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기조실, 해체설에 발끈
  • 김상익 기자 ()
  • 승인 1991.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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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경영 총괄해온 총수 ‘두뇌’ 겸 ‘손발’

 “차라리 재벌을 해체하라고 그래라.” 최근 정부가 재벌의 경제력 집중 완화 방안을 마련하고 있으며, 그 내용 중에는 ‘회장제 폐지 및 기획조정실 해체’도 포함돼 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나가자 삼성그룹 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재벌기업에 기획조정실을 해체하라고 하는 것은 나라 차원에서 볼 때 청와대 비서실이나 경제기획원을 없애라는 발이나 마친가지라고 흥분했다.

 기획조정실은 도대체 무슨일을 하는 곳이기에 재벌 회사들은 기획조정실 해체설에 그토록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가.

 지난 56년 삼성그룹이 자금운용을 원활히 하기 위해 비서실을 만든 이래 웬만한 대기업이면 총수의 손발처럼 움직이는 직할기구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기구는 그룹에 따라 기획조정실 회장실 비서실 종합기획실 경영기획실 경영조정실 등의 각기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이하 기획조정실로 통칭).

돈 정보 인사 등 계열사 조정권한 지녀
 기획조정실 실장은 부회장 또는 사장·전무급으로 직급이 높으며, 손꼽히는 재벌회사의 경우 직원수가 적게는 30명, 많으면 2백명이 넘는다(표 참조). 이들의 확동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업무 성격상 기획조정실과 수시로 접촉하고 있다는 ㅅ그룹의 한 직원은 “나 자신도 그들 중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털어 놓았다.

 회사마다 기획조정실의 규모와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기능도 제각각이지만 그룹회장의 두뇌 역할을 하면서 계열사의 신규사업투자 타당성 조사, 자금관리, 계열사간 투자 조정, 감사 및 인사 등 업무를 수행한다고 보면 큰 무리가 없다. 한마디로 돈 정보 인사 등 그룹내 계열사를 ‘조정’할 수 있는 막상한 권한을 갖고 최고결정권자인 그룹회장을 보좌하는 것이다.
 자금관리의 예를 들어보자. ㄱ ㄴ 두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이 있다고 할 때 어느 한 시점에 ㄱ회사가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이 10억원인데 지출해야 할 돈이 20억원이라면 그 회사는 부도가 날 터이지만 마침 ㄴ회사에 10억원의 여유자금이 있다면 ㄱ회사에 꾸어줘 기업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그룹의 전체 가용자금이 50억원이라 할때 투자 우선순위에 따라 효과적으로 배분하면 그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이같은 일은 그룹회장이 직접 할 수도 있겠으나 계열사가 수십개에 이른다면 아무리 탁월한 경영자라도 혼자서 해낼 수 없다. 그렇다고 수십명의 사장단이 날마다 모여 회의를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룹 전체를 통괄하는 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기획조정실 관계자의 말이다.

 기획조정실은 그룹 총수가 사업계획을 세울 때 판단의 자료가 되는 사업보고서를 마련하며, 정부의 경제정책이 나올 때면 그정책이 자기 그룹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대응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숨가쁘게 돌아간다. “국정감사를 맡겨도 능히 해낼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력이 있는’ 기획조정실도 있다.

 모그룹에서는 최근 몇 년간 기획조정실 출신 직원 수백명이 각 계열사로 이동했다. “실무를 익히기 위한 것”이 취지였지만 ‘계열사 실태 파악’에도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그룹의 ㅇ씨는 “내가 지금 모시고 있는 사장이 그룹의 이익과 상충하는 일을 하려 할 경우 그룹의 이익을 위해서 그를 ‘배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기획조정실 구성원은 계열사 직원과 마친가지로 공채를 통해 입사. 그 즉시 또는 계열사에 근무하다가 기획조정실에 발탁된다. 이들의 소속 형태는 두가지이다. 기획조정실이 독립 법인체가 될 수 없으므로 소속은 계열사에 두고 파견 형식으로 근무하는 경우와 대우그룹처럼 기획조정실로 발령나면 (주)대우에 소속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ㄱ주식회사의 사원이 아니라 ㄱ그룹의 사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자신을 그룹 총수의 분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회장 한사람에게 절대권련이 집중된 채 문어발식 확장을 거듭해온 우리나라 재벌의 특성 때문에 현재의 경영구조가 유지되는 한 기획조정실은 없어서는 안될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기획조정실이 없어진다면 그룹 총수는 계열사를 통제할 수족과 두뇌를 잃는 셈이다. 재계 관계자들이 ‘기획조성실 해체설’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들은 정부가 현재 30대 또는 50대 재벌을 선정, 그룹단위로 각종 규제를 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개별기업 단위로 실시하지 않는 한 각 그룹은 기획조정실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초일류 기업 되려면 제살 떼어내야
 그렇다면 왜 기획조정실이 도마 위에 올랐을까. 정부가 현재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진 경제력 집중 완화 방안은 그룹 단위의 경영을 개별기업 단위의 경영으로 유도한다는 것이다. 이는 업종전문화의 후속조처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학계 일부에서도 지금까지는 재벌이 ‘경영 다각화’를 통해 급성장해온 것은 사실이나 현단게에서는 전력이 분산돼 국제무대에서 전문기업에 뒤진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소니나 도요타처럼 스스로 초일류 전문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제 살을 떼어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런 맥락에서 회장제 폐지와 기획조정실 해체설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획조정실이 해체되다고 해서 재벌 총수에게 집중된 권력이 분산되는 것은 아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해체당할 이유도 없지만 정부가 억지로 해체시킨다 해도 효과는 없을 것이다. 어느 한 계열기업의 기획실을 강화해 그룹의 기획조정업무를 보게 하면 현재와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신민당 정책실 안평수 정책위원은 기획조정실 해체설과 관련 “회사의 경영방식에 대해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지만 가령 재벌이 기획조정실을 통해 부동산투기를 한 등의 부조리는 제도적으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은 이윤추구 집단이므로 법으로 규제되지 않은 일이라면 설사 부도덕한 돈벌이 행위일지라도 그것을 매도 할 수 없으므로 정부 여당은 정치적 손익계산을 떠나 금융실명제 실시 등 경제개혁 의지를 보이는 동시에 재벌의 부도덕한 상거래를 막을 수 있도록 관계 법률을 강화, 국민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재벌은 그동안 ‘회장 1인체제’ 아래서 팽창을 거듭해왔고 그것은 일종의 관성이 되어버렸다. 최고 결정권자인 소유주가 개별기업 위에 군림하고 있는 이상 선진국형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국민경제도연구원의 조원희 박사는 “현실적으로 재벌의 소유구조를 바꾸기는 어려우므로 소유집중을 통제하고 독과점 규제를 강화,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살아 남는 길을 찾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해체 구설수에 오른 재벌그룹의 기획조정실은 정부의 해체 대상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려야 할 한국 경제의 ‘돌연변이’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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