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계 침투한 감시 · 밀고 버릇
  • 최일남 (소설가 · 본지 칼럼니스트) ()
  • 승인 1991.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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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날 조간신문에 난 3단 크기의 사진 한 장은 보기에 매우 흐뭇했다. 농촌활동을 마치고 떠나는 대학생에게, 그 마을의 여든살 할머니가 헤어지기 섭섭하다며 천원짜리 지폐를 건네는 장면이었다. 손자뻘도 안되는 ‘어린 학생’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고, 할머니는 무어라고 당부하는 듯한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만한 노인네의 이별사와 덕담을 상상하지 못할 건 없다. 길을 떠나는 예전의 아들 손자에게 하던 모양과 심정적으로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꼬깃꼬깃 간수해두었던 종이돈을 억지로 쥐어주며 하던 말 까지도.

 “가다가 시장하거들랑 김밥이나 삶은 계란으로 요기를 해라. 끼니 거르면 안된다. 잉?”
 실지로 이러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이제 김밥과 삶은 계란으로 여행중에 허기를 때우는 일도 드물다. 하지만 그말이 그말 아닌가.

1천원 지폐의 인정과 ‘편향된 의식화운동’
 같은 날 다른 석간신문이 보도한 어떤 교육청 지시는 딴판이었다. 농활이 일손돕기 명분을 내세우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목박았다. 그 교육청은 “운동권 학생들이 농촌을 혁명기지화하고 농민이 자신들의 주장에 동조, 체제운동에 나서도록 하는 활동”이라고 단정했다. 농민들뿐만 아니라, 중고교생들을 상대로 “편향된 의식화활동 등 불건전한 활동을 할 것이 예상된다”며, 그들은 감시 · 보고하라는 공문을 각 학교에 보냈다.

 일정시대 이래 한국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농활의 독특산 성격이라든가 경향을 분석할 여유는 지금 없다. 다만 확인되는 것은 교육계에마저 침투한 감시 · 밀고의 고약한 버릇이다. 그걸 조장하는 교육시책은 어느덧  경찰기능까지 맡은 셈인지 한심하다. 가장 도덕적이어야 할 학교에서, 그리고 믿음에 바탕을 둔 귄위 없이는 존재 의의가 훼손되고 결딴날 교단에서, 그런 짓을 부추기는 행위는 어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지난달이었다. 한 중학교 교장은 학생회 간부들을 모아놓고 문제교사를 신고하도록 종용했다. 국민학교 때부터 배워온 것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하거나 그런 표현은 쓰지 않다라도 공부가 제일이 아니므로 쉬면서 하라는 교사, 모르는 노래를 그르쳐주는 교사 등을 적어내라고 일렀다. 아이들이 머뭇거리자 “학생은 정직하고 솔직해야 하며 학생들이 말을 하지 않고 나중에 이런 선생들이 밝혀지면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동아일보 6월21일자).

 이런 예를 들기로 하면 한이 없다. 형사가 학생들의 공책을 복사해간 후, 교과과정 이외의 내용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각서를 쓰게 한 일도 있다. 학교당국은 수업권 침해를 내세우는 대신 경찰의 요구를 중간에서 충실히 수행하는 데 그쳤다. 전교조 문제가 한창 시끄러울 때, 장학사나 일부 교장이 합세하여 가입교사와 가족을 이간질시키려던 예는 너무 흔하다. ‘미운 부부교사’ 중 어느 한쪽을 외딴섬으로 발령,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경우도 있다.

보고도 못본 척하는 어른스러움을
 교육현장에서 들려오는 부도덕 사례 가운데서도 제일 치사한건 현직교사의 해직교사 후원활동 제지였다. 정원식 장관 시절의 문교부는, 89년 12월 하순 ‘교원노조 모금 및 지원활동 불용’이란 공문을 전국 학교에 일제히 띄웠다. 공문속에는 생계유지가 곤란한 해직교원들을 지원하다는 ‘미명 아래…’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게 ‘미명 아래’였을까.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기로, 정권 차원의 전교조 박살내기가 아무리 다급하기로, 그것은 반인륜적이고 반교육적이었다. 쪽박까지 깨겠다는 지시는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동료간에 나누는 최소한의 인간적 정리까지 끊는 교육정책은, 정책 이전의 옹졸하기 짝이 없는 증오로 비친다. 증오가 교육이냐. 자기 돈 축내는 것도 아니겠다, 차라리 보고도 못본 척하는 어른스러움이야 말로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의 발로이자 仁之端이며, 교육윤리의 기본이어서 마땅하다.

 역시 교육자는 다르구나, 어디가 달라도 다르길래 저렇게 뜨거운 동료애를 발휘하는 구나 싶었던 ,국외자의 부러움조차 차단하는 냉혈이었다. 해직자의 아픔을 당신들은 알 리가 없다. 편안한 게 쓴 短文章의 공문 한 장에, 얼마나 많은 관계자와 가족을이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가를 아느냐고 묻지 않겠다만, 그러면 못쓴다. 교육이란 두 글자가 아깝고 부끄럽다.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다. 태안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은 기막히다. 폭행과 수모를 당한 끝에 강요된 각서를 쓰고 공포의 야반도주를 하게 만든 과정에서, 스승의 자리는 황량하다. 그렇게 기민하던 법집행과 교육당국의 대처는 수수방관으로 멀찌막이 떨어져 있다. 시비곡직을 따지는 방법이 그래서는 안된다다는 처지에서, 외대사건을 다루던 잣대는 이번 일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야 균형이 맞다.

 자고 새면 별의별 괴변들이 속출하는 시대의 복판에서 교육계인들 온전하랴. 그러나 지켜야 한다. 참도덕의 가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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