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적 목소리로 ‘비틀린 시대’에 맞서
  • 편집국 ()
  • 승인 1990.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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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구현사제단이 걸어온 길/박종철군 사건부터 국가보안법 철페운동까지

개별적이면서 ‘필요할 때는 한목소리를 내는 집단’. 가입신청서가 따로 없어 정확한 전체규모도 헤아리기 어렵고 대표도 따로 없는 가톨릭 내의 비공식 임의단체인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하 사제단).

 그럼에도 사제단은 80년대 이땅의 군사독재에 항의하고 불의와 고문을 고발해온 가톨릭의 ‘현실참여’ 흐름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단체로 거론된다. 사제단의 이름이 일반국민들에게 널리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때부터. 이 사건 초기부터 고문이 내포한 비인간성과 시대적 징후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사제단의 4백여명 신부들은 고문추방과 민주화를 촉구하는 무기한 단식에 들어가 ‘행동하는 사제’의 모습을 보였다.

 나아가 사제단은, 그해 5월 명동성당에서 대표격인 김승훈신부를 통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은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국가권력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 사건의 범인조작에 관한 진실이 박종철군 고문살인 진상과 함께 명쾌하게 밝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과연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이 회복되느냐 않느냐는 결판이 날 것이다”라는 도덕적 경고와 함께 치안본부가 박종철군의 死因조작에 이어 범인조작으로 또다시 진실을 은폐했음을 밝히는 사제단의 성명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곧 4·3호헌조치로 잔뜩 얼어붙은 정국에 일대 회오리바람을, 진실에 목말라 있던 국민들에겐 가톨릭의 도덕적 용기에 대한 신뢰를, 야권에는 ‘군민운동본부’라는 결집체의 형성을 낳게 했던 것이다. 그 이후 사제단이라는 이름은 가톨릭의 ‘사회참여’의 대명사격으로 인식되고, 전두환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국민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사제단이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74년. ‘유신독재에 대한 대표적인 반대자’였던 지학순주교가 그해 7월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양심선언’ 을 이유로 당국에 연행되자 그를 따르던 사제들이 모여 이에 항의하는 ‘기도하는 전국사제단의 주장’을 발표했고, 이어 9월23일 3백여명의 사제들이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을 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사제단의 중심에 섰던 김승훈신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단지 지학순주교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무언가 해보려고 바둥거렸다”고 회고한 바 있다.

 계기는 이처럼 ‘소박한’ 것이었지만 사제단은 탄생 직후 발표한 ‘제1시국선언’에서 “교회는 기본권이 짓밟힐 때면, 언제, 어디서나 피해자나 가해자가 누구이든 그의 편에 서서 그를 거슬러 항변하고 저항하고 투쟁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는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그들의 관심이 지학순주교사건에만 머물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고, 잇따른 활동을 통해 그것을 입증했다. 김지하사건, 인혁당사건, 3 · 1 명동성당기도회사건, 전주교구 7 · 6사태, 오원춘사건 등 일련의 민감한 정치 · 사회적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입장을 밝히고 ‘현실문제’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 ‘서울의 봄’에 이은 정치적 암흑기에 사제단의 일부 신부들이 연행됨으로써 사제단의 공식활동은 오랜 ‘동면기’를 맞게된다. 그 동면기를 깨트린 것이 82년 3월에 일어난 미문화원방화사건. 사제단의 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원주교구 최기식신부가 방화사건의 주동자인 학생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구속되자 사제단은 “천주교 신부의 범인은닉 문제를 확대해석함으로써 사건의 본말을 전도시키고 의도적으로 천주교회를 음해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오랜 침묵에서 깨어난 사제단의 움직임이 박종철군 고문치사조작사건의 폭로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87년 12월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사제단은 민통련의 일원으로 특정 대통령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내외적인 비판을 받는 상처를 입기도 했다.

 70~80년대에 걸쳐 그때 그때 시대의 가장 예민한 문제와 부딪쳐온 사제단의 최근 관심사는 민족의 근원적인 비극인 ‘분단과 통일’ 문제로 모아지고 있는 듯하다. 사제단의 한 신부는 “남북한 동포의 화해가 없고서는 진정한 민주화나 평화도 없으므로 분단국가의 사제로서 통일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문규현신부 북한파견 및 지난해 9월 제44차 성체대회가 열릴 무렵의 신부 44명 파북계획을 계기로 표출된 분단과 통일에 대한 사제단의 관심은, 특히 올해의 대외적인 활동목표를 ‘겨례의 하나됨을 위하여’로 정한 데서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 사제단은 지난해 발족한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천주교공동위원회’(국보철 천공위)의 중심세력으로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

 그 지향점이나 활동내용이 사제로서는 ‘지나치게 정치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일부의 비판에 대해 사제단의 심부름꾼(총무) 남국현신부는 “이 시대의 징표를 깨닫고 사제로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려는 사제적인 소망에 근거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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