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世家의 결단이 절실하다
  • 박권상 (편집고문) ()
  • 승인 1991.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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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력이 안돼서 도저히 못할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민당의 서울 출신 한 초선의원과 민자당의 경남 출신 중진의원의 약속이나 한 듯이 내뱉은 고백이다. ‘능력’은 선거자금 조달능력을 뜻한다.

 광역의회 선거 뒤 의원들간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이처럼 선거자금 공포증이 팽배해 있으며, 심지어 출마포기를 결심하거나 심각히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지역구에서 광역후보가 4억5천만원을 쓰고도 떨어졌다. 총선에서는 아무리 야당이지만 2배를 써야 할 것 같은데 도저히 타산이 안선다. 원내투쟁도 한계를 느끼고…. 그만할 생각이다.”

 “여당의원으로서 첫 선거를 치르다 보니 과거 야당시절에 어떻게 이겼는지 스스로 놀랐을 정도로 조직이 강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을 쓰지 않으면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광역후보만도 못하다는 소리를 안들으려면 20억 이상은 들여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국회의원 선거구의 3분의 1 정도인 광역선거에서조차 후보따라 많게는 20억, 평균 4억?5억원씩 쓴 것으로 알려진 ‘돈선거’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선거판에서는 집안의 숟가락까지 팔아야 한다는 현실에 이들로서는 가슴이 막히는 것이다.

이나라 금권정치는 최악의 경지에 도달
 이상은 광역선거 후 <한겨레신문>(7월12일)에 실린 여야 어느 두 의원의 처참한 소감이다. 실제로 신민당의 李?九의원은 돈 때문에 정치인 못하겠다고 국회의원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이쯤 되면 이나라 金權政治는 최악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다는 느낌이고, 금권정치를 발본색원하는 ‘구국의 결단’ 없이는 이땅의 민주정치는 구제불능의 늪속에 빠져들 것이다. 구체적으로 금권정치가 무엇인가. 금권정치는 쉽게 말해 ①정치에 엄청난 돈이 들고 ②정치로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하고 ③결국 돈이 정치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선거비용이 회를 거듭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무보수 명예직인 지방의회 선거에서 ‘5당4락’이니 ‘10당7락’이니 하는 소리가 스스럼 없이 나오고 국회의원 선거에는 20억을 써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당선되면 당연히 밑천을 뽑아야겠고 또한 다음 선거를 대비해서 선거기반을 다져야 한다. 돈봉투 들고 관혼상제에 찾아다녀야 하고, 명절마다 ‘인사치레’해야 하고, 선거구 유지들을 관광여행시키고, 이권을 알선하는 등 서비스 경쟁에 열중하여야 한다. 이 돈이 어디서 다 나오는가. 결국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 점잫게 표현해서 자금조달 능력이다. “능력이 안돼서 못할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봐도…”라는 어느 의원의 한숨소리는 바로 돈버는 재주가 없어 국회의원 못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 막대한 돈을 어디서 조달하는가. 결국 돈많은 사람이나 기업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들도 내력없이 돈댈 까닭이 없다. 당연히 돈대는 데 대한 代價를 챙길 수밖에 없다. 당연히 돈이 오는 데서 명령이 온다는 것은 정치세계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지 않은가. ‘돈이 정치를 움직이게 된다’는 데 금권정정치의 본질이 있다. 평등의 원칙 아래 누구나 후보자가 되고 올바른 정책을 펴고 능력을 인정받으면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이 되어야겠는데, 금권정치에서는 ‘돈을 위한 돈에 의한 돈의 정치’로 타락하고 만다. 선거는 일반 국민과는 관계없는 순전히 ‘졸부들의 대행진’으로 전락한다. 민주주의는 빚을 잃고, 정치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민평등의 ‘보통선거’는 빚좋은 개살구가 되고 말 것이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채택해야 타락 막는다.
 여기서 대한 대안은 1인1구의 소선거제를 없애는 것, 그대신 市 · 道 단위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채택하는 것이다. 좁은 선거구에서 한사람을 당선시키는 데 몇사람이 나서 박터지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령 시 · 도 단위의정당별 입후보자 리스트를 내놓고 일괄투표를 하는 것이다. 정당의 정강 정책 및 공신력을 종합평가해서 투표하는 것이다. 유럽대륙에서 거의 모든 나라가 채택한 제도다. 여기서 개개인 후보자는 원천적으로 돈 쓸 필요가 없고, 정당별 선거운동 비용은 국고에서 지출하면 된다. 이제도하에선 입후보자 개개인이 표를 구걸하고 표밭을 가꿀 필요도 없다. 따라서 돈이 표를 사고 파는 금권선거가 있을 필요가 없고, 선거구마다 죽기 아니면 살기의 싸움판이 벌어지지도 않는다. 시 ·도 단위 정당명부식으로 선거를 치를 때 투표율에 따라 의석이 확보되므로 어느 한 당이 어느 한 지역을 휩쓰는 그런 폐단은 이 제도에 일거에 없어진다. 호남에서 여당이, 영남에서 야당이 소수파로 진출할 여지가 확보된다. 그러나 선거에 자신있는 현역의원들은 이 제도에 반대한다. 이제 진정으로 큰 정치를 생각해야 한다.

 경세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하고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한다. 지금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경세가들의 결단만이 금권선거의 폐습을 근절시킬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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