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自대회金최고 ‘선출방식’쟁점
  • 박중환 편집위원대리 ()
  • 승인 1990.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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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계, 대표최고위원 ‘대통령 지명, 대의원 표결’ 절차 내세워

민정계 난색…金鍾泌최고위원 “대통령이 임명해야”


 5월9일 상오 서울 올림픽공원내 펜싱경기장 안팎은 민주자유당 창당전당대회를 자축하는 플래카드, 시도별로 자리를 매긴 피킷, 각계에서 들어온 축하 화환들로 축제분위기에 쌓인다.

 실내에는 전국에서 모인 대의원과 초청인사 · 당원 등 8천여명이 자리를 잡고, 민자당 총재인 盧泰愚대통령의 입장을 기다린다.

 단상 중앙에는 봉황무늬가 새겨진 대통령 내외의 의자가 가즈런히 놓여 있고, 그 뒤쪽 오른편에 金泳三대표최고위원과 金鍾泌최고위원이, 왼쪽에는 朴泰俊최고위원대행이 나란히 앉아 애써 웃음띤 표정으로 내빈들의 인사를 받는다.

 곧이어 盧대통령이 金玉淑여사와 함께 민자당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등장하고, 곧이어 개회가 선언된다.

 이상은 민자당 창당전당대회 준비팀이 짜놓은 이날 행사 시간표의 앞부분이다. 그러나 준비팀은 시나리오 가운데 이날 대회의 하이라이트가 될 중심부분을 짜지 못하고 있다. 바로 초미의 급무가 된 당헌의결과 함께 대표 최고위원을 어떤 방식으로 뽑느냐 하는, 이른바 지도체제를 갖추는 데 필요한 절차가 그 중심 부분이다.

 5월9일 행사를 치르려면 늦어도 나흘 전까지는 그 절차를 확정지어야 한다. 따라서 이 문제를 다루는 당헌개정소위(위원 姜在涉 · 李仁濟 · 申五徹)는 지금 전당대회일을 배수진으로 삼고 민정 · 민주 · 공화 등 3계파의 이해조정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 1월22일 3당합당 선언 이후 끊이지 않아온 민자당의 내분은 알고보면 이 문제에 근원을 둔 당권싸움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朴哲彦 전정무장관의 폭탄발언도, 민주계에서 흘린 것으로 굳혀져 있는 3당통합 당시의 노태우-김영삼간 ‘당권승계각서설’도 모두 창당전당대회에서의 黨權장악과 92년 총선 이후 大權을 잡는 데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는 민정 · 민주 양 계파의 속셈이 부딪치면서 터져나온 것이다.

 이러한 두 계파간의 충돌은 지난 4월17일, 4월26일 두 차례의 청와대회동으로 일단 진정되긴 했으나 활화산이 휴화산으로 변한 것일뿐, 언제든지 다시 터질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다.

‘각서설’반격 뒤에도 민주계 불만 여전

 4 · 26 청와대회동 결과, 노대통령 · 김영삼대표최고위원 · 김종필최고위원 · 박태준최고위원대행 등 4인이 합의한 지도체제는 △총재제로 하며 총재는 당을 대표한다 △총재는 최고위원과 협의하여 당무를 통할한다 △최고위원은 5인 이내로 하되, 그중 1인을 대표최고위원으로 하며 최고위원을 대표한다 △대표최고위원은 최고위원들과 합의하여 당무의 집행을 총괄한다 등으로 요약됐다. 이런 내용은 사실상 3당통합 당시 발표된 것과 거의 같고, ‘각서설’파동이 있기 직전 민정계의 朴俊炳사무총장이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렇다면 민주계는 박장관의 장관직 사퇴에 이어 흘린 ‘각서설’ 반격으로 얻은 것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때문에 민주계 소장의원들의 불만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내연상태로 남게 됐다고 볼 수 있다.

 민주계는 김영삼대표최고위원이 당권을 쥐는 1인체제의 당헌규정을 마련하는 것이 사실상 좌절된 이 시점에서 민주계가 차선책으로 기대할 수 있는 열매가 단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 열매란 창당전당대회 시나리오 중 비어있는 ‘모양새’부분과 관련된 것으로 김최고위원을 3인의 최고위원 중에서 ‘선출’하는 형식으로 대표최고위원 자리에 앉히자는 것이다. 이런 선출방식이 아닐 경우, 다시 말해서 노대통령이 김대표최고위원을 임명 또는 지명할 경우 김대표최고위원은 계속 노대통령의 임면권 아래 있을 수밖에 없게 되며 만약 노대통령이 필요할 경우 언제라도 김대표최고위원을 ‘대표’에서 해임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민주계가 이런 저의를 드러내놓고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치 빗나갈지 모를 결과를 염려하기 때문이다. 만약 대표최고위원을 대의원(5천여명) 표결로만 선출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대의원 가운데 인원수가 가장 많은 민정계가 기습적으로 김종필최고위원을 대표로 뽑는 등의 엉뚱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민주계는 차선으로 노대통령이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최고위원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한 뒤 대의원 표결로 선출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민정계측은 민주계의 이런 요구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각서설’까지 퍼뜨리며 당권도전을 시도했던 민주계를 믿지 못하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김종필최고위원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지명 또는 임명해야 한다는 입장을 확실히 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영삼대표최고위원은 4월26일 청와대회동을 마치고 상도동 자택에 돌아와 기자들에게 “당의 골격이 다 짜여진 만큼 당헌개정작업에서 간단히 다루면 될 것”이라고만 밝혀 여운을 남겼다.

 이를 두고 측근들은 “대통령이 임명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 자기논에 물꼬 돌리는격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듯하다. 회동 후에 나온 합의문을 보면 3당합당 당시 발표되었던 ‘원안’을 재확인하는 데 그쳐 김대표최고위원이 양보를 한 듯한 기미가 있기 때문이다. 김대표최고위원의 이같은 양보에는 뭔가 조건이 따르지 않았겠냐는 것이다.

 예컨대 민자당이 안정되는 어느시점에서 당권을 대표최고위원에게 대폭 위임한다든지, 아니면 92년 총선에 임박해서 당지도체제를 획기적으로 바꾼다는 방법으로 조건이 붙었음직하다.

 이같은 양보를 했다면, 그것은 김대표최고위원이 최근 당 내분으로 국민여론이 크게 악화되어 있는 사실을 중시하여 이런 지엽적인 이해에 얽매일 경우 자신에게 돌아올 손익이 뭔지를 계산한 결과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보면 미완의 시나리오 부분은 4 · 26 청와대 합의내용을 토대로 대표최고위원직을 노대통령이 지명, 추대하는 방식으로 예우를 갖춘 격상방식이 될 수 있다. 이럴 경우 남는 문제는 김대표최고위원이 민주계 소장의원들의 불만을 어떻게 해소시켜나가느냐 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제2의 각서파동 없다고 장담못해

 김대표최고위원은 각서파동이 있은 직후부터 민주계 의원들끼리 모이는 것을 자제시켜왔고, 자신을 자주 찾는 것마저도 삼가토록 해온 터라 창당전당대회를 전후해 소장의원들이 또다른 파문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소장의원들은 ‘각서설’을 틀림없는 사실로 믿거나, 적어도 믿으려들기 때문에 제2의 각서파동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이다.
 3당통합 당시 김영삼총재로부터 신당 합류권유를 강하게 받았던 朴寬用의원은 “김총재로부터 통합신당의 당권을 자기가 맡기로 보장돼 있다는 말을 몇차례나 들었다”며 각서설의 내용이 사실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도동의 측근인 한 의원은 문제의 각서에 관해 “공식문서가 아닐 뿐, 담겨질 것은 제대로 다 담겨진 문건으로 알고 있다”며 “김총재가 통합발표 직후 신당에서의 입지를 보장받았으니 걱정말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고 귀띔한다. 다만 그 누구도 직접 봤다는 확언이나, 증거제시를 안할 뿐이다.

 4월23일 ‘각서설’을 맨먼저 발언하면서 “직접 봤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 金東英의원도 다음날 아침 신문에 크게 보도된 것을 보고 김대표최고위원이 화를 낸 이후 “진의가 잘못 전달돼 와전됐다”며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한 상태이다. 상도동의 측근 의원의 말대로 각서가 “공식문서 아닌 문건”으로 존재한다면, 이같은 추측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느냐고 그는 말한다. 김의원의 설명은 계속된다.

 “지난해 12월31일 全斗煥씨의 국회증언이 없었던 것보다 못한 결과를 빚은 뒤, 새해들어 5共청산시비가 재연됐다. 이 가운데 민정 · 민주간의 先통합이 은밀히 추진됐다. 당시 김영삼총재는 통합신당에서 자신의 당권을 보장해주도록 청와대측에 요구했고, 청와대측은 이 주문을 외면할 수 없어 받아들였다. 김총재는 이를 각서형식으로 문서화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청와대측은 간략한 메모형식으로 작성해주었다. 김총재는 이 문건을 받은 뒤 당시 밀월관계에 있던 공화당의 김종필총재에게 3당합당을 제의해 1 · 22합당이 성사됐다. 김종필총재는 청와대회동에서 김영삼총재가 당권문제를 꺼내서 알게 됐다. 이 때문에 두 김총재의 사이가 다소 소원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 설명대로라면 각서는 노대통령과 김영삼대표최고위원 사이에만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난 3월 박철언 당시 정무장관은 《시사저널》과 박씨 측근과 가진 대리 인터뷰를 통해 “당초 민정 · 평민 양당의 연합이나 통합을 생각했으나 평민당이 거부해 민주당과 통합을 하게 됐다. 민정 · 민주 양당의 先합당 합의 때 각서가 오갔을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金潤煥정무장관은 4월25일 “각서교환이 있었다면 왜 박철언 전장관이 김영삼최고위원에게 대들었겠느냐”고 반문, 그 가능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아무튼 각서설은 朴熺太 민자당대변인의 말처럼 “심장부에서 있은 일”이어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각서설’의 망령은 민정 · 민주계의 당권 주도싸움이 표면화되면 언제든지 되살아나 정국을 또다시 뒤흔들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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