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神話’는 계속될 것인가
  • 서명숙·김당 기자 ()
  • 승인 1990.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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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 80년대 ‘민주화 聖地’로 敎勢급신장…최근 교회쇄신 둘러싸고 진통도

지난 4월27일 ‘KBS사태’와 관련, 박홍 서강대총장, 이효재 전 이화여대교수, 변형윤 서울대교수, 황인철변호사, 송월주스님, 김관석목사 등 ‘KBS지키기 시민모임’의 각계대표 6명은 김수환추기경을 만나 사태를 논의한 뒤, 명동성당내 서울대교구주교관회의실에서 공권력개입 자제 및 KBS사원들의 직장복귀 등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KBS사원들은 자신들의 의사가 국민들에게 충분히 전달됐으므로 방송제작에 복귀해야 한다”며 “정부도 어떤 이유로든 공권력 투입으로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이 성명 내용은 ‘대화와 양보를 통한 사태해결’을 요구하는, 어찌보면 양시 · 양비론에 입각한 지극히 평범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종교계를 포함한 각계 대표인사들이 명동성당에서 추기경을 찾아가 논의한 끝에 그런 발표를 했다는 사실은 오늘의 천주교의 위상, 나아가서는 김수환추기경의 한국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그러나 명동성당 구내에서는 이러한 일들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지난 4월24일 오후 6시께 명동성당 앞. 성당 입구에는 전투경찰들이 인간바리케이트를 친 채 성당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낱낱이 검문검색하면서 막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5m쯤 떨어진 성당쪽에는 그 물샐틈없는 봉쇄망을 뚫고 들어온 사람들이 1백명쯤 모여서 피킷과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교황도 인정한 노동조합 탄압 말라”, “천주교는 정의와 양심의 편에 동참하라”. 그 ‘시위대’는 한시간쯤 지나자 그날 집회의 하이라이트격인 ‘종교재판 제소 선언’을 결의했다. 경기도 부천 소명여교(교장 나정례수녀, 이사장 김수환추기경)에서 국어를 가르치다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지난 1월20일 직권면직당한 해직교사 양운신씨가 동료교사 4명을 대표해서 종교재판 제소를 선언하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우리는 묻고 싶다. 하느님의 법인 ‘양심의 법’에 따라 행동한 것이 과격한 사람들이라고 매도되어야 하는지를…. 오늘 이 자리에서 소명여고 해직교사들은 소명여고 재단과 책임수도원을 상대로 오는 4월말에 가톨릭교회내의 법원에 종교재판을 제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같은 행동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실정법이 우위에 서느냐, 하느님의 법인 양심의 법이 우위에 서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제기가 될 것입니다”

 명동성당 구내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위의 두가지 일(또는 사건)은 오늘날‘천주교와 김수환추기경을 둘러싼‘神話’와 함께 그 내부의 고민을 상징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가톨릭이 한국에서 얼마나 영향력있는 종교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객관적 준거는 지난 80년대에 급격히 늘어난 신자수이다. 천주교 중앙협의회가 발표한 ‘한국천주교회 교세통계’(올 4월 발표)에 따르면 89년 12월말 현재 신자수는 2백61만3천여명으로 79년의 1백24만6천여명에 견주어 곱절이 넘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증가는 지난 10년간 늘어난 신자수가, 이땅에 처음 가톨릭이 전파된 이후 1백90년간 전도한 신자수를 단숨에 넘어섰음을 뜻한다. 어쨌든 현재 가톨릭신자 두명 가운데 한명은 지난 10년 사이 ‘입교’한 신자들인 셈이다. 그뿐 아니라 사제가 되기를 희망하는 젊은이들이 줄어드는 세계적 추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사제를 지망하는 신학생들의 수효는 지난 79년의 4백61명에서 89년의 1천4백83명으로 세곱이 넘게 늘었다. 이처럼 ‘양떼’와 ‘목자 지망자’가 급증한 현상에 대해 가톨릭신문사 취재국장 이윤자씨는 “한국 가톨릭의 꾸준한 성장은 바티칸측으로부터 ‘찬사와 관심’은 물론 ‘아시아교회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한다.

 그러한 찬사와 희망을 불러일으킨 눈부신 교회의 성장을 가져온 배경으로는 가톨릭이 지닌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와 ‘꽃동네’같은 가난한 자를 위한 사목과 수도원의 숨은 봉사 등이 거론된다. 또 80년대 들어 ‘교황성하’께서 직접 참석하는 세계성체대회 같은 굵직한 행사들이 열려 국민들에게 가톨릭의 모습을 널리 알리고 가톨릭 내부의 결집력을 확인케 한 점도 성장의 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끊임없는 문제제기로 국민신뢰 얻어

그러나 많은 천주교관계자들은 성장의 배경으로 무엇보다도 먼저 ‘정부의 부도덕성에 맞선 빛과 소금으로서 교회의 역할’을 꼽는다. 천주교 중앙협의회 매스컴위원회의 나도근간사는 “5共이란 강압적인 폭력정권에 맞서 불의와의 투쟁을 제때에 해낸 것이 가톨릭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고 말한다. 또 비슷한 맥락이긴 하지만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남국현신부(청량리성당)는 “과거 한국의 특수한 정치상황 속에서 ‘신화’를 찾는 국민들에게 김수환추기경이란 ‘특별한 존재’가 크게 호소력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다시말해 ‘필요한 때에 긴요한 발언’을 던지는 탁월한 지도력, 그리고 소외계층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준 추기경이라는 존재가 교세 급신장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말이다.

 그와 같은 가톨릭의 사회참여는 비단 80년대만의 일이 아니다. 70년대에도 인혁당사건, 지학순주교의 ‘양심선언’, 3 · 1절 명동사건 등이 보여주듯 가톨릭은 현실참여의 강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가톨릭이 있다”는 말이 생길만큼 가톨리그이 사회참여가 폭넓고 활발하게 펼쳐진 것은 아무래도 80년대이다.

 80년대 가톨릭의 현실참여는 80년 5월23일 광주민주화운동의 와중에서, 그리고 광주 일원을 제외한 한반도 전체가 국가폭력의 공포로 얼어붙은 시점에서 주교상임위원회가 모든 신자들에게 광주를 위한 특별기도를 요청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뒤 정의구현사제단, 가톨릭농민회, 외국 농축수산물 수입, KBS시청료납부 거부운동, 언론통제 등 80년대의 군부독재와 그로 인해 빚어진 구조적인 사회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게 된다. 이러한 가톨릭의 對사회적 발언은,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구원문제에 제1차적인 관심을 두는 것이 가톨릭인 만큼 부도덕한 권력과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이땅의 정치 · 사회적 상황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건은 87년 주교단의 4 · 13 호헌조치반대 담화문 발표와 정의구현사제단의 박종철군 고문치사조작사건 폭로이다. 특히 박종철군 사건의 경우, 천주교 사회문제연구소장인 성염교수(외국어대·철학)는 “가톨릭의 윤리 · 도덕적 용기에 대한 국민적 신뢰감을 낳았고 정권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가톨릭의 본산인 명동성당이 민주화세력들에게 ‘민주화의 성지’로 자연스레 기억되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이다.

 그러나 가톨릭의 이런 위상과 경험은 한편으로 90년대의 가톨릭에 심각한 고민과 갈등을 안겨주는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디아스 교황청대사를 둘러싼 일련의 파문과 전교조와 가톨릭학교재단간의 ‘종교전쟁’, 그리고 통일사목을 둘러싼 보혁갈등 등이 최근 있었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갈등은 교회 안팎에 두루 걸쳐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디아스 대사가 지난 4월22일 인천 주안1동 성당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던 청년들로부터 받은 ‘달걀세례’는 겉으로 보기에는 1회적인 해프닝 같지만 실은 교회 안팎의 복합적 갈등을 표출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의 ‘불씨’는 이미 본지 제19호(3월11일자)에서 보도했던 바대로 디아스 대사가 지난해 9월 한 신문과 가진 인터뷰와 이를 월간 《사목》지에서 정식으로 비판한 함세웅신부(가톨릭대교수)의 기고문에서 싹튼 것이다. ‘교회쇄신을 위한 근원적 성찰’이라는 제목의 이 기고문에서 함신부는 “대사의 인터뷰내용은 문규현신부, 임수경양의 방북문제와 관련되 사목적 대담이라기보다는 정부여당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는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했었다. 그뒤로 디아스 대사는 “외교관이라는 신분에 걸맞지 않은 발언에 대해 사죄하라”는 여론의 비판과 사제단 및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같은 천주교 관련단체로부터 ‘회개하라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오히려 각 언론사에 해명 보도자료를 보내 사제단을 공격했고 일부평신도들마저 대사를 옹호하며 사제단을 공격하자 청년신자들이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그러나 사건 발생 사흘뒤인 25일에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의장 김남수주교(수원교구)는 〈가톨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주교회의가 사제들의 잘못된 태도를 직접 책망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 이유는 교회내의 일치를 깨뜨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또 각 교구장님들이 스스로 소속 사제들을 잘 계도하겠다는 얘기를 주교회의 때마다 해왔기에 그같은 일이 생기리라고는 전혀 예상못했다”면서 “교황님의 대리자인 교황대사님을 잘 모시지 못해 죄송스런 마음을 금할 길 없다”고 밝혀 그 사건을 사제단에서 ‘사주’했다는 뉘앙스를 짙게 내비쳤다. 이어 4월28일에는 보수성향의 평신도들이 발기인대회를 갖고 이른바 ‘평화일치 실천협의회’(대표 엄익채 전 평신도사도직협의회장)라는 모임을 결성, 디아스 대사를 적극 옹호하는 한편 사제단 및 사제단을 지지하는 평신도들을 ‘운동권 사제’ 및 ‘운동권 신자’라고 비난하고 나섬으로써 평신도들간의 갈등도 심화되고 있다. 한편 사제단 및 천주교관련 사회운동단체들에서는 주교단이나 평신도들간의 갈등은 크게 문제되지 않으나 문제는 그런 갈등양상을 교회 안팎으로 노정시켜 ‘擬似보혁구도’ 창출을 노리는 세력들의 힘이 작용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갈등과 더불어 ‘민주화의 성지’라는 명동성당의 상징성도 점차 깨지고 있다는 데 양쪽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민주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제발로 걸어오거나 공권력에 쫓겨 모이던 성당이 이제는 기념사진이나 찍는 한가로운 곳으로 변하고 있다. 이같은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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