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어난 造船術 자랑한 우리민족
  • 편집국 ()
  • 승인 1990.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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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陸戰에서 일본에 크게 밀리는 형세였지만 海戰에서는 압승을 거듭했다. 이는 일본측의 각종 사료에서도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섬나라 일본이 해전에서 왜 대피했을까?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영웅의 존재도 승리의 한 요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숨은 진짜 이유는 造船術에 있어 우리가 일본을 한발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왜적이 水戰에 익숙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군선이 멀리 와서 그 船制가 堅厚壯大하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 군사처럼 그 위에 대포를 안치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적이 船材감이 많은 巨濟島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으므로 만일 우리나라 船材를 모방하여 板屋船을 많이 만들어 포를 장비해 가지고 출격해온다면 감당키 힘들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측은 임란시 玉浦 · 唐浦 · 閑山 · 益山 해전 등에서 일본의 반수 정도 밖에 안되는 전투선으로 적선을 궤멸시켰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지만 이때의 주력선이 다름아닌 ‘板屋船’이다.

 판옥선은 갑판이 하나 더 있는, 당시로서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戰船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도 이와 유사한 배가 있었지만 우리의 판옥선은 그들의 배와는 유래가  다르다는 것이 金在瑾박사(전서울대교수)의 연구결과이다. 판옥선은 가장 큰 것의 길이가 70척(1척은 30.3cm), 다음이 55척, 제일 작은 것은 47.5~50척으로 규격이 정해져 있었다. 탐승인원을 기준으로 할 때 작은 것은 1백20여명, 큰 것은 1백60여명 정도가 승선했다. 판옥선이 전투시 뛰어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구조 때문인 것으로 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이전까지의 軍船은 櫓軍(노를 젓는 비전투원)과 戰士들이 갑판위에서 혼재된 상태로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이에 따라 船內 기동성 등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판옥선은 밑갑판쪽에 櫓軍이 위치하고 윗갑판에서 전투를 치르게 돼 있어 전투의 효율성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더욱이 판옥선은 적의 화살이나 총탄으로부터 櫓軍을 안전하게 보호 할 수 있어 기동성있고 안정된 상태에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의 戰船에는 전사보다 櫓軍의 숫자가 2~3배 이상 많은 것이 보통이다.

 임진왜란 때 해상에서 큰 활약을 한 거북선 역시 판옥선을 응용한 특수군선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거북선은 전투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배였지만 임란시 실제로는 3척 정도가 이용된 것 같다고 金박사는 보고 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전라우수영, 경상좌수영, 충정수영 등에 총 5척만을 두었다. 거북선의 척수가 이처럼 적었던 것은 거북선이 돌격선으로는 훌륭하지만 전사와 櫓軍을 은폐된 내부에 둬야 하는데 따르는 활동의 불편함 때문이었다.

 우리나라가 막강 수군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한 造船기술은 물론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한반도에 배가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선사시대 이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선박을 이용하여 본격적인 해상활동을 벌인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며 삼국 중에서는 백제가 특히 중국 · 일본과 빈번한 해상교류를 펼친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에는 軍船의 발달보다는 사신의 파견이나 무역이나 무역 등과 관련한 商用선박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사용된 배의 규모나 선형 등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삼국시대의 造船 · 船舶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張保睾다. 그러나 그가 선박술의 발달리 미미한 신라의 배를 사용했다기보다는 중국배나 중국배와 우리배를 절충, 새롭게 건조한 배를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우리의 배가 다양화된 시기로 볼 수 있다. 각종 기록에 의하면 王建 등은 ‘樓船’이라 하는 척당 30여명이 탑승할 수 있는 배를 수백척 거느렸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밖에도 漕運 등과 관련한 ‘消馬船’, 해외교역에 쓰인 ‘海運船’, 동해안의 여진족 등 정벌에 쓰였던 ‘戈船’등이 등장하다. 또 주목할 만한 것은 고려후기 몽고가 일본을 정벌하러 나설 때도 우리의 배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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