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우지 경제’의 족쇄
  • 박순철 (편집국장) ()
  • 승인 1994.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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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고 시대의 한국 경제는 수십 년간 계속된 대일 종속의 굴레를 벗고 좀더 높게 비상할 기회를 맞고 있다.”

나라마다 다른 상식이 있다. 우리의 상식 가운데 하나는 ‘경제는 성장한다’는 것이다. 한 세대 이상의 고도성장에 익숙해진 결과 성장은 아이들이 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 돼버렸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려면 지난해 이상을 생산해야 한다.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세계 전체로 보면 마이너스 성장으로 떨어지는 나라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요즘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세계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그 관심은 인권에서 시작됐지만 멀지 않아 경제 문제로 초점이 옮아갈 수 밖에 없다. 경제 규모로만 보면 남아공은 아프리카에서 첫째 가는 대국이다. 다른 나라들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46쪽 ‘워싱턴 통신’참조). 그런데 늘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지난 80년 현재만 해도 남아공의 한 해 국민총생산(GNP)은 ‘검은 대륙’에서 2위였다. 1위는 서아프리카의 산유국 나이지리아였다.

 그런데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겨우 10년이 지나는 사이에 남아공의 국민총생산은 나이지리아의 4배 이상으로 커졌다. 이렇게 보면 남아공 경제가 경이적인 성장을 이룬 것으로 짐작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이 기간에 남아공의 국민총생산은 물가상승률을 감안하지 않은 경상가격으로도 별로 늘어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는 마이너스 성장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 분리 정책)의 부산물은 경제 질식이었다.

성장률 높아야 마음이 놓인다?
 그렇다면 나이지리아 경제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야말로 급전직하였다. 80년에 8백90억달러이던 국민총생산은 9년 뒤에는 2백15억달러로 바짝 움츠러들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천1백달러에서 1백97달러로 곤두박질쳤다. 마이너스 성장의 원인은 간단명료했다. 나이지리아 경제는 이른바 ‘단작 경제’였다. 국민 경제가 두서너 가지 광산물이나 농산품에 의존하는 경제를 단작 경제라고 일컫는데, 나이지리아 경제의 석유 의존도는 절대적이었다. 국제 유가가 무너져내리면서 국민 경제가 통째로 붕괴해 버렸다.

 지난 30여년 간의 공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은 단작 경제의 기억을 완전히 씻어버렸다. 기억상실증은 고도 성장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고정관념이 자라났다. 성장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또 좋은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지난해처럼 성장률이 5%대로만 떨어져도 국민을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지난 1/4분기 성장률이 8.8%에 달했다는 뉴스는 잠시 잘못됐던 세상이 바로잡히기라도 한 듯 마음 놓이는 소식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경제를 만들 듯 경제도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돌아온 고도성장은 즐길 일이지 꼬치꼬치 따질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또는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단작 경제가 겪고 있는 경제 파탄을 그대로 한국 경제에 대입하는 것은 무리한 노릇이다. 하지만 이런 안도감에는 위험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우선 한국 경제의 수출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해외 경제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데 따라 함께 출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단작 경제의 운명이나 진배 없는 측면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떡은 일본이 챙기고 한국은 떡고물만
 그러나 한국 경제의 취약한 대외의존적 구조를 가장 실감나게 표현한 사람은 일본의 경제 평론가 고무로 나오키(小室正樹)가 아닌가 싶다. 그는 이제는 유명해진 ‘가마우지 경제’라는 표현을 써서 일본이 어떻게 한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가를 묘사했다. 가마우지는 날개 길이가 30cm쯤 되는 큰 새로 주로 물고기를 잡아 먹는다. 일본에서는 가마우지를 훈련시켜 여름 밤에 횃불을 켜놓고 물고기를 잡게 한다. 한국 기업들은 일본으로부터 자본재와 부품을 들여와 국내에서 조립해 주로 미국에 수출한다. ‘떡고물’은 챙기지만 이익의 큰 부분은 고스란히 일본 경제에 환류되고 마는 기막힌 종속 구조의 포로인 셈이다.

 문제는 가마우지 경제라는 표현이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쓴 현재도 일본에 의존하는 구조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경기가 좋아지면 어김없이 일본으로부터 기계와 부품 수입이 늘어난다. 대일무역 적자가 크게 증가하면서 경상수지 적자 폭이 확대된다. 올해 들어서도 낡은 공식을 외우듯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4월말 현재 경상수지 적자는 28억달러까지 치솟았지만 고도성장의 흥겨움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정책 당국도 투자와 수출이 주도하는 경기 회복이 ‘건실’하다는 강조는 잊지 않지만, 경제 활동의 활기가 일본의 기계와 부품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경제 기반의 ‘부실’은 쉽사리 외면한다.

 한국 경제는 지금 목줄을 잡고 있는 ‘가마우지의 저주’를 벗어나 좀더 높게 솟아오를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다. 엔고로 일본 산업의 경쟁력이 약화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후반의 엔고 기회를 어이없이 놓쳐버린 기억이 우리에게는 생생하다. 소규모 개방 경제로서 한국 경제의 대외 의존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국제 경제의 생존 전쟁에서 과도한 의존에는 늘 위험이 따른다. 과대 포장되기 쉬운 성장의 허구를 궤뚫어 보고 자기 운명에 대한 결정력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끊임없이 실천해야 할 명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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