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되는 미 ‘용산합중국’
  • 글.변창섭 기자 사진.이상철기자 ()
  • 승인 1991.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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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8군기지, 학교 등 시설 갖춘 서울 속 ‘미국도시’ …97년까지 오산 ·평택으로 이전

용산의 미8군(사령관 ·로버트 리스카시 대장) 취재는 북경주재 외국특파원의 취재활동만큼이나 힘들다. 사전에 취재허가를 얻어야 하는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일거수 일투족 에스코트 요원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 또 지정된 취재사항 외에 어떠한 ‘한눈팔기’도 허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허가받지 않은’ 민간인에게는 말조차 걸 수 없다. 오로지 사전에 조정된 스케줄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군부대라는 특수사정을 감안하더라도 8군은 어느샌가 한국의 취재진에 대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다. 한국언론에 비쳐지는 8군모습에 그만큼 신경이 예민해서일까, 아니면 변화하는 한 ·미관계에 대한 조바심 때문일까.

카투사로 근무하다 지난 85년 제대한 회사원 ㅂ씨는 83년 6월 난생 처음 용산 ‘8군땅’을 밟았을 때의 인상을 아직도 지울 수 없다. 논산에서 6주간 기본훈련을 받고 평택 카투사교육대에서 2주간 미군부대 적응교육을 마친 후 용산 모부대에 배치받은 그는 이튿날이 마침 부대 피크닉날이라 모처럼 셔틀버스를 타고 영내 전지역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정말이지 군대인지 사회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 군부대에서는 볼 수 없는 각종 편의시설이 많고, 민간인들은 왜 그리 많은지 정말 어리둥절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의 첫 인상은 그런대로 이 거대한 ‘용산합중국’의 한 부분을 꿰뚫어보고 있다. 적어도 외적으로 볼 때 미8군 영내는 마치 미국의 한 도시를 옮겨다놓았을 정도로 갖가지 편의시설을 갖춘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룬다. 학교가 있고 병원이 있다. 시원스레 뻗은 신작로 사이로 즐비하게 늘어선 가로수며 곳곳에 펼쳐진 녹지공간은 인구와 매연, 교통지옥에 시달리는 ‘서울공화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한폭의 풍경화를 보여준다. 그래서 일부 한국사람들은 이 ‘용산합중국’에 대해 막연한 신비감을 갖기도 하고 때론 볼상 사나운 꼴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런 광경이 요즘도 연출되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용산 미8군의 정문격이라 할 수 있는 5번문(Gate 5)이다. 7년째 이곳에서 근무한다는 한국인 경비원은 “요즘 외부출입객 중 젊은 여자만 보면 화가 치밀어오른다”고 말했다. 1백50명분의 출입증 한도의 배가 넘는 3백~4백명이 몰려 바쁜 탓도 있겠지만, 주한미군규정 190-7에 따라 출입증을 내주기 앞서 출입객의 주소를 기록하다보면 서울 압구정동 대치동 서초동 등 이른바 ‘부촌’에 사는 젊은 여성들 숫자가 갈수록 물어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개방 풍조시대라고 하지만 영어 좀 배우겠다고 미군을 졸졸 따라다니는 꼴은 정말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그는 한탄한다.

주말 심야의 5번문 앞 도로는 미군사병의 놀이판으로 변한 지 오래다. 술에 만취한 미군사병이 초소 앞에 오줌을 누는가 하면, 주말 새벽에는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아슬아슬한  옷차림의 ‘양공주’가 나무 뒤나 담벼락에서 미군과 ‘그짓’하는 광경도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 초소에서 근무하는 한 의경은 “이 지역을 마치 제나라 안방인 듯 착각하고 있다”며 “하루에도 수십번씩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한다”고 털어놓는다.

“미국 여느 도시와 똑같다”
사실 용산지역이 미국의 ‘안방’격이자 하와이에 이은 ‘51번째 주’라는 느낌을 갖는 것은 일부 미군사병의 이같은 ‘치외법권적 행동’ 때문만은 아니다. 그같은 느낌은 기지 담벼락에 붙은 ‘미국정부재산’ 운운의 경고판에서, 또 8군당국이 영내의 모든 주요 도로에 ‘8군路’ ‘베이트街’ ‘유엔로’ ‘잭슨가’ 등 40여개의 미국식 거리명을 붙여 놓은 데서도 나타난다. 영내 곳곳의 성조지와 <USA투데이>판매대며 버거 킹이나 피자헛 등의 패스트푸드점이나 간단히 군것질할 수 있는 도그하우스점의 모습도 8군 영내를 처음 들어오는 사람에게 강력한 ‘양키냄새’를 풍겨준다. 서울외국인학교에 다니는 벤 워필드군(14)은 “용산기지는 미국의 여느 도시와 똑같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남산 남쪽 기슭에서 시작해 이태원 삼각지를 거쳐 한강에 이르는 약 6백35에이커(약 85만평)의 방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용산 미8군은 글자 그대로 ‘용산합중국’이나 다름없다. 이 안에는 1천2백25동의 건물과 1천2백56채의 주택의 있으며 포장도로는 32.6km에 이른다. 이곳에는 2천5백여명의 미군과 1천여명의 카투사가 근무하며, 1천여명의 미국 민간인과 6천여명의 한국 민간인들의 삶의 터전이다. 또한 수천명의 군 가족이 사우스포스트와 한남빌리지에 모여산다. 주한미군당국이 최근 밝힌 자료에 따르면 작년 한해 주한미군이 직간접비로 쓴 경비는 줄잡아 22억3천만달러에 이른다.

현재 용산지역은 원래 일제가 1910년부터 2차대전으로 패망한 1945년까지 조선군사령부로 썼던 자리다. 미군과 유엔군사령부가 용산의 현지역에 정식으로 사령부를 설치한 때는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52년이다. 이어 57년 7월 주한미군의 사령부가 설립됐고 이와 동시에 도쿄에 있던 유엔군사령부도 용산으로 본부를 옮기게 됐다.

52년 미군 ·유엔사령부 현지역에 설치
땅값만 해도 평당 1천만원을 호가하는 이 거대한 ‘용산합중국’은 3개 지역으로 나눠져 있다. 한미연합사와 8군본사 등 주한미군의 지휘부를 비롯 중요 군부대가 있는 메인포스트. 시원한 녹지공간 속의 주거지역과 커미서리(식품백화점) 학교 병원 사교클럽이 밀집해 있는 사우스포스트, 그리고 범죄수사대 501정보여단 카투사인사행정사령부가 있는 캠프 코이너가 그것이다.

약 20여개의 출입문을 통해 8군영내로 가기 위해서는 에스코트가 있어야 하고 차량이 있는 경우 이른바 ‘디켈’(차량출입증)이 필요하다. 디켈은 과거 8군 골프장의 회원권만큼이나 얻기가 어려워 한때 한국인 사이에 ‘신분의 상징’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디켈을 발급받으려면 미군대령 이상의 추천을 통해 헌병대의 신원조회를 거쳐야 한다. 주한미군당국은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디켈혜택을 받았는지에 대해 밝히려 하지 않고 있으나 ‘수혜자’ 가운데는 정계 재계 언론계 등 사회 지도급 인사도 포함돼 있다. 특히 언론사의 겨우 1사 1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국방부 출입기자 10여명을 포함, 언론사에는 모두 20장 정도가 배부됐다”고 밝히고 있다.

메인포스트의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왼쪽으로 보이는 게 일과 후 미군 ·카투사 사병 및 한국인 직원이 술을 마실 수 있는 메인포스트클럽이다. 이 자리엔 원래 영내 개봉관격인 용산 1극장이 있어 토요일 밤이면 ‘찐한 영화’를 즐기려는 카투사들로 만원을 이루던 곳이다.

현재 용산영내에는 메인포스트클럽을 비롯 대령급 이상만 출입하는 하텔하우스, 과거 ‘빽’있는 한국사람이 즐겨찾았다는 8군골프클럽과 장교클럽, 미대사관 직원들이 주로 이용하는 엠버시클럽 등 여러개의 사교클럽이 있다. 이 가운데 지금은 스포츠맨스클럽으로 개칭, 일반인도 들어갈 수 잇는 8군골프클럽이 특기할 만하다. 과거 이곳을 출입한 경험이 있는 한 관계자는 “남의 눈을 피할 수 있고 나름대로 특권의식도 느낄 수 있어 과거 유정회 의원 등 여당 국회의원이 뻔질나게 들락거렸다”고 회고했다. 그는 특히 “전 국무총리였던 ㅈ씨는 집이 남산에 있어 아침이면 이곳에서 식사하고 틈나는 대로 골프장을 이용, 아예 정치 자체를 8군서 할 정도였다”고 혀를 내둘렀다.

미군사교클럽의 경우 음식값이 저렴하다는 이점은 있지만 음식 자체는 요즘은 시중식당에서도 충분히 맛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군시설 내의 미군식당을 이용하는 한국인이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 특히 서울 서대문 경기대 입구의 서울하우스도 ‘빽’있는 한국인이 즐겨찾는 곳 중의 하나다. 이 식당은 오산 미 제7공군사령부 직속이라 사령관의 재가가 필요한 멤버십 따기가 어려워 이를 소지한 일부 한국인들이 그만큼 ‘특권의식’을 느끼는 곳이다. 10년 이상 이곳에 근무했다는 한 종업원은 “요즘도 퇴역장성이나 중소기업인이 즐겨찾는다”며 “아마도 멤버십 때문에 남다른 특권의식을 갖는 것 같다”고 꼬집는다.

메인포스트클럽 바로 옆 건물에는 20레인이나 되는 최신식 시설의 볼링장이 있고 건너편엔 탁구장 당구장 등 오락시설을 갖춘 2층의 모이어 렉 센터가 있다. 한 카투사는 “특히 이곳은 여자친구를 데리고 한번쯤 찾을 정도로 카투사 사이에 인기가 좋다”고 귀띔한다.

5번문을 따라 쭉 들어가다보면 금세 눈이 띄는 곳이 8군도서관이다. 장서 13만2천권인 이 도서관의 강점은 2백여종이 넘는 영문잡지를 비롯, 6백24종에 이르는 각종 정기간행물과 53종의 일간 영자지를 구독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도서관 뒤쪽으로는 교육센터가 있어 메릴랜드대(4년제)를 비롯, 센트럴텍사스대(2년제) 오클라호마대(석사과정)를 포함, 5개의 미국대학 분교가 설치되어 있다. 한국학생도 이른바 ‘국제학생입학’의 기준에 따라 일정점수(보통 4백50~5백점)의 토플점수를 받으면 입학이 가능하다. 메릴랜드대에 다닌다는 키슬브랙 병장은 ‘더러 한국학생들을 본 적이 있다“면서 ”미군사병의 겨우 정부가 60% 이상을 보조해주기 때문에 맘만 먹으면 언제든 이용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들 영내분교는 과거 일부 부유층 자녀들이 ’과시용‘으로 다니기도 했는데 정계인물인 ㄱ씨도 한때 이곳을 출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메인포스트 내의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빨간 벽돌건물로 된 2층짜리 5개 건물이다. 8군본사와 여타 참모부 건물이 모여 있다. 원래 이 건물들은 일제시대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자리로 한 관계자에 따르면 “외벽이 아주 든든해 미군당국이 내부만 수리해 쓰고 있다”고 설명한다.

8군 본사건물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것이 연병장(나이트 필드)이 있는 한미연합사 건물이다. ‘평화수호의 보루’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 새겨진 기념비가 있는 이 건물은 10월 하순 개관을 목표로 6월초부터 대대적인 내부 수리공사에 들어갔다. 마치 지상구성군 사령관을 곧 한국장성으로 보임하는 등 변화하는 연합사의 위상을 상징한다고나 할까.

식품백화점. 하루 최고 판매액 18만달러
메인포스트에서 눈길을 떼기 힘든 곳이 하나 있는데 이는 다름아닌 용산 2극장이다. 국내 영화관보다 보통 1~2개원 빨리 외화를 상영하므로 공짜로 보는 카투사에겐 가장 인기가 좋은 곳이다. 객석 3백여의 이 극장은 일단 유료입장객을 받고 남은 좌석에 한해 카투사를 입장시키기 때문에 인기 있는 프로일 경우 카투사간에 줄서기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용산 미8군을 ‘미국도시’로 착각하게 만드는 곳은 아무래도 사우스포스트의 각종 편의시설을 꼽지 않을 수 없다. 5번문 건너편 10번문으로 통하는 사우스포스트는 주거 밀집지역이기도 하지만 하텔하우스 등 각종 사교클럽은 물론 121 후송병원. 국민학교와 중학교, 널따란 잔디구장과 체육관 등 많은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사우스포스트로 통하는 10번문을 들어서 첫눈에 띄는 건물이 지난 89년 3천만달러를 들여 완공한 9층짜리 드래곤 힐 군인숙소다.

88년 5천5백만달러를 들여 완공한 용산 커미서리는 열대식품인 파인애플에서 애완용 식품에 이르기까지 약 8천여가지를 판매하고 있다. 지배인인 스토브너씨에 따르면 “이곳과 한남빌리지 등 모두 7곳에 커미서리가 있는데 한달 손님은 줄잡아 10만명이 넘는다”고 설명한다. 계산대의 관계자에 따르면 “하루 판매액이 최고 18만달러에 이를 때도 있다”고 한다. 구매한도액을 정한 이유는 물론 미제식료품의 불법유출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곳서 만난 한 한국인 짐꾼의 “이대로 나가다간 해태니 롯데니 모두 망할 겁니다”라는 뼈있는 한마디는 식품의 불법유출이 여전히 이뤄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커미서리쪽으로 가는 길에 넓은 초원이 펼쳐지는데 이곳이 바로 10만여평 규모의 문제의 8군골프장이다. 18홀 규모의 이 골프장은 기지이전에 따라 지금은 폐쇄됐으나 퍼팅연습장은 아직도 일부 한국인들이 이용하고 있다. 얼마전까지도 차량출입증과 함께 신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골프회원권은 한미연합사 소속의 장성과 한미친선협회 회원을 포함, 약 70여명의 한국인에게 주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용산합중국’을 소개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이곳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이다. 주한미군이 최근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전국 미군기지의 한국인 근로자 총수는 1만9천5백98명으로 이에 따른 인건비는 직간접비를 포함해 작년에 10억5천6백만달러가 지출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이 규모는 웬만한 재벌에 버금가는 고용인원이다. 이들은 단순노무직에서 미사일정비 및 컴퓨터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근 2백40여 직종에 근무하고 있는데 주한미군노조가 밝힌 노조원은 대략 1만8천명이다.

미8군 용산시대의 마감이 눈에 보이게 되면서 남영동이나 이태원의 국제결혼 알선처도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남미이주공사 이태원지사의 이원근씨는 “수년 전만 해도 하루 한건씩은 있었는데 요즘은 한달에 고작 한 두건 정도”라고 말한다. 남영동에서 미군과 한국여성의 결혼 수속업무에만 10년넘게 종사했다는 50대 남자는 “가장 큰 원인은 우리의 생활수준이 그만큼 향상된 것”이라며 “국가적으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고 덧붙인다.

시민공원 조성 세부계획 마련돼
거간 미8군 용산지역은 우리 땅이면서도 곁눈질로 쳐다봐야 했고 군사지역이기 때문에 3층 이상 건물도 지을 수 없었다. 그뿐인가. 8군을 관통해 서울역과 연결돼야 할 동작대교는 허리가 끊긴 채 벌써 7년째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계획이 구체화되면서 용산 제모습찾기의 작업은 이미 착수됐다. 서울시는 이곳을 대대적인 시민공원으로 조성키로 확정하고 세부계획까지 마련해놓고 있다.

지난 4일 연합사 연병장 주위에는 영내 미군 민간인과 군속 등 많은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예년처럼 연병장에서 예포도 쏘고 성대한 퍼레이드도 있는 독립기념일 행사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행사는 예포 50발만 쏜 채 불과 수분만에 끝났다. 한 중년부인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의아해 했다. 식전담당책임자였던 데카트 주임상사는 “나 자신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한 ·미관계의 미묘한 변화를 보여준 상징이 아니냐는 물음에 그의 대답은 “아마…”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제 근대 한 ·미관계사의 숱한 굴곡을 지나온 미8군 용산시대는 빠르면 97년에 마감된다. 지난 52년 미군당국이 용산에 미군본부를 세운 후로부터 꼭 45년, 일제가 맨처음 강점했던 1906년부터 따지면 근 90년만에 용산은 우리의 ‘주권’에 넘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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