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기업 서류 어디로 갔나
  • 허광준 기자 ()
  • 승인 1993.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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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업무 컴퓨터화, 대기업 앞장 … 결재 서류 사라졌지만 ‘비인간화’ 극복 과제

결재 서류를 들고 부장실에 올라간 사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마음을 졸인다. 서류를 훑어보는 부장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윽고 “이걸 기안이라고 해온 거야”하는 질타와 함께 서류를 내팽개친다. 직장인의 애환을 그리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같은 모습은 앞으로 ‘그때를 아십니까’에나 나오게 될 것 같다.

 삼성그룹 계열사인 제일모직은 91년 회사내 온라인 정보망인 ‘CITOS'를 도입해 대부분의 서류를 컴퓨터망을 통해 결재한다.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려 내용을 작성한 후 결재 받을 사람을 지정하면 바로 관리자 컴퓨터로 올라간다. 결재자는 아무 때나 편한 시간에 컴퓨터로 내용을 검토한다. 담당자만 알고 있는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보고서 목록 옆에 붙은 분류항목이 ’미결‘에서 ’기결‘로 바뀐다. 보고 내용이 미흡할 때는 작성자에게 되돌려보낸다.

 럭키금성 계열의 정보서비스업체인 (주)에스티엠 김영태 사장의 일과는 컴퓨터 모니터를 검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날 올라온 보고서를 불러내어 검토하고 지시사항을 덧붙이거나 확인하고 결재한다. 이 회사는 이미 87년에 임원과 관리자를 대상으로 전자 결재시스템을 도입했다. 90년부터는 그 대상을 모든 사원으로 확대했다.

제일 모직, 복사지 5백만장 절약 예상
 기업체에 컴퓨터망이 보급되면서 시작된 이같은 ‘컴퓨터 결재’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회사 안에 근거리통신망(LAN)을 가설해 컴퓨터를 온라인으로 연결하고 문서 관리나 사무처리 작업을 컴퓨터로 간편하게 하고 있다. 삼성 · 금성 · 포철 등 몇몇 대기업이 일찌감치 도입한 사내 전산 시스템은 전자 결재처럼 업무를 능률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사원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이터베이스 구실까지 한다.

 여러 회사 전산 담당자들은 사내 컴퓨터 시스템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막대하다고 입을 모은다. 서류 하나를 결재하는 데에 6~7단계를 밟느라 1주일 가까이 걸리기가 예사였으나, 전자 결재를 도입한 이후 대부분 하루 안에 결재가 끝난다. 전자 게시판에는 임원 · 관리자의 일정을 알려주는 난이 열려 있다. 키 하나로 상사의 일정을 확인해보고 면담이 필요할 경우 시간을 편하게 잡을 수 있다. 또 사내 동호회는 여러 부서에 흩어져 있는 사원들에게 간편하게 전갈을 보낼 수 있다. 회사 복도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알림쪽지가 모두 컴퓨터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제일모직의 경우 올해 복사지 5백만장이 절약될 것으로 본다. 사무실 공간은 서류 보관함이 없어짐으로써 22% 정도가 늘어난 것으로 평가한다.

 한국통신은 작년 11월부터 각 부서나 지방 전화국 간에 문서 연락을 전자편지 형식으로 하고 있다. 이 회사는 전국 전화국 4백여 개에 분국이나 영업소까지 합쳐 7백여 군데나 되는 지방 조직을 전산망으로 연결해 효과를 톡톡히 거두고 있다. 과거에는 서류를 만들어 도장을 찍고 봉투에 넣어 우표까지 붙이는 등 온갖 자질구레한 작업을 거쳐야 문서 하나를 보낼 수 있었다. 지금은 키보드를 몇 번 누름으로써 간단히 처리한다.

 컴퓨터는 서류를 없애는 데에도 크게 도움을 준다. 전화국에서는 날마다 수많은 일지를 작성해야 하는데, 전국적으로 그 양을 합하면 엄청나다. 지금은 일정한 양식을 컴퓨터에 저장해 두고 그에 맞게 일지를 작성한다. 한국통신 손세백 OA추진2부장은 “멀지 않아 연간 4.5t 트럭으로 2백대에 달하는 서류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예상한다.

 한국통신의 전자 결재는 실제 도장이나 서명으로 이루어진다. 결재할 서류가 모니터에 올라오면 결재자는 서류를 검토하고 저장해 두었던 자기 도장이나 서명을 불러내 서류의 결재란에 찍는다. 물론 모니터 위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관리자들은 자기의 도장 · 서명을 그림 입력장치(스캐너)로 입력해 디스켓에 보관한다.

 기업에서 시작한 사무실 전산망화 작업은 정부 기관으로 확대된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정부종합청사 5~8층의 외무부 각 사무실은 근거리통신망인 ‘외교정보 종합전산관리 및 전자결재 시스템’으로 연결돼 있다. 이 시스템의 이용자를 확인하는 ‘유저(user) 관리’란에는 이용자번호 ‘A-001-01'의 한승주 장관과 ’A-001-02‘의 홍순영 차관을 비롯한 모든 직원의 이용자번호가 올라와 있다.

 외무부는 각 행정 단위나 재외공관에서 생산되는 많은 자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려고 작년 6월부터 전산망 개설 계획을 세워 올해 4월 정식으로 가동했다. 근거리통신망을 통해 결재가 이루어지면 결재 서류는 자동으로 주컴퓨터에 기억된다. 많은 문서가 손쉽게 데이터베이스가 되는 것이다. 현재 전체 문서중 전산 처리되는 것은 30% 정도로 그다지 많지 않지만 차츰 그 비율이 높아질 전망이다. 외무부 전산담당 이지택 사무관은 “전산화 작업으로 기존의 서류 캐비닛이 개인용 컴퓨터 안으로 들어간 셈이다”라고 말한다.

단점 보완하려 결재 파일 음성화
 경기도 과천에 있는 공업진흥청은 지방청과 본청을 전산망으로 잇고, 본청 4개 건물도 근거리통신망으로 연결했다. 공진청은 KS 규격정보를 비롯한 표준화 관리, 품질 관리, 기술지도 관리 등 고유 업무는 물론이고 물품 · 인사 · 예산 관리등 행정지원 업무까지 모두 전산화 작업을 끝마쳤다. 이를 통해 부서별로 나뉜 자료를 통합 관리해 정보를 공유하고 신속하게 검색할 수 있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공진청 전산실 정선환 사무관은 “시간이 많이 드는 반복 작업을 전산처리하여 창의적인 업무에 전념하도록 하는 부수효과도 거두고 있다”라고 말한다.

 기업이나 관청이 ‘서류 없는 사무실’ ‘문서 없는 행정’ 같은 표어를 내세우고 업무 전산화에 적극 매달리는 것은 이같은 효율성과 신속성 때문이다. 서류 하나를 찾느라고 모든 직원이 캐비닛의 서류뭉치와 씨름하는 모습은 곧 사라질 듯하다. 한 회사원은 “보기 싫은 상사 얼굴 안보고 결재받을 수 있어서 편하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무 전산화에는 어려움도 따른다. 우선 전산화에 필요한 여러 가지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값이 비싸 전산망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정부 부처처럼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살림살이를 해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어렵다. 정부 기관이 일반 기업에 비해 전산화가 더딘 것을 그 때문이다. 또 전자로 결재를 처리하다 보면 결재 내용을 파악하거나 보완지시를 하기가 불편한 점도 있다. 심지어는 상하 간에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적어져 인간관계가 소원해진다는 걱정도 나온다.

 이같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한국통신의 경우 전자 결재 파일에 결재자 의견을 음성으로 덧붙이는 멀티미디어 도입을 구상하고 있고, 직원의 사진을 결재 서류에 첨부해 사무전산화로 인한 ‘비인간화 현상’을 극복하려 한다.

  각 기업이나 기관의 전산 담당자가 골치를 썩히는 것 중 하나는 간부직 사원일수록 컴퓨터 만지기를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0대까지의 사원들은 컴퓨터와 친숙하고 그 효율성을 잘 알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다가서지만, 나이가 많은 고위 간부들은 ‘컴퓨터 마인드’를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기업은 최고 책임자가 강제하다시피 해 끌고 나갈 정도이다. 전산담당자는 이들의 곤혹을 덜어주기 위해 작업을 최대한 단순화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컴퓨터 스위치를 누르고 화살표만 움직이면 실행이 되도록 하는가 하면 리모콘으로 작동시키는 방안도 연구한다. 공진청에서는 아예 모니터 화면에 손을 대 작업을 진행하는 ‘터치 스크린’ 방식을 개발하고 있다.

 사무 전산화가 발전하면 궁극적으로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근무하는 형태도 가능하게 된다. 이미 ‘종이 없는 사무실’ 운동은 사원들의 작업 환경뿐 아니라 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정보화 시대의 문턱을 숨가쁘게 넘어서고 있다.
許匡畯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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