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시리즈’ 붐도 한국병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3.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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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앞다투어 캠페인 기사 연재 · 방송 … “합리적 판단 흐리게 한다”



 발단은 ‘미래로 뛴다’ 시리즈였다. 지난 8월24일 ‘신세계 신전략 용들의 전쟁’이란 부제를 달고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가 첫 회로 나가자 <조선일보>에는 독자의 반응이 즉각 들어왔다.

 당시 정국은 사정 바람과 실명제 여파 등으로 혼미를 거듭할 때였다. 모든 언론이 국내 문제에 쏠려 있을 때 이 신문은 말레이시아로 날아갔다.

 말레이시아편이 끝났을 때 대통령은 참모진에게 이 시리즈를 복사해 읽게했다. 9월2일, 대통령은 언론사 국제부장들을 불러 점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미래로…’시리즈를 평가하면서, 소모적인 정치 기사 대신 국제화 · 미래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튿날, 9월3일은 방송의 날이었다. 이 축하연에서 대통령은 전날과 같은 발언을 했다. 방송이 국민의 시야를 세계로, 미래로 확장시키는 데 이바지해 달라고 주문한 것이다. 그즈음 선두주자인 ‘미래로…’ 시리즈는 ‘21세기 대륙’을 외치며 외국 자본을 적극 유치하는 중국 경제의 오늘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정부 정책 홍보 프로그램인가”
 이때쯤 국내 주요 일간지도 ‘뛰기 시작했다’. <중앙일보>는 ‘선진국 무엇이 다른가’(9월21일부터)를 시리즈로 시작했고 <서울신문>은 ‘세계의 개혁 현장’을, <국민일보>는 ‘친절한 이웃 밝은 사회’에 이어 ‘도전하는 신한국 - 우리 경제 우리가 해낸다’를 캠페인하기 시작했다. 시리즈 분량에서 차이는 나지만 <동아일보>는 ‘세계 초일류 기업을 가다’를, <한국일보>는 ‘고비용 벽을 깨자 - 경쟁력 강화 이대로는 안된다’를 보도했다.

 방송사는 가을 프로 개편(10월18일)을 계기로 기다렸다는 듯이 ‘21세기’ 시리즈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MBC와 sbs는 10월20일 각각 ‘21세기 세계가 앞서간다’와 ‘21세기에의 도전’ 시리즈 첫 회를 방송했다. sbs는 이어 11월14일 ‘21세기 신한국의 선택’을 창간특집으로 3시간 동안 방송했고, 17일부터는 연중 기획 ‘지구촌이 뛰고 있다’(50회분)를 시작했다. KBS는 10월18일 첫 선을 보인 ‘KBS특별기획’ 프로그램을 통해 11월 말부터 ‘이것이 경쟁력이다’를 내보낼 예정이다.

 ‘미래로 뛴다’를 도화선으로 한 언론의 21세기 캠페인 시리즈를 보는 시각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특히 기획 동기와 배경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없다. 그렇지만 기획 · 취재의 졸속성이나 유행병이라고까지 표현되는 언론의 ‘냄비 현상’ 그리고 지나친 목적주의에서 비롯된 객관성 결여 등에 대한 문제 제기는 적지 않다.

 기획의 부실함은 기사에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방송사의 경우 기획 및 취재 신간의 부족이 그대로 화면에 나타났다. sbs는 일본 NHK가 한달 전에 제작 방송한 내용을 특별기획으로 내보냈다(10월20일). 취재 기간의 빠듯함은 MBC도 마찬가지였다. ‘21세기 세계가 앞서간다’의 3회분을 한달 안에 제작하라는 것이었다. 80분자리 열여덟 편에 달하는 대형 기획물의 기획서가 한편당 단 한 장도 못되는 것이 많았다. 취재 지시를 받은 기자의 항의가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MBC노조는 지난 9월 정례 공정방송협의회에서 이 시리즈가 기획된 뒤, 제작진 간의 전체 회의가 전혀 없었고 제작진 일부가 급히 바뀌었으며 기획서가 미흡한 점 등을 들어 ‘21세기 세계가 앞서간다’가 대통령이 방송의 날 축하연에서 ‘방송이 세계로 미래로…’라고 언급한 시점에서 급속히 추진됐다고 주장하며 기획과정을 밝히라고 사측에 요구했다. 이에 대하여 사측은 “이번 추 · 동계 개편을 맞아 반영한 것일 뿐이다. 대통령이 한마디 했다고 따라가는 식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방송사의 자체의 의지이지 외압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언론계와 언론학계에서는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언론이 청와대의 의중을 미리 읽어, 정책 홍보성 기사를 보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구시대와는 방법이 다를 뿐 청와대가 엄연하게 언론에 대해 압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미래로 뛴다’에 대한 극찬에 이어 김정남 교육문화수석이 9월21일 관훈토론회에서 발표한 언론관에서 이같은 ‘혐의’는 더욱 짙어졌다.

 김수석은 “언론이 개혁 파트너가 되어 국민의 사고를 대전환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상황을 선도하는 언론을 강조한 그는 이어 “언론이 국제경쟁력을 키우는 데 향도가 되었으면 한다”면서 정부와 언론이 “차원 높은 협력과 역할 분담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측은 언론에 대한 통제는 전혀 없다고 부인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요즘 어느 언론이 청와대의 말을 듣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최근 언론의 캠페인 기사는 당연한 판단이며, 상식의 일치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기 비하 통한 경각심 부각 지양해야
 21세기 캠페인 기사에 대한 비판은 과장과 왜곡, 현란한 수사학 등 기사의 객관성 여부와 자기 비하를 통한 경각심 부각의 문제점 등으로 모아진다. “30년 동안 성장해온 용이 하루아침에 지렁이로 전락하는가.” 21세기 캠페인 기사들이 과장이 너무 심하다는 한 경제학자의 비판이다.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 중국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외면한 채 그들의 장점만을 일방적으로 부추겼다는 지적이다.

 럭키금성경제연구소 국제경제실 김도경 실장은 “최근 언론이 지적하는 내용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기사들은 우리 기업이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도하는데 그렇지 않다. 객관적인 보도가 아쉽다”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이나 동남아가 기사에서 예견한 대로 선진국이 될 것인지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앞으로 나타날 이해집단 간의 갈등, 교육 문제와 인종 문제 등을 과연 그들이 무리 없이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캠페인 기사는 치밀한 계획과 밀도 있는 메시지 그리고 수용자의 감성이 아닌 지성에 호소해야 효과를 거둔다고 지적하는 박영상 교수(한양대 · 신문방송학)는 최근의 캠페인 보도가 “정교한 전략과 기초적 철학에 바탕을 둔 논리 없이, 즉흥적인 형식만 표출한다”라고 비판했다.

 <한겨레신문> 신문주평에서 신태섭씨(성균관대 강사 · 언론학)는 ‘신한국 건설’ 기획기사들이 “경제를 균형 잡힌 국제경제적 관점이 아니라 독점 대자본의 일방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편향성”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 기사들이 독자에게 위기감을 심어주면서 “예전의 국민동원 방식을 형태만 달리하여 재생산하는 느낌”이라고 평했다.

 경제를 살리자는 최근 캠페인 기사가 경쟁 논리만을 부각한다는 시각도 있다. 성경륭 교수(한림대 · 사회학)는 이같은 성격의 보도들이 국가 단위 이기주의에서 출발하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국제화는 경쟁 논리와 공존 논리를 병행하면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비판에 대하여 ‘미래로 뛴다’ 기획 · 취재진의 일원이었던 신문사 경제부장은 “기획 단계에서 일부 비판과 오해를 의식했다”라고 말했다. 시리즈 초기에 정부 일각에서 사정 바람을 멈추게 하려는 반개혁적 의도가 아니냐 하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이 기획이 김영삼 정부뿐 아니라 각계 각층의 국제화와 미래지향적 시각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기사의 객관성에 관한 비판에 대하여 그는 “선진국이 우리보다 못한 것은 뉴스가 된다. 그러나 후진국이 우리보다 못한 것은 뉴스가 되지 못한다”면서 지도력, 행정 서비스, 국가 경쟁력, 외국이 투자 유입 등 동남아 국가들이 가진 장점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21세기 캠페인 시리즈의 저변에는 한국 언론이 ‘한국병’이 깔려 있다.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서울지국장 심재훈씨는 “언론은 관보가 아니다. 민주사회의 언론은 국민의 의향을 권부에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한국 언론은 국가의 과제를 설정하고 분석하는 기능이 자의적이고 즉흥적이고 일과성이다. 언론의 이같은 태도는 결국 국민의 합리적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고 그는 지적했다.
李文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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