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 배짱 "과거를 묻지 말라"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4.06.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핵무기 1∼3개 보유' 묵인받는 파키스탄 방식이 목적



 북한의 과거 핵 활동을 덮어두느냐, 끝까지 파헤치느냐. 최근 북한이 일방적으로 영변 원자로에서 핵연료봉 교체를 강행함으로써 고조되고 있는 핵위기는, 앞으로 이 질문에 관한 응답 내용에 따라 종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양상을 띨 것 같다. 덮어둘 경우 미국의 대북 핵전략은 전면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북한이 버티는 상황에서 제재를 통해 끝까지 파헤치려 할 경우 군사 충돌 위험을 부담해야 한다. 지금 미국이 주도하여 유엔 안보리에서 제재가 논의되고, 별도로 한국 · 미국 · 일본이 대북 제재를 추진하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근본적 고민이 바로 이 질문 속에 있다.

 이제 북한이 영변의 5MW 원자로에서 핵폭탄 1∼3개를 만들 분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는지 여부는 '과거'의 일로 묻혀버릴지 모른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한스 블릭스 사무총장은 북한의 일방적인 핵연료봉 교체작업으로 과거의 핵물질 전용 여부를 가릴 수 없게 됐다고 결론을 내린 상태다. 미국은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북한 핵의 과거를 따지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과거를 파헤칠 수 있는 결정적 단서였던 영변 원자로의 핵연료봉 시료 채취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미국이 언제까지나 영변 원자로의 과거에 집착할지 의문이다.

 이같은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는 지난 3일 미국측 핵협상 수석대표인 로버트 갈루치 국무차관보가 한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북한 핵 활동의 과거를 알아보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첫째, 북한이 스스로 핵관련 정보를 추가로 제공하는 것이다. 둘째, 북한의 미신고 핵 폐기물 시설 두곳을 특별사찰하는 것이다. 셋째, 핵연료봉에 대한 비파괴검사를 실시해 플루토늄 추출 여부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세번째 방법은 북한의 일방적 핵연료봉 교체 작업으로 이미 쓸모없게 됐다. 첫번째 방법도 북한의 태도로 보아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두번째 방법뿐이다.

 우리측의 金三勳 핵담당 대사도 지난 3일 워싱턴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그는 "핵쓰레기 저장소로 의심받고 있는 미신고 시설 두곳에 대한 특별사찰이 가능하다면 북한의 과거 핵 추출 여부에 대한 의혹을 해소하기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의 시설은 북한이 군사 시설이라며 한사코 사찰을 거부하는 곳이다. 국제원자력기구가 이 시설들에 대한 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은 지난해 3월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을 만큼 '성역'으로 간주한 곳이다.

 갈루치 차관보나 김대사가 한 발언의 저변에는 플루토늄 추출 여부를 확인할 수 없게 된 영변 원자로 문제만이 북한의 과거 이력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은 아니라는 해석이 깔려 있다. 오히려 두 사람은 이제 과거의 범위에 2개 미신고 핵시설까지 포함시켜 이곳에 대한 특별사찰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느낌이다.

 이같은 맥락으로 보아 현재 미국이 주도하여 추진중인 유엔 안보리의 북한 제재 결의안도 북한에 대한 응징보다는 다시 한번 과거의 핵투명성을 보장할 기회를 주는 데 초점을 맞출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북한이 미신고 핵시설 두곳에 대한 사찰을 받아들여 영변 원자로에서 기회를 놓쳐버린 과거의 핵활동을 검증할 수 있는 쪽으로 결의안 내용을 조정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 대북 제재를 추진하는 목적은 북한을 응징해 긴장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핵 협상의 테이블로 다시 끌어내는데 있기 때문이다.

 만일 북한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경제 제재와 같은 강경 결의안이 중국의 기권 속에 채택될 경우 미국이나 한국이 이를 환영할 만한지 아닌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러한 제재를 '전쟁'으로 간주한 북한이 일전불사로 나오면 나왔지 유엔의 제재에 순순히 응할 턱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의 姜錫柱 외교부 부부장이 "미국이 대화를 거부하고 폭력적 수단을 선택할 경우 우리는 다음 단계의 핵 활동으로 이행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나, 현재 탈퇴를 유보한 핵확산방지조약 탈퇴를 강행하겠다고 위협한 것은, 북한의 정면 대응 결의를 반영한 것이다.

유엔 안보리 제재 실현될지 의문
 그러나 현 시점에서 미국은 이번에야 말로 어떤 식으로든 북한에 대해 '힘의 의지'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유엔 제재든 또는 한국과 일본 중심의 3국 제재든, 미국의 대북한 제재 결의는 전에 없이 단단하다. 클린턴 행정부는 지난해 3월 북한 핵 위기가 터진 이래 북한의 핵 협상 전략에 끌려다닌다는 비판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이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은 지금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자던 국무부마저 대북 제재 쪽으로 돌아선 상황이다. 북한의 막무가내 행동이 지금껏 분열된 양상을 보여온 미국의 국론을 제재 쪽으로 통일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미국의 강력한 의지가 유엔 안보리의 제재를 통해 실현될지는 의문이다. 북한의 핵사찰거부가 침략이나 무력행위는 아니라는 점에서, 유엔 안보리가 취할 제재의 성격은 응징이 주목적이었던 이라크나 리비아에 대해 취한 제재처럼 단순하지도 않다. 특히 북한에 원유와 곡물의 90%를 공급하고 있고, 북한의 전체 교역 중 40%를 차지하는 중국의 협조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난점도 있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유엔의 경제 제재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해 왔다. 러시아는 북한 핵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남북한과 미국 · 중국 · 러시아 ·일본, 유엔 사무총장,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이 참석하는 8자 회담을 제의해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유엔 차원의 제재가 중국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3국 제재를 추진할 것이 분명하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아니지만 일본의 제재 참여는 중국 못지 않은 효과를 갖는다. 특히 일본 정부가 해마다 6억∼18억달러에 이르는 조총련계의 대북 송금을 금할 경우 북한 경제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의 헌법 테두리 내에서 대북 제재에 동참한다는 방침이어서 적극적인 대북 제재에 나설지는 두고보아야 안다.

북한, "핵 보유는 곧 생존"
 한국은 유엔의 대북 제재를 지지하기는 해도 속마음까지 그러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제재 논의가 본격화할수록 가장 곤혹스런 입장에 처할 나라는 한국이다. 이미 한국은 북한 핵 문제 때문에 남북대화를 포함한 일체의 남북 교류마저 중단해야 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한반도 핵 전문가인 피터 헤이즈씨는 "유엔 안보리 제재가 신속히 이뤄지면 한국도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제재 논의가 시간을 끌게 되면 한국 내에는 북한의 남침이나 북한 자체의 붕괴를 가져올지도 모를 유엔의 제재가 과연 현명한 것인가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한국은 북한에 대한 무리한 제재로 제2의 한국전이 일어나는 것을 누구보다 원치 않는 당사자라는 점에서, 제재를 지지하면서도 내심 속앓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유엔에 의한 제재건 또는 미국 중심의 다국적 제재건 그것이 실현될 경우 북한 지도부에 엄청난 압력으로 작용할 것은 틀림없다. 전문가들은 제재가 6개월∼1년 정도일 경우 오히려 북한 주민의 단결심을 강화시킬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제재가 1년을 넘어설 경우 북한 경제는 파국을 맞게 될 것이고, 이는 북한 지도부에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관측이다.

 북한이 미국 등의 강력한 제재를 각오하면서까지 핵연료봉 교체와 같은 '정치적 자살'을 감행한 까닭은 무엇인가. 첫째, 북한 정책이 우선 핵을 가진 연후에 미국과의 수교든 경협이든 받아내겠다는 쪽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다. 다음은 클린턴 행정부가 대화 수단을 통해서만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오판했을 가능성이다. 끝으로 미국과의 일괄타결이냐 선핵무기 보유냐 하는 문제를 놓고 북한 지도부 내의 실용파와 보수파가 투쟁한 결과 보수파가 승리했을 가능성이다.

 이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첫번째 가능성이다. 북한이 '핵 보유는 곧 생존'이라는 편집광적 태도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국과의 3단계 회담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굳이 영변 원자로의 핵연료봉 교체 작업을 강행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북한은 핵을 보유함으로써 최소한 미국의 핵 선제 공격이나 한국의 '흡수 통일' 전략에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과 수교해도 정치 · 심리적 안전판으로서 핵보유 사실에 대해서는 계속 모호한 태도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과거의 핵 활동 여부에 관한 북한의 모호한 태도는 핵의 유무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NCND)'는 미국의 정책과 맞먹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외교안보연구원의 尹德□ 교수는 "북한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파키스탄식의 핵전략이다"라는 충격적인 분석을 내렸다 (54쪽 기사 참조).

 미국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소속 핵전문가인 레너드 스펙터가 지은《핵야욕》이라는 저서에 따르면, 파키스탄은 72년 핵무기 개발계획을 은밀히 추진해 75년에 농축 우라늄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기술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84년 파키스탄이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데 성공하자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 의회는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를 핵개발 제한과 연계시킨 '프레슬러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85년 파키스탄이 마침내 핵무기 제조용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데 성공하자 미국은 파키스탄에 대한 핵 억제 정책을 '전면 금지'에서 '제한 금지'로 수정했다. 미국은 파키스탄이 농축 우라늄 시설을 갖되 결코 핵무기용으로 전용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고 중단했던 원조를 재개했다. 89년말 부시 미국 대통령은 파키스탄이 '핵 기폭장치'만 보유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확보했다고 시인했다.

 오늘날 파키스탄은 전투기에 탑재할 수 있는 5~10개의 핵폭탄을 배치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키스탄 정부는 핵개발 능력을 인정한 적은 있어도 보유 사실은 단 한번도 시인한 적이 없다.
 일부 관측통은 북한 지도부가 영변 원자로의 핵연료봉 교체를 강행한 배경에는 결국 미국이 북한에게도 파키스탄식의 대우를 해 줄 수밖에 없으리라는 판단이 깔렸다고 본다. 북한은 핵무기 보유를 미국이 눈감아 주는 대신 추후에는 핵개발을 하지 않겠다고 보장하려 한다는 관측이다.

 미국은 북한의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바로 이 점이 앞으로의 과제다. 북한의 과거를 용인한다는 얘기는 곧 북한이 과거에 만들었을지도 모를 핵무기 보유를 용인한다는 말과 같다. 그럴 경우 당장 한국 정부가 91년에 선언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휴지 조각이 될 판이다. 최근 李洪九 통일 부총리가 국회에서 "북한이 핵 재처리 시설로 알려진 방사화학실험실을 계속 유지할 경우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새로운 각도에서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의 과거를 용인 내지 묵인할 경우 우리 정부도 기존 핵정책을 처음부터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 묵인 땐 한국과 외교 마찰 예상
 미국은 명분상 북한의 과거를 묵인해선 안 될 입장이다. 당장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도 문제지만, 북한이 핵무기 1∼3개 정도 보유하는 것을 방치하면 미국이 주도해온 핵확산방지조약은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조약은 내년 봄이면 발효한 지 25년이 돼 그 연장 여부를 심의받게 돼 있다. 만일 이 조약의 가입국인 북한이 핵무기를 가질 경우 리비아 · 이란 · 시리아 등 핵을 보유할 야심을 불태워온 나라들도 뒤따를 것이 확실하다. 영국의 유력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핵확산방지조약 체제의 약화 △북한의 핵무기 수출 △핵무기에 의한 남한 적화 야욕 등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북한의 과거를 용인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북한의 과거 핵 활동 문제를 풀 수 있는 편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과거 핵 활동을 검증할 수 있는 시설에 영변원자로뿐 아니라 미신고 핵폐기물 시설 두곳까지 포함하는 길이다. 북한이 2개 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수용한다면, 미국이 영변 원자로에서의 과거 핵 활동을 묵인한 채 북한과 3단계 회담을 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북한으로부터 추후 핵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확약만 보장받는다면 수교를 포함해 북한이 요구하는 것은 거의 다 들어줄 가능성도 있다.

 미국은 맹방인 한국과 북한 핵 문제에 관한 한 긴밀한 공조체제를 유지해온 듯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으로부터 추후 핵 개발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고 나서 영변 원자로에서의 핵 활동을 포함한 일체의 과거를 묵인하는 파키스탄식 정책을 추구할 경우 한국 정부와 외교 마찰이 예상된다. 그만큼 북한 핵의 과거는 경우에 따라서는 두 나라의 핵 공조체제에 균열이 생기게 할 수 있는 복병이다.
卞昌燮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