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품 벗어나 아시아로 가자”
  • 멜버른·김삼오(신문방송학 박사·호주 국립한국학연 ()
  • 승인 1992.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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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경제 活路 찾으려 ‘공화국 수립’ 논쟁…키팅 수상도 공개적으로 동조



 호주는 각급 관공서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화를 걸고 있다. 이민자가 시민권을 받을 때는 그 앞에서 선서한다. 각종 공식 연회에서 사람들은 ‘여왕을 위하여’라고 외치면서 건배한다.

 물론 여왕은 상징일 뿐 통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존재에 대해 역사의 아이러니일뿐이므로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화주의자와, 호주인의 뿌리는 영국이므로 현 체제를 옹호해야 한다는 군주제 지지자들 간의 논쟁이 꽤 오래 계속되어왔다.

 호주를 포함한 여러 국가가 영연방이라는 특수한 체제를 형성했다. 그러나 요즘 호주에서는 공화주의 운동바람이 어느 때보다 거세며, 이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몇 개월 전 수상이 된 폴 키팅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 호주가 아시아와 손을 잡고 그쪽을 더 진출해야 한다고 실리론을 펴는 점도 새롭게 느껴지다. 즉 요즘 호주의 공화주의(탈영국) 논쟁은 호주의 새로운 아시아정책과 맞물리는 것이다.

 키팅은 벌써 몇차례에 걸쳐, 영국과의 전통적 유대를 재평가해야 하며 호주가 아시아권으로 통합돼야 하다고 역설했다. 최근 발언은 5월4일 일본 도요타의 한 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는 “경제적으로는 아시아에 더 가깝고 대외적으로는 더 독립적인 호주”를 되풀이했다. 그는 심지어 영국기가 한쪽에 그대로 담긴 호주 국기를 바꾸자고 제의해 일부 국민으로부터 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호주 총수출의 절반 아시아로

 키팅 수상의 발언에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다. 요즘 호주 불경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10% 이상의 실업률이 잘 대변해준다. 1백만명이 실업자수당에 의지하여 살구 있다. 정치인에 대한 국민, 특히 젋은층의 불신과 불만은 대단하다. 청소년 실업률은 40%쯤으로 추산된다. 그러니 자연히 “우리에게 영국이 무엇이냐” “우리는 우리다”와 같은 감정이 일고있는 것이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플린더스 대학의 제프리 파팅턴 교수는 키팅의 새 정책을 “전임자에 도전해서 지난 12월 수상직에 오른 키팅이 경제·정치 분야에 아무런 개선이 없자 새로운 돌파구로서 나온 것‘이라고 혹평한다. 키팅은 이 탈영국논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애국적이고 적극적인 것으로 만들려 한다는 것이다.

 키팅이 속한 노동당은 전통적으로 공화정을 찬성하기는 하나 지난 몇 년 동안 이 문제를 크게 들먹이지는 않았다. 금년 말에 있을 총선을 앞두고 키팅과 노동당이 초조해하는 증거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영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지는 아직도 논란의 단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노년층은 아직도 ‘우리는 영국인’이라고 생각한다. 왕정 지지자들은 여왕이 정당정치와 잡다한 이해관계를 초월한 국민 결속의 구심점이라는 사실을 내세운다.

 지난 3월 실시한 모건 갤럽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49%가 현제도를 지지하고 44%가 공화제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한 1953년 당시 집계된 군주제 지지율 77%에 비해서는 크게 낮아진 수치이다. 영국이 제2차대전에 참전했을 때 로버트 멘지스 호주 수상은 “영국이 참전했다. 그러므로 호주도 전쟁 상태로 들어갔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영연방에 속한 국가는 모두 영국 여왕을 국가원수로 모시지만 왕정을 폐지한다고 해서 반드시 연방 탈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50개 독립국과 25개 領(세계영토와 인구의 4분의1쯤에 해당)으로 구성된 영연방 회원국은 과거 대영제국과의 인연에 따라 정치·경제적 결속을 약속한 것뿐이다. 회원국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공화정 체제로 돌아섰다. 이들 가운데 영국 왕을 국가원수로 삼는 나라는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이고 싱가포르 나이제리아 스리랑카는 영국왕을 국가원수로 삼지 않는 공화국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영연방에는 속해 있다.

 영국으로부터 벗어나 아시아권으로 통합하자는 주장은 호주 특유의 앵글로색슨문화 우월주의에 대한 재검토라고도 할 수 있다. 이같은 주장이 실리외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지난 몇 주 동안 호주언론은 이 문제를 크게 다루어왔다. 호주의 아시아 전환 정책은 이미 현실이다. 인구가 한국의 3분의 1을 조금 넘는 호주의 총수출액은 한국보다 조금 적다. 수출의 반을 가까운 아시아 지역에 보내고 있다. 90~91년 회계연도에 유럽공동시장과 미국에 대한 수출은 전년보다 줄었고 일본시장쪽은 늘었다.

 

한국어, 6대 주요 외국어로 떠올라

 호주의 주력인 관광산업의 주시장도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이다. 작년에는 호주에 가장 많은 이민자를 보낸 나라로 홍콩이 올라섰다. 과거에는 언제나 영국이 으뜸이었다. 현재 아시아계는 약 60만명으로 총인구의 3.5%를 차지하고 있으나 증가 추세이다.

 형제국인 영국은 국제무역에서 볼 때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 악랄한 경쟁자일 따름이다.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 호주 안보에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실패해 세계무역이 블록체제로 들어선다면 호주는 어디에 설 것인가. 이것이 키팅 수상의 걱정이다. 전임 봅 호크 수상이 제창해 지난 11월 서울에서 제3차 회의가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협의회(APEC)를 중심으로 아시아정책을 강화하려는 키팅의 속셈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호주에는 지금 아시아지역 언어를 배우려는 열기가 정부의 지원으로 뜨거워지고 있다. 아시아의 기업문화를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커가고 있다. 덕분에 한국어는 호주에서 6대 주요 외국어로 떠올랐다. 금년 호주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멜버른의 두 학교가 한국어 강좌를 개설했다. 일본어 공부열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약 6만5천명. 호주는 한국 다음으로 일본어 연구 붐이 크게 일고 있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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