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처방전 두러싼 진통
  • 부산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0.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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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노조, 비리근절 위해 ‘특정상품 기재’중지 요구

 명의도 자기 병은 스스로 못고치는 것인가, ‘병’울 고치는 데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서울대병원이 70일이 넘는 속앓이를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노사간의 단체협약 갱신교섭이 ‘90년도 임금의 20.8% 인상, 승진적체 해소, 인사비리 척결, 약처방전의 일반명화“를 요구하는 노동조합측과 ”임금인상은 5%로 하되 그 외의 문제는 단체협약 대상이 아니다“라는 병원측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는 바람에 큰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오랜 병은 지난 2월5일 서울지방노동위원회가 ‘외부적 수술’인 직권중재에 나섬으로써 더 악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임금인상은 9%로 하되 인사문제와 처방전문제는 단체협약의 교섭대상이 될 수 없다‘는 지방노동위원회의 중재재정안은 병원측의 입장에 일방적으로 손을 들어준 것이라며 노조측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위원장 金有美(31)씨는 ”임금인상률도 문제지만, 처방전이나 인사문제를 교서대상에서 아예 제외한 것은 의료비리를 해결하려는 노조측의 노력을 근원적으로 봉쇄하는 처사“라고 비난한다.

  사실상 이번 서울대 병원분규의 쟁점 가운데 의료계 안팎으로부터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의료비리와 관련해 제기된 ‘처방전의 일반명화’문제이다. ‘처방전 일반명화’는 한마디로 이제까지 처방전에 써오던 특정 상품명(예:잔탁) 대신에 성분명(일반명.예:라니티딘)을 쓰자는 것으로, 노조측의 宋智姬(29)교육부장은 “이 제도가 실시되면 제약회사와 병원간의 뒷거래가 사라지고 그만큼 환자들의 부담도 즐어들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동안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온 제약회사와 병원간의 뒷거래가 ‘사실’로 밝혀진 것은 지난해 11월 감사원의 대대적인 감사에서였다. 당시 감사원 발표에 따르면 서울시내 4개 종합병원의 랜딩비(약을 처음 채택하면서 받는 돈)가 월평균 2백12억원, 리베이트비(그 약을 계속 처방해 주는 대가로 받는 돈)가 1천5백억원으로 엄청난 액수였다.

  이런 뒷거래가 밝혀지면서 제약업체가 뿌린 돈이 결국은 약값으로 환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되는 점, 막대한 홍보비와 판촉비를 뿌릴수 있는 회사들이 대부분 외국의 다국적제약회사 혹은 외국과 기술제휴를 맺은 국내 대기업들이라서 우리나라 중소제약회사들의 활로를 막는 점, 리베이트비를 많이 받기 위해서 특정 약품을 과잉처방하거나 오용할 가능성이 있는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따라서 노조측의 제안은 그동안 구조적인 의료비리의 부작용을 염려해온 의료계 종사자들에게 상당히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병원측은 노조측의 몇가지 주장 가운데서도 특히 이 문제에 관한 한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趙南春약무과장은 “병원에서는 이미92%에 이르는 약품을 일반명으로 철저한 공개입찰로 구입하고 있어서 처방전에 어떻게 기재하는가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전제한 뒤 “처방전 기재방식은 어디까지나 의사의 고유권한이자 관습”이라고 못박는다. 그러나 이런 병원측의 주장에 대한 노조측은 “약품 구입을 일반명으로 하고 있다면 그태여 비리의 소지가 있는 상품명 기재를 고집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반론을 펴고 있다.

당국 중재안. 단체협약 범위 지나치게 축소 

  한편 의료인들 가운데에는 ‘단순한 관습의 문제’가 아닌 좀더 ‘전문적인’ 이유로 ‘처방전 일반명화’에 반대의견을 나타내는 이들도 있다. 약학계의 원로 洪文和(전 서울대 교수)박사는 “같은 성분의 약이라도 제약회사에 따라 제조과정이 저마다 다르고 생체 내에서 흡수ㆍ이용되는 율이 다른 만큼 단순히 성분명만 쓰기 어려운 의학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약품을 둘러싼 의료비리가 있다면 공정거래법 등을 엄격히 적용해 법으로 막아야 할 것”이라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렇듯 처방전 문제는 의료비리 근절과 국민건강, 존중되어야 할 의사의 전문적 판단이 얽힌 문제이니 만큼, 당장에 어떤 결론을 내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번 분규에서 보여준 당국의 지나치게 편협한 노조관에 있는 듯하다. 서울대병원에 내려진 서울지방노동위원회의 이번 중재재정안은 노조가 제안하 “처방전과 인사비리는 노사협약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박음으로써, 단체협약의 범위를 지나치게 축소시켜 해석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더욱이 이번 중재재정은 노동부가 산업평화 조기정착을 위해 ‘불법쟁의 유형에 관한 지침’‘을 내놓은 이후 첫 사례였던만큼 앞으로 다른 노사분규에도 적용될 것으로 보여 노조쪽의 운신의 폭은 더욱 좁아질 전망이다.

  회사 전체의 입장은 생각하지도 않고 일방적인 임금인상만 요구하는 것은 ‘노조의 이기주의’라고 비난하는 당국이 정작 자신이 속한 집단의 비리를 해결하려는 노조의 노력을 원천봉쇄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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