민지 해방 건국 전쟁 분단 산업화 중진국 세계화 통일…. 20세기를 숨차게 통과해오면서 이 문제들은 여기 ‘본국’ 내부에서 들끓었다. 본국은 정신이 없었다. 살아남아야 했고 앞만 보고 달려야 했으니, 금세기 초 모국을 떠나 세계로 흩어져 나간 동포들을 까마득히 잊은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본국, 본토인의 망각증은 컸다. 아무도 몰랐고, 누구도 알려 하지 않았다. 쿠바 한인 이민은 본국의 ‘기억상실증’ 중에서도 맨 밑바닥에 깔려 있었고, 다름 아닌 본국에서 먼저 지워졌다.

 저 쿠바 한인 이민사가 마침내 그 입을 열기 시작했다. 90년 만이다. 1905년 제물포항을 출발해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닻을 내리면서 시작된 ‘쿠바 이민사’에는, 노예 이하의 삶 속에서도 한국혼을 건설하는 한편으로 조국 독립을 애타게 갈망했음이 또렷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59년 사회주의 국가로 탈바꿈한 이래 쿠바는, 검은 콧수염의 카스트로, 미국 코 앞에 있는 반미국가, 북한의 동맹국, 사탕수수 정도의 단편적인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거기, 카리브 해의 한 섬에 한인의 발자취가 남아 있음을 아는 ‘본토인’은 거의 없었다. 중앙아시아 동포들의 삶이 공개되고 사할린 억류 동포들의 실상이 알려지는 동안에도 쿠바 한인들은 우리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쿠바 이민사를 우리 앞에 생생하게 되살린 사람은 독립 프로덕션 ‘인디컴’의 수석 연출가이자 대표인 김태영씨(36)다. <베트남 그 후 17년>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는 그는 50일 간의 쿠바 현지 취재를 마치고 지난 3월31일 돌아와 최근 3부작 다큐멘터리 <카리브해의 고도 쿠바>를 완성했다. 이 프로그램은 6월7~9일까지 3일간 방송될 예정인데, 그의 취재 활동을 통해 빛 바랜 흑백 사진들과 낡은 팜플렛 속에 잠자던 쿠바 한인 이민사가 드디어 깨어나게 됐다.

속은 줄 모르고 고향 떠난 ‘애니깽’들
 쿠바 이민사는 최초의 이민이었던 1902년의 하와이 이민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인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진출은 19세기 중반 미국의 아시아 진출 전략과 하와이 개발 사업이 맞물리면서 이루어졌다. 1882년 한국과 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한 미국은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려고 미국에 기대려는 고종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다. 마침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조선인 노동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와이에 이미 들어와 있는 중국과 일본인을 견제하기도 해야 했다.

 1902년 5월 데슬리라는 사람이 이민 모집대리인으로 입국하자 고종은 정부 안에 수민원이란 이민국을 설치하고 민영환을 총재로 앉혔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선뜻 응하지 않았다. 조상의 묘와 고향을 떠난다는 일은 죄악이었던 것이다. 고종은 칙서를 내렸고, 선교사들도 설득했다. 1902년 12월22일, 최초의 조선인 이민 1백21명을 태운 배가 제물포항을 출발했다. 하와이 이민은 이후 1905년까지 모두 7천2백26명에 달했다.

 하와이 이민이 성공을 거두자 일손 부족으로 허우적대던 멕시코의 사탕수수 · 어저귀(백마;배에서 쓰는 밧줄의 원료) 농장주들이 조선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멕시코 농장주들은 미국인 미야스와 일인 다이쇼를 시켜 한인을 모집케 했다.

 이번에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쿠바 이민사》(임천택 지음. 54년 쿠바에서 발간)는 당시를 이렇게 적고 있다. ‘1905년에 북미 묵셔식민회사 주최로 선전하기를 묵국(멕시코)에 가서 4년 기한만 채우면 금 · 은 · 동화를 한짐씩 걸머지고 귀국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풍문을 듣고 너나 할 것 없이 남녀노소를 합하여 1천33명의 적지 않은 우리 동포가 묵국 유카탄에 이민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 이민은 애초부터 ‘속임수’였다. 88년 서울에서 발간된 멕시코 한인 이민사 《유까딴의 첫 코리언》(이영숙 지음 · 인문당)에 따르면, 1904년 7월부터 10월15일k까지 원산 인천 진남포 부산에서 1천33명을 모집했으나 우리 정부는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계약노동은 노예와 다를 바 없다는 매우 ‘합당한’ 문제 제기였다. 모집인들은 프랑스 공사를 내세워 여권을 받아냈는데, 이 때 ‘계약 노동도 자유 노동’이라는 술수를 부렸다.

 1905년 3월6일 제물포항을 떠나 요코하마를 거쳐 5월15일 멕시코 유카탄주 베라크루스항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1천31명(항해 중 2명 사망)의 한인들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배치’된 24개 지역 즉 사탕수수 · 애니깽 ·어저귀 · 선인장 농장과 광산 · 시멘트 공장은 이들을 돌연 노예로 바꾸어버렸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으며, 숙식도 엉망이었고,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넓은 밀림지대는 캄캄한 지옥이었다. 채찍 아래서 이들 ‘애니깽’들은 새벽 5시부터 밤 늦게까지 일했다.

“농장의 개만도 못합니다”
 애니깽은 독성이 강하고 날카로운 가시가 많은 용설란의 한 종이다. 한인들은 애니깽 농장에서 애니깽처럼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애니깽은 노예로 팔려온 한인들의 비극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애니깽은 주로 배에서 쓰는 밧줄의 원료로 쓰였으며, 카펫이나 옷감으로도 사용되었는데 멕시코 유카탄이 원산지였다.

 그 해, 인삼을 팔러 멕시코까지 흘러들어갔던 박영순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한인들이 노예로 팔려갔을 것이다. 박영순이 귀와 눈으로 확인한 한인들의 삶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인삼보따리를 내려놓고 급히 편지를 썼다. 수신은 하와이 북미한인공립협회.

 ‘…거짓말로 사람을 모아다 노예를 만들었는데, 근래에 또 이민을 모집한다는 말이 있으니 우리의 소식을 본국에 보내서 동포들이 다시 이곳에 오지 않도록 알려달라고 합니다.…이곳에 이민된 동포들은 낮이면 불같이 뜨거운 가시밭에서 채찍을 맞아가며 일하고, 밤이면 토굴에 들어가 밤을 지새며 매일 품값으로 35전을 받으니 의복은 생각할 여지도 없고 겨우 죽이나 끓여서 연명할 뿐으로 그 처지가 농장 주인의 개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쿠바 일본인들 ‘한인 등록’ 요구
 박영순의 편지는 하와이를 거쳐 본국에 전달되었다. 정부는 한국주재 미국공사관의 통역이던 윤치호를 멕시코로 급파했다. 그러나 윤치호는 하와이에서 배멀미 때문에 멕시코 현지 조사를 포기하고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에 연락해 멕시코 한인 노동자 실태를 파악하게 했다. 미주지역 한인들은 멕시코 한인들을 미국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힘을 쓰면서 성금도 모았다. 이 소식이 멕시코에 알려지자, 참지 못한 한인 4명이 농장을 탈출해 1906년 9월1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불법으로 입국하는 바람에 멕시코 정부와 미국 정부가 틀어져 미국 이주 계획은 실패했다.

 4년 계약 기간이 끝나자 한인들은 멕시코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개중에는 미국이나 하와이, 본국으로 간 이들도 있었다. 가진 것은 노동력밖에 없었으므로, 품삯만 높다면 어디든 가야 할 판이었다. 먼저 쿠바로 가 있던 한인 이해영씨가 사탕수수 농장 일이 벌이가 좋다는 소식을 알려 왔다. 15년을 산 멕시코가 제2의 고향, 쿠바가 제3의 고향이 되는 순간이었다.

 21년 3월초 멕시코 한인 약 3백명은 카리브 해를 건너 쿠바 마니티 항에 닿았다. 그러나 쿠바는 ‘제2의 묵국’이었다. 《쿠바 이민사》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도처에 춘풍이라는 말과 같이 우리 한인이 (쿠바)이민으로 오기 전에는 설탕 한근에 25전이라는 고등한 가격으로 황금세계라고도 하였었는데 우리 한인 동포가 이민한 그해부터는 설탕값이 아주 저락되어 매근 2전까지 되었음으로 쿠바 일반 인민들의 생활이 심히 곤난하게 되었습니다. 고생과 한탄이 그칠 새가 없었습니다.’

 가로 14cm 세로 21cm 크기에 3단 세로 조판 32쪽짜리 《쿠바 이민사》는 21년부터 54년까지 33년간 한인들의 쿠바 정착 과정을 비롯해 한인단체 설립, 모국 독립운동 지원은 물론 인구, 학력 · 생활 수준, 직업, 결혼 형태, 사망자 등에 이르기까지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저자 임천택씨는 1903년 경기도 광주 출생으로 멕시코로 가던 배 위에서 두 돌을 맞았다. 쿠바에 이주한 뒤로는 한인 사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26년부터 본국과 연락을 가져, 본국에서 신문 · 잡지 · 책을 입수했고, 쿠바 한인 소식을 본국 매체에 기고했다. 이 작은 ‘역사서’가 없었다면, 쿠바 한인 이민사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사탕수수값만 폭락한 것이 아니었다. 해외에 나와 보니 ‘일본 신민’이 되어 있었던 한인 이민들에게 일본인들이 달겨들었다. 쿠바의 일인들이 ‘한인 등록’을 요구해온 것이다. 한인들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즉시 쿠바국민회 지방회를 결성했다. 쿠바 정부로부터 정식 관청으로 허가까지 받아냈다. ‘근거를 완성치 못한 때 또는 생활에 간난을 당함에도 불관(불구)하고 지방회를 설도한 후 광복사업 구제금, 교육사업이며 재큐 동포 안녕보장에 열중’하기 위해서였다(재큐의 ‘큐’는 예전에 ‘큐바’로 불렸기 때문).

 쿠바에 들어간 21년부터 소규모이지만 국어 교육 사업을 펼쳤고 23년에는 민성국어학교를 세웠다. 22년부터는 생활도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동포들은 주로 마탄사스와 칼데나스의 어저귀 농장에 정착했고, 일부는 수도 아바나로 이주했다. 교육사업은 32년에 설립된 청년학원으로 확대되었다. 야학과 독서회의 토론과 강연회를 통해 한국혼과 애국혼을 고취했다. 한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36년에는 재미 한인 국민회의 주선으로 국민회 청년부 쿠바 마탄사스지부를 설립해 덕 · 지 · 체를 교육 목표로 삼았다.

 일제 초기 독립운동에 관여했던 민족 종교 천도교도 쿠바에 일찍 뿌리를 내렸다. 임천택씨는 26년 본국의 개벽사 이두성씨와 서신 연락을 시작해 28년 부부가 함께 교인이 돼 본국 중앙교회의 지시를 받았으며, 30년에는 칼데나스에 천도교 쿠바 종리원 간판을 달았다. “한때는 천도교 천하인 듯”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쿠바에 닿자마자 한인들 사이에 정착했다. 21년말 예수교회(감리교)가 정식 설립되었는데, 33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50년대까지 한인 사회의 구심점이 되었다.

 쿠바 이민사의 핵심은 독립운동 후원이다. 23년 3월1일을 맞아 독립선언 시위를 한 때를 기점으로 한인들은 태극기를 줄곧 내걸었다. 쿠바 한인 단체는, 간혹 미주 지역으로부터 성금을 받기도 했지만 주로 한인들의 성금으로 운영되었다. 광복군 후원금과 독립금 명목으로 모두 1천92원(당시 하루 품삯이 몇 십 전이었으므로 적지 않은 금액이다)을 모았고, 이 중에서 2백46원은 쿠바 중국인 은행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 김 구 주석 앞으로 송금하기도 했다.

 30년대에는 쿠바 정부의 각종 행사에 초청받아 한인사회와 한국의 입지를 쿠바 사회에 부각했다. 37년 38년 두 차례에 걸쳐 마탄사스 정부가 주최한 자선 구제 대회를 쿠바인들과 함께 준비했으며, 이 대회에서 ‘한국 고대문명을 자랑’했다. 39년에는 쿠바의 바티스타 대통령 선거 운동도 도왔다(바티스타 정권은 59년 쿠바혁명 이후 혁명 정권에게 배척되었다). 일본 · 독일 등 침략국 타도대회에도 적극 참가해 태극기를 게양했다.

 43년 말에 이른바 ‘펄 하버’사건이 일어났다. 쿠바 정부가 일본인 정보원을 체포한 사건인데, 이 과정에서 쿠바 라디오 방송이 한인과 일인은 동일하다고 보도하는 바람에 한인들은 위기에 몰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 지역으로 분산됐던 한인 조직이 하나로 뭉쳤고, 쿠바 정부로부터 보호증명장을 발급받아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59년 혁명 이후 한인사회 해체
 쿠바 내에서 한인 사회의 결속력이나, 한인의 위치는 어느 정도 공고해졌지만,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33년 정권이 바뀌고 새 노동법이 발효되자 한인과 같은 외국인 노동자들은 심한 차별을 받았다. 48년, 50~53년에도 일감 부족 사태는 심각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한인이 쿠바 외무부에 시민권을 신청했다. 쿠바인이 아니면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국은 식민지였고, 해방되었지만 곧 전쟁에 휩싸이고 말았다.

 54년 당시 쿠바 한인은 약 4백명이었다. 《쿠바 이민사》에 따르면, 50년대 초반 한인 2~3세 중에는 현지 상업학교 · 관립 중학교 · 대학교에 진학해 타자 속기 음악 간호 양재 건축학 분야로 진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5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인 단체는 겨우 명맥만 유지했다. 45년 9월6일 칼데나스 지역 동포들이 대일전쟁 승전 축하 시위를 벌였고, 상점에서는 태극기를 내걸기도 했지만 이후 한인 사회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45년 이후 어저귀 농장과 같은 일터는 계속 줄어갔다.

 59년 쿠바가 공산화하자 쿠바는 한국과 국교를 단절했고 이듬해 북한과 수교했다. 59년 쿠바혁명을 전후해서 재산이 있던 한인들은 미국 등지로 나갔다고 한다. 쿠바 한인들이 쿠바 사회에 편입되기 시작한 것이다(72~73쪽 쿠바 한인 후예들의 현주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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