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살림 어려워도 살찌는 재벌기업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0.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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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력 집중 날로 심화, 공정거래법 제구실 못해…중소기업 육성 시급

우리의 생활공간은 ㅅ, ㅎ, ㄷ社 등 재벌기업들이 만들어놓은 일상용품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아파트에서 양복 · 라면까지 의식주는 물론 일반 생활용품 대부분이 재벌 기업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오히려 재벌기업 제품이 아닌 것을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더욱이 경제기획원이 매년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대규모 기업집단(재벌)’에 속하는 기업의 수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추세이고 보면 재벌기업이 우리 생활공간에 차지하는 영역은 더욱 넓어질 수밖에 없다. 재벌기업에 의한 경제력 집중에 대한 정부의 노력이 별반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사이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재벌 공화국’이라 표현될 정도로 대기업 지배의 경제구조가 확연해지고 있는 것이다.

11개 기업 새로이 재벌 대열에

 지난 18일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가 새로 지정한 대규모 기업집단은 지난해에 비해 10개가 늘어난 53개, 그 계열사의 수는 지난해에 비해 1백24개가 늘어난 7백97개가 되었다. 정부가 지정하는 대규모 기업집단은 총자산 4천억원을 넘어서는 재벌기업을 말한다.

 정부는 지난 87년부터 대규모 기업집단을 지정해 경제력 집중의 억제를 꾀했다. 당시 개정된 공정거래법은 대규모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을 유도하여 기업의 내실화를 기하고 시장독점을 막아 경제력 집중을 막자는 데 취지가 있었다. 87년의 대규모 기업집단은 모두 32개였고, 이듬해 40개, 89년에는 43개로 꾸준히 늘어났다. 4년 사이에 재벌 수가 70% 이상 증가한 셈이다.

 올해에는 동원 진로 대신 동양화학 대농 한신공영 한국유리 영풍 성신양회 대성산업 금강 등 11개 그룹이 재벌 대열에 합류했다. 반면 작년에 지정되었던 포항제철은 공공적 법인으로 분류되어 제외되었다.

 이들 대규모 기업집단은 계열회사간 상호 출자가 전면금지(금융·보험회사간 상호출자도 금지)된다. 특히 새로 지정된 기업집단은 공정거래법에 따라 1년 이내에 보유주식을 매각하고 상호출자한 회사끼리의 합병을 통해 상호출자를 해소해야 한다. 또 92년 3월까지 기업공개 · 유상증자 · 소유주식매각 등을 통해 출자총액한도 초과분을 없애야 한다. 이와 함께 계열 관계에 있는 금융 · 보험회사의 비금융 · 보험계열회사에 대한 의결권이 제한되고 중소기업 창업투자회사를 취득 또는 소유할 수 없게 된다. 또 기업집단 계열회사는 다른 회사의 주식을 20% 이상 소유할 경우 이를 신고해야 한다.

 경제기획원의 한 관계자는 “올해 총 계열회사 수가 늘어난 것은 새로 지정된 기업집단이 작년 한해동안 계열회사를 많이 늘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기획원은 또 기존 43개 재벌그룹의 상호출자 금액 3천9백78억원은 해소기한인 지난 3월말까지 모두 해소되었으나 작년 3월말 현재 7천8백67억원에 달하던 출자총액한도 초과금액은 아직 해소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기획원은 또 87년에 대규모 기업집단을 30개 정도로 보고 그 대상 기업수에 맞추기 위해 기업 자산을 역산, 4천억원이라는 기준이 산정되었으나 그동안 경제규모가 커진 만큼 92년에는 이 기준을 상향 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재벌기업의 문어발확장 다시금 확인

 재벌을 바라보는 시각은 국내에서는 물론 국외에서조차 따갑기만 하다. 지난달 홍콩에서 발간되는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는 ‘공룡시대’라는 제목의 한국경제 특집기사에서 “한국정부는 그동안 기울였던 재벌에 대한 규제를 포기하고, 급격한 원화절상 등으로 인한 무역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탐욕스럽고, 반민주적’이라고 비난받는 재벌들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다시 갖게 되었다”라고 꼬집었다.

 우리나라는 경제규모에 비해 다른 나라보다 방대한 계열회사를 거느린 재벌기업이 많고 그들의 영향력이 이미 너무 커버렸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일일 수는 없다. 재벌기업에 대한 규제를 펼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정부가 대규모 기업집단을 발표함에 따라 국민들은 재벌기업들이 일정기간 사업영역 확장을 위해 얼마나 열을 올렸는지 일목요연하게 알게 되었다. 특히 지난해 그토록 경기가 어렵다고 호소했던 재벌들이 영역 확장을 착실히 추구해 더욱 속살이 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올해 새로 지정된 재벌의 경우 지난 1년 동안 많게는 8개까지 계열회사를 늘렸다. 기존 그룹의 경우 삼성이 3개사, 현대가 2개사, 선경이 2개사를 각각 늘렸다. 이번에 지정된 대기업집단을 보면 합작기업의 수가 많이 늘어난 것과 함께 첨단산업·유망업종에 경쟁적으로 진출한 점이 두드러진다. 이밖에도 불황속에서 각종 세제 혜택이 주어지는 기업의 합병과 흡수(M&A)가 늘어났고, 부동산투기에 따른 기업 부동산의 가치가 크게 늘어났다.

 대신과 동원의 예에서 보듯이 증권사 등 금융회사를 거느린 신규 재벌의 영역 확장도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금융회사를 중심으로 자본이 형성되어 있는 일본의 재벌과는 달리 제조업 중심으로 성장한 우리나라 재벌은 금융 부문으로의 진출을 꾸준히 시도해왔고 그 모습이 구체화되어가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경제력 집중을 방지하려는 노력을 아주 포기하고 있는 건 아니다. 재벌 규제를 위한 공정거래법은 정식 명칭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말해주듯이 경쟁을 촉진하고 재벌기업이 하나의 시장이나 몇 개의 시장에서 매출액이나 자산을 과다하게 점유하는 이른바 산업집중을 막아보자는 뜻에서 제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려는 정부의 꾸준한 노력의 결과 재벌기업의 독과점 현상도 부분적으로는 조금씩 개선되는 추세를 보이기도 했다.

 은행여신(대출부문)의 경우에도, 은행 총대출의 20%를 육박하던 30대 재벌의 여신 비중이 작년말 14.7% 수준으로 떨어졌다. 비록 재벌기업의 계열회사들이 고리형 상호출자나 상호지급보증 등을 통한 변칙 운영을 통해 공정거래법을 피하는 허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경제력 집중 규제를 위한 노력은 나름대로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정부 일각에서는 지난 81년 공정거래법을 처음 만들었고, 86년에는 7개 부문의 산업육성법을 폐지하고 기업에 대한 일방적 지원의 기준을 엄격히 통제하는 것을 골자로 한 공업발전법으로 통합하는 등 경제력 집중 완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그러한 정부의 노력은 큰 성과를 보지 못한 채 재벌기업의 경제지배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88년말 현재 30대 재벌기업의 매출액은 기업 전체 매출액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대출과 지급보증을 합한 은행여신은 총여신의 21%, 이들이 창출한 부가가치는 산업부문 국내 총생산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5대 재벌의 총자산은 우리나라 국내 총생산의 40%를 넘는 규모에 달한다. 기업의욕 소생을 강조하여 출범한 새 경제팀이 내놓고 있는 경제정책이 기업, 그 중에서도 대기업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고 할 때 경제력 집중현상의 심화는 피할 수 없는 길일지도 모른다.

 재벌의 힘이 어느나라보다도 강한 일본의 경우 상호출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기업들의 주식이 이미 공개되어 기업가들의 손에 남은 주식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은 일본과 크게 다르다. 증권업계에서는 여신관리대상 50대 그룹의 계열사로서 공개가 가능한 6백여개의 기업 가운데 공개 상장된 회사가 30%에도 못미친다고 밝히고 있다.

“경제력 집중은 소득분배 왜곡 부채질”

 姜哲圭교수(서울시립대 · 경제학)는 “경제력 집중은 결국 국민소득의 창출보다는 소득분배의 왜곡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은행에서 돈을 빌려 땅투기를 일삼는 기업들이 땅값을 올리면 그 피해는 결국 일반 국민들의 부담으로 돌아가는 등 경제집중에 따른 악영향은 매우 심각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대처하는 현실적인 제안은 우선 재벌 기업 공개, 중소기업 육성, 재벌이 보유하고 있는 과다한 부동산의 매각을 통한 은행빚 상환 등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정부가 가지고 있는 공개명령법 등의 발동으로써도 가능하다.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기술보호 측면에서도 중소기업의 육성을 위한 획기적인 지원책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기업의 비대화를 우려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90년대 한국경제의 발전은 산업구조 고도화라는 사닥다리를 어떻게 올라가느냐 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단순 가공 · 조립의 단계를 넘어서 기계부품, 새로운 소재 생산을 위한 고가공 기술집약과 산업화로 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중소기업을 폭넓게 키워야 한다는 견해가 줄곧 제시되어왔다.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덩치가 큰 기업군이 많이 출현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기업이 계열사를 늘리는 것을 비용절감과 위험분산을 위한 경영 다각화 측면에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재벌기업의 계열화가 가속되는 것은 비용절감이나 위험분산보다는 전문영역과 기술부문의 미숙에도 불구하고 우선 일을 벌여놓고 보자는 두드러진 경향 때문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는 6월 대기업 주식보유 현황이 또 발표되겠지만, 이것 역시 국민들의 ‘재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지워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재벌기업의 경제력 집중 현상은 한국경제의 왜곡이기도 하다. 공룡이 하루아침에 지구상에서 소멸되어버렸던 것처럼 재벌은 치열한 국제경쟁을 헤쳐나가기에 필요한 적응력을 상실할 위험에 직면해 있으므로 재벌 스스로에게도 우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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