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자에게 사과한다”
  • 김창엽 기자 ()
  • 승인 1990.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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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건너가 끈질긴 협상 끝에 요구 관철한 스와니노조

‘아세아스와니.’ 회사마크에 새겨진 백조만큼이나 이름이 아릅답다. 몸놀림 또한 새처럼 빠르다. 스키장갑이 주 생산품목이기 때문인가. 60년대에 일본에서 설립되어 자국의 노동조합이 활기를 띠자, 72년 재빨리 한국의 경남 마산으로 공장을 옮겼다. 그러나 70년대 마산지역에 노동운동이 확신되자 77년 전북 이리공단으로 발을 뺀다. 80년대 후반들어 한국 전역에 노동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지난해 9월말에는 일방폐업을 선언하고 이 땅을 떠난다. 이유는 적자. 그렇다고 해서 아세아스와니社가 사업을 포기한 건 절대 아니다. 현재는 중국과 스리랑카에 교두보를 확보,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노동운동의 무풍지대로 옮겨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날렵한 몸놀림으로도 ‘진실의 그물’만큼은 빠져나갈 수 없었던 것 같다. 아세아스와니 이리 공장. 노동자의 80%가량이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로 평균연령은 18세. 계속 흑자를 내온 회사가 작년 한해 적자를 이유로 어느날 갑자기 문을 닫았다. 어린 노동자들에게 이렇다할 말 한마디 없이. 노조는 ①폐업수당을 지급하라 ②학생근로자들의 취업과 취학을 보장하라 ③퇴직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일본인 사장 미스오 에스로(三好銳郞)는 말이 없었다. 스와니 노동자들은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그러나 소득이 없었다. 결국 일본을 찾아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梁熙淑(24) 노조위원장을 비롯 5명의 노조 간부가 지난해 12월 22일 스와니 본사가 있는 일본 가가와현 히로도리조를 찾았다. 노조대표는 이튿날 사장과 1차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인 사장은 “너희 나라 노동부도 가만히 있는데 왜 이렇게 남의 나라까지 와서 설치냐”며 공박했다. 梁위원장은 “타국의 모리배 사장으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을 때 너무 서럽고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첫 협상의 결렬은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90년 1월8일 2차협상에서 사장은 “너희 나라가 못살아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며 대표단의 마음에 또 한번의 생채기를 냈다. 梁위원장 등 대표단은 이때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악이 바치더라고 돌이킨다.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던 대표단을 더욱 서럽게 한 것은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욕까지 하며” ‘하대’를 서슴지 않던 일본주재 한국상무관의 태도였다고 한다. 여기에 일본언론(NHK)은 “한국인 노동자들은 몇 푼의 돈을 더 받으려고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다”며 한국에서 철수한 일본기업들인 수미다·티엔디·아세아스와니를 묶어 특집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했다.

 “투쟁가를 부르면 회사측은 확성기로 팝송을 틀어대고, 몸싸움에 구타까지 당해도 일본경찰에 끌려가는 것은 자신들 뿐”이었다고 梁위원장은 말한다. 이런 과정은 근 3개월간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타국에서 벌인 힘겨운 싸움은 결국 노조대표단의 승리쪽으로 기울었다. 일본내의 여론이 환기되자 스와니社도 더 이상 원만한 타결을 회피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3월13일, 노사양측은 철야협상 끝에 “회사는 한국노동자들의 정신적,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한 점을 사과한다”는 내용을 포함, 대표단의 요구를 거의 수용한 협정조인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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