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영웅만 남는가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1.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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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야망의 세월> 특정인물·기업 부각 물의… “함께 땀흘린 사람들은 소외”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7조는 모든 방송 프로그램이 지켜야 할 기본 윤리의 하나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방송은 진실을 전달하고 사회정의 실현에 이바지하며 공공성과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교양방송에 관한 제26조는 또 ‘방송은 의도적으로 특정상품이나 영업소, 또한 공연장 등을 선전하는 내용을 포함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방송위원회 연예오락 심의위원회는 지난달 29일 KBS 2TV 주말연속극 <야망의 세월>(극본 나연숙·연출 김현준)이 그러한 ‘윤리’를 어겼다고 의결, 주의조처를 내렸다. “등장인물과 기업을 일반적으로 인지 가능한 실존 특정기업·특정인물과 유사하게 설정, 이를 미호하고 영웅적으로 묘사함은 결과적으로 방송매체를 통해 특정기업과 인물을 편향적으로 홍보하는 것으로, 방송의 공공성 취지에 위배된다”는 결론이었다.

 이 드라마에느 60?70년대 실제 정치·경제 상황과 관련된 자료화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것이 드라마 속의 구체적인 상황과 일치함으로 인해 드라마 내용이 픽션이 아닌 사실(역사)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 때문에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극중에 묘사되고 있는 시대 배경이나 기업의 성장과정·업종·인물성격 등에서 매우 흡사한 점을 갖고 있는 어느 기업과 어느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현대그룹과 현대건설 이명박 회장(49)이다.

 “누구는 누구”라는 식으로 일부 신문에서 흥미삼아 보도했듯이 이회장 말고도 실제 인물과 비슷한 사람들이 극중에는 더러있다. 그러나 이회장과 현대그룹으로 ‘묘사되는’부분이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까닭은 방송위 지적대로 그 사람과 그 기업의 얘기라는 화면의 ‘암시’가 분명한데, 이 둘의 긍정적인 쪽만 일방적으로 부각돼 형평성을 크게 잃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드라마에 불과하다”는 말로 비판을 피해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암시’의 필연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방송측과 현대측의 금전적·인간적 관계는 이 드라마가 비판받는 이유를 보다 분명히 해준다. 작가 나연숙씨는 집필에 필요한 자료의 상당 부분을 현대그룹에서 얻고 있다. 이 그룹 문화실에서 제공한 이명박 회장과 정주영 명예회장 관련 에피소드, 건설·중공업 사사 등이 ‘양면’을 가감없이 다룬 내용일 리 없다. ‘전설적인’ 좋은 얘기들만 기록으로 남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모델로 삼은 곳에서 자료를 구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다른 경로로 사실에 가깝게 보완하면 될 것이다. 나씨의 경우는 이명박이란 한 개인에게 ‘매료’된 나머지 그것을 무절제하게 작품에 투영시키고 있다고 해서 비판이 따른다. 나씨는 이러한 지적에 대해 “어느 장인의 얘기를 다룬다고 할 때 그가 예술을 하기 때문에 그 작품은 용인이 되고 기업에 미친 사람의 얘기는 단지 그가 기업인이라는 이유로 안되는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누가 보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극중‘박형섭’, 즉 이명박 회장으로 그려지는 인물의 대사가 팩시밀리를 통해 현대건설 본사(서울 종로구 계동)의 이회장실 앞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 회사 사원들에 의해 최근 밝혀지기도 했다. 익명을 원하는 한 사원은 “매주 5?6장이 오고 있는데 발신자는 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박형섭’의 대사, 현대건설 본사에 전달
 KBS측과 작가는 이를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부인하고 있다. 반면 현대그룹 문화실의 홍보담당 간부는 “확인하진 않았다”고 전제, “그러나 만약 사실이라면 ‘이왕 드라마가 이명박 얘기로 세상에 알려진 만큼 사실에 근접해서 드라마가 전개되는 것이 좋겠다’는 뜻에서 그런일이 이뤄졌을 것으로 이해한다”고 밝혔다.

 ‘인간적 관계’의 사례는 더 있다. 현대건설의 또다른 사원에 따르면 “박형섭 역의 탤런트 유인촌씨가 이회장실에 몇차례 다녀간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원은 이같은 사실 등이 드라마에 대한 사원들의 시각을 더욱 부정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전했다. “어느 ‘영웅’과 똑같이 땀흘린 사람들, 그 과정에서의 ‘이해와 갈등’을 고르게 보여주지 않는 점이 가장 큰 불만”이라는 얘기다.

 한 기업은 근면과 투지, 경쟁기업은 정경유착이라는 구도로 짜여진 점도 이 드라마가 보여주고 있는 일방적 미화의 한 예인데, 반복되는 얘기지만 그 ‘정의로운’기업이 현대그룹임을 여러 곳에서 암시하지만 않았다면 문제는 그다지 크지 않다. 드라마가 역사적 사실로, 주인공의 기업이 현대그룹으로 인식되다보니 상대기업도 보는 사람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특정기업을 연상하게 된다. 하나의 영웅, 하나의 모범기업을 위해 “희생되는” 사람들과 기업들의 ‘역기능’을 <야망의 세월>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KBS의 제작관계자는 이 드라마의 기획취지를 “기성세대나 젊은세대들이 어렵게 살아온 과거를 너무 잊고 사는 것 같아 그 ‘격동의 세월’을 다시 돌아보자는 뜻에서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의 경제발전을 그리자니 현대그룹을 빼놓을 수 없었고, 젊은이들에게 꿈을 줄만한 모델을 찾다보니 이멍박씨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인가. 지난 3월 말레이시아 건설현장 촬영 때 KBS는 “그런 취지라면 기꺼이 협조하겠다”는 현대측의 제의를 받고 제작진 20여명의 왕복항공료와 숙식비용 일체를 제공받은 일이 있다.

 한 제작자 또는 한 작가의 세계관이 곧 우리 사회의 보편타당한 세계관은 아닐 것이다. 한편의 멜로드라마를 두고 말들이 많은 까닭은 그 세계관의 차이가 상당히 크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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