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스트로이카의 씨앗은 이미 오래전에 뿌려졌다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0.02.2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탈린주의에 맞서 개혁파 지식인들 주축 ‘新思考派’ 형성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당 중앙위 전체회의에 제시한 새로운 당 강령은 그동안 소련에서 경제개혁의 근본적 장애요인이 되어왔던 당과 국가의 결합이라는 스탈린주의적 권력구조의 재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같은 강령이 중앙위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채택됨으로써 국제관계에서의 新思考와 정치ㆍ경제에서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중심으로 한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은 이제 정치권력의 재편이라는 혁명적 국면을 맞게 되었다.

85년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소련의 개혁정책은 실로 파죽지세처럼 추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의 개혁정책이 갖고 있는 이 엄청난 추진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고르바초프 이전에 소위 ‘철의 장막’으로 일컬어져온 소련사회 내부에서는 그동안 어떤 움직임들이 있었는가.

전문가들은 고르바초프 정권의 개혁 추진력은 그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소련사회 내부에서 이미 싹트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소련 知性史 관류해온 개혁의 조류

그중 가장 중요하게 지목되는 것은 스탈린체제 이후 소련의 지성사에 면면히 이어져온 이른바 개혁파 지식인들의 움직임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보수파와 더불어 소련 지성사의 한 맥을 이루어왔다고 볼 수 있는데, 고르바초프 이전의 시기에는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되어 주로 연구소나 대학 등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온 세력이다.

이중 우선 주목되는 것은 국제관계에 대한 고르바초프 외교정책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이른바 ‘新思考派’의 형성과정이다. 전문가들은 이들 ‘신사고파’의 사상적 뿌리를 2차대전 직후 스탈린의 경제정책 고문이었던 헝가리 태생 경제학자 바르가에 연결시키고 있다. 2차대전 직후 소련 외교정책수립자들 사이에는 전쟁 당시 파생된 동유럽 및 독일문제에 대한 인식과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의 관계설정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었다. 지다노프 등 이른바 스탈린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위기론’ ‘자본주의와의 전쟁 불가피론’ 등을 주장했던 데 비해, 경제학자 바르가는 자본주의는 전후 과학기술혁명과 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을 통해 이미 생존능력을 획득했다고 지적, 미국 및 서양측과의 평화공존론을 내세웠다.

그는 47년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숙청된 후 56년 흐루시초프에 의해 복권되었는데 이때 그가 창설했던 ‘세계경제와 국제관계 연구소’가 다시 문을 열게 되면서 야코블레프, 프리마코프 등 후일 고르바초프 국제정책의 핵심 브레인이 된 인물들을 배출하게 된다.

이러한 ‘신사고파’의 형성과정에서 또하나 주목되는 것은 스탈린 사후 그동안 금지되었던 정치학, 사회학, 유전학, 수량경제학 등 분야의 학자들 사이에 이른바 개혁파 지식인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바르가와 함께 루미얀체프, 아르바토프, 그비시아니 등이 중심이 되어 야코블레프, 프리마 코프 등 국제관계 학자들과 함께 ‘글로벌리스트’(세계주의자)라는 새로운 조류를 형성했다. 그들 주장의 핵심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세계경제가 일체화하고 동시에 상호의존성과 경쟁성이 심화되면서 이러한 변화가 생태환경 및 핵위기, 제3세계의 빈곤 및 에너지 자원의 고갈이라는 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낳고 있다는 것으로 미이 70년대부터 다양한 학술잡지를 통해 활발하게 개진되었다. 훗날 고르바초프의 신사고 외교의 중심 테제가 된 “인류공통의 문제(핵, 환경, 제3세계의 빈곤 등)가 계급적 이익에 우선한다”는 말은 바로 이들 ‘글로벌리스트’들의 견해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의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고르바초프와 개혁파들이 대대적 공세로 밀어붙인 권력재편의 문제는 결국 그동안 경제개혁정책의 추진에 걸림돌이 되었던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페레스트로이카의 추진에 있어서 경제개혁은 사활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소련의 경제개혁 움직임은 이미 스탈린 말기의 농업경제학자 아벨이나, 이윤동기의 도입을 주장한 62년의 리베르만, 이어 코시긴의 개혁정책 등을 통해 간헐적으로 표출되긴 했지만 대체로 스탈린주의 경제정책의 부분적 수정을 시도한 것으로서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와중에 시베리아의 지방도시 노보시빌스크에서는 이미 60년대부터 야간베기얀을 중심으로 스탈린식 경제정책에 대한 전면적 개혁 노력이 시도되었다. 아간베기얀은 후에 고르바초프의 경제담당 핵심 브레인으로 소련 경제개혁정책의 최고실력자가 됐는데 그는 65년 당시에 이미 소련경제의 문제점은 30년대에 만들어진 ‘계획화와 행정적 관리체계’에 있음을 갈파했다고 한다.

위기의식 팽배와 함께 개혁파 전면 부상

특히 아건베기얀의 협력자로 같이 일해 온 다치아나 자스라프스카 여사가 83년 발표한 <노브시빌스크 각서>라는 비밀문서는 87년 6월 당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고르바초프가 발표한 ‘근본적 개혁案’의 기초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들 개혁파 지식인들이 소련사회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소련의 당, 정부, 지식들의 사이에 심화되었던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같은 소련 지배층의 위기감은 브레즈네프의 장기집권에 따른 소련사회의 정체감, 오일쇼크 이후 경제구조의 혁신에 실패한 데서 오는 경제적 위기, 그리고 신냉전의 파고가 고조된 데 따른 국제정세의 불안감에서 온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권력층 내부에서도 스탈린시대의 혁명 1세대가 스탈린 이후의 세대로 교체되고 있었고, 모스크바 등 각 도시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노동자, 시민계층이 중심적 세력으로 자리잡게 된 것도 개혁파 대두의 사회적 요인으로 주목된다. 즉 이러한 새로운 시대상황에 대해 스탈린주의로 무장한 보수파가 더 이상 대처능력을 상실한 것이 그동안 소련사회의 주변부에서 맴돌았던 개혁파 지식인들을 역사의 전면에 부상시킨 요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제2의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명명되고 있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은 이러한 제반 요인들의 총합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이번의 당 중앙위 전체회의는 그 혁명이 이제 마지막 단계에 돌입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