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방송된 납량특집 죽음의 바다 五大洋
  • 대전·정기수 기자 ()
  • 승인 1991.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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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추리·상상으로 ‘의혹 위한 의혹’ 보도… 배후세력의 타살 가능성 거의 없어

 한편의 미스터리극이 2주일째 재방송되고 있다. 추리극의 내용과 흐름은 4년 전의 그것에서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시청률은 가장 높다. ‘열쇠’로 지목된 사람이 자진축두하면 다른 사람이 또 ‘열쇠’가 되는 기묘한 ‘언론수사’에 모두 얼이 빠져 있다.

 그만큼 의혹이 많아서라고 해야겠지만 여기에는 언론의 상업주의가 적지않게 작용하고 있다. 사건 당시 벌써 정리된 여려 객관적 사실은 제쳐놓고 사건의 원점에서부터 출발, 온갖 추리와 상상력을 다시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이르게 된 자세한 정황증거는 생략한 채 “불과 4평의 천장 안에서 32구의 사체가 발견됐다”는 ‘불가사의’만 따로 떼놓고 논리를 전개함에 따라 의혹이 의혹을 낳는 식의 보도가 양산되고 있다. 따라서 4년 전의 ‘납량특집’을 재탕하는 내용이 되고만 것이다.

오대양의 진상은 동반자살
 그 객관적 정황이란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인데, 이를 토대로 재구성한 사건의 전말은 뭐가 뭔지 모를 미스터리에 대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오대양이란 회사 모임은 정상인이 아닌 광신도 집단이었다. 이것은 사건에 접근하는 대전제가 돼야 한다. 둘째 사건 1?2개월 전 이 집단은 사채상환 불능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사건 직전에는 채권자 폭행과 내부자 살해사건 등을 일으킴으로써 조직 노출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셋째 사망자들은 찜통 같은 용인공장 천장에 4일간 숨어 있는 동안 경찰·채권단·대전 지방언론 등으로부터 집중적인 추적을 받아 거의 극한상황에 처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집단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 아니다.

 넷째 일부 언론의 부분 인용과 달리 당시 부검에 관계한 의사들은 “교살과 자살로 추정한 법의학적 결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오대양의 진상은 동반자살이며 그들이 그런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이미 밝혀져 있다는 얘기다. 오대양 설립 이전부터 종말까지의 ‘확인된 사실’을 더듬어 보자.
 朴順子씨(87년 사망 당시 48세)는 80년 전후 서울에 본부가 있는 한 신흥종교의 대전교회 신자였다. 이 교회에서 배운 말세론 등의 교리와 수법을 가지고 박씨는 82년 10월 대전에서 ‘미양코리아’라는 수입상품 코너를 열어 사업을 시작했다.

 전국 각지의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체인점을 내주는 조건으로 사채를 끌어들였다. 제 날짜에 어김없이 지급한 월3푼의 높은 이자와 남편 이기정씨(58)가 충남도청 고위공무원(뒤에 건설국장으로 승진)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흡인력으로 작용했다.

 박씨는 83년 유아원과 학사를 건립, 장학사업가로 나섰다. 그러나 수용된 학생은 대부분 박씨에게 포섭된 주부들의 자녀였다. 외제 학용품과 생활용품, 퍼스널 컴퓨터까지 갖춰놓은 깨끗한 시설에 감탄하여 돈을 빌려주고 자녀도 맡긴 것이다.

 미양코리아는 84년 80여억원의 부도를 내고 문을 닫았다. 그러나 박씨는 곧 대전 지역사회에서 이미 명성을 얻은 사회사업가란 신분과 남편 이씨(당시 현직 장관과 6촌간)의 힘을 빌려 문제의 (주)오대양을 설립했다.

 화장대 문갑 등 민속공예품이 생산업종이었으나 사채를 얻어 쓰는 것이 본업이었다. 따라서 미양코리아처럼 파산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오대양은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모범기업’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공장과 숙사(사원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기숙사)의 깨끗한 시설을 돌아본 ㅇ지사(뒤에 내무부장관 역임)도 격찬해 마지 않았다. 다른 기관장이 잇달아 방문했음은 물론이다.

 생산활동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대양은 각종 경진대회와 전시회 등에서 상을 타는가 하면 새마을 우수업체로 뽑히고, 86·88공식민속공예품 생산업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86년에는 무선전화기 조립업체인 공영정밀도 계열사로 거느리게 됐다.

 새마을 본부장인 전경환씨도 이즈음 오대양을 몇차례 다녀갔는데 이 때문에 ‘권력층 개입’이란 의혹이 일기도 했다. 충남도경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한다. “의혹은 없다. 다만 사건 초기의 수사가 소극적이어서 지금까지 그 여파가 남아 있는 것이다.” 수사가 왜 소극적이었나 하는 것은 앞의 사실들이 잘 말해준다. 당시 웬만한 인사 가운데 이 ‘우수모범업체’에 발디뎌 보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대전 시내에서 오대양에 빚 안준 집이 없다는 말이 사건 직후 파다하게 나돌았다.

 박씨는 어느 시기 충남도지사 공관 개축공사 때 호화 장롱 등 가구류세트를 선물하는 등 비슷한 방법으로 고위층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했다. 이같은 예로 보아 1백억?3백억으로 막연히 추정되는 박씨의 사채 용처에는 권력층도 포함됐을 것이라고 채권단은 추측한다.

사채 대부분 ‘가족’생활비로 써
 그러나 경찰은 그런 유출이 일부 있더라도 86년말까지는 채권자가 원할 경우 즉시 현금으로 상환해주었으며 사건 몇 달 전까지 높은 이자(연간 원금의 30?50%)를 꼬박꼬박 지급한 사실, 그리고 이 사채가 회사운영비와 생산활동에 쓰여지지 않고 사원(신도)들, 유아원·학사 가족등 1백명 이상의 생활비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사채의 대부분이 자체 내에서 소진됐을 것으로 보고있다.

 박씨의 수하로 들어와 사채를 얻어오고 즉음에까지 이른 사람들은 학력이 낮고 그동안 다른곳에서 소외받아온 사람들이 많다. 살길이 어려운 이혼녀도 상당수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는 대전 모 방송에서 박씨의 사회사업 활동을 소개한 <참된 삶>이란 프로그램을 보고 감명받은 사람도 있었다.

 박씨는 이들에게 교주행세를 하진 않아 호칭은 ‘박사장님’이 었다. 다만 “오대양을 떠나면 재앙을 받는다”는 등의 교리 비슷한 것을 만들어 1주일에 한번씩 강론을 했다는 것이다.

 찬송이라고 할 수 있는 노래도 만들어 불렀는데 박씨의 두 아들(집단변사 때 사망)이 작곡한 것이었다. “눈을 뜨면 진실이 온다/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오대양/오대양…/우리가 태어나 뼈를 묻어야 할 천국 오대양…”과 같이 오대양이 ‘천국’이라고 세뇌 시키는 내용이다.

 박씨는 조직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생활 보장, 다른 한편으로는 계율을 어길 경우 가차없는 집단폭행이라는 양면적인 방법을 썻다. “비밀을 숨기면 심판받는다”고 강조, 매주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고 살아남은 신도들은 말한다.

 여기에서 계율을 어긴 사실이 지적되면 “죄를 씻어준다”며 수십명이 일제히 달려들어 구타하는 ‘집단구타 의식’을 치렀다는 것이다. 이탈조직원은 반드시 되잡아오도록 했으며 이탈을 꾀하는 가족들에게도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이번에 자수한 사람들의 폭행치사 사건도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경우다.

 남편 목숨보다 중요한 계율
 87년 7?8월, 6·29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때, 오대양에는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사채를 끌어 모으는 것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빚쟁이들이 몰려들었다. 총무 노순호씨(당시 33세)도 7천만원을 빌려준 친척으로부터 독촉을 받아 박씨에게 상환 의사를 물어보았다가 도리어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오대양이 잘못돼가고 있다고 판단한 노씨는 8월15일 부인 박명자씨(36·당시 경리사원)의 오빠 집이 있는 서울로 도망갔다. 그러나 부인도 빼내기 위해 대전으로 전화한 것이 화근이었다. “17일 오후 1시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부인 박씨가 ‘비밀을 가지면 심판 받는다’는 계율을 맹종, 박순자씨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만것이다.

 노씨는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집단변사 당시 다른 사람들을 교살하고 자신들은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 대전공장장 이경수씨(당시 45세)와 용인공장장 김길환씨(당시 39세)에게 붙잡혀 대전으로 ‘압송’돼 집단 폭행을 당한 뒤 19일 밤 숨져 암매장 됐다.

 노씨를 죽인 박씨 등 오대양 사람들은 4일 전인 15일, 그러니까 노씨가 도망간 그날에 사실은 집단잠적·집단변사의 좀더 직접적인 원인이 된 폭행사건을 하나 일으키고 있었다. 돈을 받으러 왔던 이상배씨(55) 부부를 이번에 자수한 김도현씨 등 사원들이 무수히 구타한 것이다.

 “돈을 안 받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난 이씨는 경찰에 즉각 고소했다. 경찰은 22일 김씨등을 불러 노씨가 살해된 사실을 모른 채 이씨 폭행에 대해서만 수사를 한 뒤 이들을 구속했다. 김씨 등은 감옥에서 9일 뒤에 일어난 집단변사 사건을 듣게 됐으며 3개월 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경찰 조사결과 이들은 한동안 공동생활을 해오며 숨어살다 자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순자에게 속은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라는 이들의 자수동기가 의심받고 있으나 자진출두한 박명자씨나 박용택씨(38·박순자씨 이복동생)는 “오대양의 교리를 모르면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조직폭력배나 상습적인 범죄꾼들이 아니라 집단구타라는 특수한 의식을 가진 광신도집단에 속한 사람들이었고, 최근까지도 채권자들의 빚독촉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노씨 폭행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 것은 15일을 전후해 이상배씨 등 채권자·내부자 대상 집단폭행이 날마다 행해진 데 따른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김씨 등이 경찰에 불려간 8월22일, “오대양 사람들이 채권자를 때려 구속되고 박순자도 수배 됐다더라”는 소식이 알려지자 대전 시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8월24일 박순자씨는 경찰에 자진출두했다.

 조사를 받던 박씨는 텔레비전 카메라가 들이닥치자 그 자리에서 졸도, 대전성모병원으로 옮겨졌다. 도청 국장 부인이자 저명한 사회사업가로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사회적 매장의 위기에 처한 박씨는 병원을 탈출, 학사 유아원 숙사 등을 돌려 전가족에게 “용인공장으로 피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박씨는 다음 날인 25일 오후 4시경 남편을 제외한 가족들과 함께 맨 먼저 용인공장에 도착했다. 공장장 김길환씨와 이경수씨가 천장 바닥 보수작업을 마치고 있었다. 곧이어 숙사 여사원(신도) 12명이 왔다.

 이날밤 나머지 사원들과 학교를 마치고 오자마자 출발한 학사 학생들, 그리고 유아원 어린이등 70여명이 봉고차와 택시를 이용해 잇달아 도착했다. 박씨는 학생·어린이들에게 “나쁜 사람들이 오니 정신차리고 있어야 한다”며 공장 샘플실에 숨어 있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딸과 사원들 중 사채를 많이 끌어온 사람을 일일이 지명, 밤12시경 천장으로 올라갔다. 남자 4명과 여자 28명, 모도 32명이었다. 천장안은 찜통이었다. 대소변 처리를 위한 플라스틱통 2개와 비닐봉지 10개를 준비하고 식사는 밑에서 올려보내는 주먹밥을 먹기로 했다.

포위망 좁혀들자 죽음 준비
 한편 대전 시내는 박씨와 신도들이 일시에 잠적해버리자 발칵 뒤집혔다. 채권자들이 오대양에 속속 모여들었다. 26일 박씨의 남편 이기정씨는 도청에 휴가원을 내고 박씨등을 찾아 용인공장으로 왔다.

 그러나 주먹밥 시중을 들고 있던 김영자씨(44) 등 5명의 여사원들은 끝내 함구했다. 이씨가 나타나자 천장과 김씨 사이의 대화는 쪽지나 의성어 등으로 바뀌었다. “숨지 말고 사장님만 내려와 해결에 나서면 좋겠다”는 쪽지가 올라가기도 했고 “밥이 쉬니 주먹밥을 조금만 보내라”는 등의 쪽지가 내려오기도 했다.

 긴급 결성된 채권단은 27일 도청에서 “내돈 찾아달라”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과 대전일보 가자들도 용인으로 향했다. 충남도경 형사대는 28일 샘플실에서 공포에 떨며 숨어 있던 학생등 49명을 구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천장 사람들은 찾아내지 못했다.

 용인으로 몰려온 채권단까지 가세했다. 수시로 바깥 상황을 쪽지로 보고받던 천장 사람들은 이때 포위망이 시시각각 좁혀지고 있다고 판단, 죽음을 준바하고 있었다. 추적자들이 일단 물러간 이날 밤 천장에서는 이불보와 노끈을 올려보내라는 전갈이 내려왔다. 김씨와 함께 밖에 있던 정화진씨(45·여)가 그것을 들여보냈다.

 8월29일 오전 11시경 김영자씨는 한 남자(이경수씨)는 목매달아 죽어 있었고 나머지는 겹겹이 포개진 채 숨져 있는 참혹한 현장을 발견했다. 현장에는 “이미 의식이 없으시다. 4명 정도가 갔다” “삼우도 지금 무척 고통을 받고 있다”는 등 옆 사름의 죽음을 지켜보며 적은 듯한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집단폭행→확인교살→자살
 현장에는 또 판피린 계열 약병이 있었고 “사장님이 독약을 가지고 들어왔다”는 내용의 쪽지, 그리고 부검 결과 이경수씨를 제외한 31명의 위에서 ‘항히스타민’제 성분이 검출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죽기 전 모두 가사상태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찜통 안에서 거의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이들은 이미 탈진한 상태였다. 부검 결과 이들의 위는 모두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김영자씨는 전날 밤 “구타하는 소리와 여자들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부검결과 박순자씨 등 여러 사람의 몸에서는 죽기 전 구타당한 흔적이 발견됐다. 경찰은 이에 따라 예의 집단폭행이 벌어진 뒤 약을 먹고 정신이 가물가물해져가던 사람들이 이씨등이 ‘확인교살’한 것으로 보고있다.

 황적준 박사 등 부검의들이 내린 법의학적인 추정은 “29명은 교살, 3명은 자살”이다. 남은 숙제가 있다면 이 3명의 자살여부이다. 즉 앞의 ‘오대양 전말’ 시나리오를 완결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이 부분이 좀도 분명해진다면 “배후세력에 의한 타살”등 의혹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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