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양심수에게 자유를”
  • 김당 기자 ()
  • 승인 1990.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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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ㆍ金 석방합의 본 장기수 徐勝씨 등 단식투쟁

 지난 2월3일 가진 3당 공동대표 청와대 모임에서, 金泳三씨는 서승씨를 비롯한 구속자 대폭석방을 요구했고 盧泰愚대통령도 ‘국민화합의 차원에서’이를 받아들였다. 청와대 발표에 따르면, 구속자석방과 관련, 재일교포 간첩사건 장기수인 徐勝, 전민련 공동의장 李富榮씨의 석방은 긍정 검토하되 文益煥목사 석방은 현실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3인이 의견을 모았다 (이부영씨는 2월5일 구속취소결정으로 석방되었다).

  국민들은 졸지에 여당 공동대표가 된 김영삼씨 입에서 “꼭 석방시키겠다”는 얘기가 나온 서승이란 사람에 대해 여간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년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다른 정치범들과 달리 언론에서도 철저히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모른 체한 까닭은 간단하다. 서씨가 ‘재일동포 간첩’이라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71년에 육군보안사령부에서 발표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기억하는 이라면 서승이란 이름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보안사에서 발표한 그 사건의 ‘전모’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간첩 서승: 북괴 재일공작지도원인 친형 徐善雄(41년생)에게 포섭돼 67년 8월에 1차 입북. 간첩교육을 받고 68년 4월 교포유학행으로 가장해서 서울대에 침투, 암약타가 70년8월 동생 서준식을 데리고 재입북, 밀봉교욱을 받은후 서울대를 거점으로 지하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던중 결정적 시기에 학생봉기,박대통령 3선저지 각 대학 연합전선 형성 등 추가지령을 받고 재암약…수차례 출입국을 되풀이하며 국가기밀을 탐지, 누설하는 등 간첩활동을 함.

  그러나 그 전모에는 지금껏 별로 드러나지 않았던 몇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다.

  우선 서씨 형제가 체포된 때는 대학생 시위가 터지기 전이다. 서승씨는 71년3월6일 일본 고향의본가에서 겨울방학을 지내고 입국하다 김포공항에서 체포되었다. 동생 준식은 그로부터 열흘뒤에 마찬가지로 김포공항에서 체포되었다. 따라서 4월 들어 본격화된 반정부시위를 배후조종했다는 공소내용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둘째, 당초 보안사에서 발표하기로는 간첩 10명을 포함한 4그룹 51명을 일망타진했다지만 실제로는 검거시기가 제각기 달랐고 서씨 형제로서는 나머지 3그룹 사람들과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다. 실제로 그해 5월19일 검찰이 기소한 학원간첩단 관련자는 17명뿐이었다. 더욱이 최종심 확정판결에서 실형판결을 받은 이는 5명뿐이었고 그나마 서울대 그룹에서는 서씨 형제뿐이었다. 나머지 간첩5명과 서씨 형제가 북괴의 지령을 받아 포섭했다는 20명은 아무도 실형을 받지 않았다.

셋째, 서승씨는 한국 유학중 우연히 친지의 소개로 김상현의원 집에서 6달쯤 기숙했는데 이것이 사단이 되어 당시 대통령후보인 김대중씨와의 ‘관계’를 자백하라는 심문 및 고문을 견디지 못해 수사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석유난로를 껴안고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이나 북이나 모두 내조국”

  넷째, 재판은 위압적인 사회분위기속에서 진행되었다. 71년 19월15일 위수령을 발동하여 대학 휴교령이 내린 탄압국면속에서 10월22일 1심 선고공판이 열리고 서승씨는 사형, 서준식씨는 징역 15년이 언도되었다. 항소심은 71년 12월6일 박정권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 군사파쇼로 치닫는 가운데 72년 1월 진행되었다. 공판에서 서준식씨는 “남이나 북이나 모두 나의 조국이다‘라고 진술하면서 북한을 한번 방문한 것말고는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했으나 오히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선고는 징역 7년)

  그뒤로 그해 10월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유신독재정권이 들어선 가운데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서승씨는 최후진술에서 ‘적극적민족주의’실현을 위해 “한국에 유학했고 북조선에 갔다온 사실도 있었다”고 신술했다.

그러나 간첩혐의를 비롯한 그밖의 공소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음에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구형은 사형)

  그 이후 78년 5월 서준식씨는 7년 형기를 마쳤으나 법무당국은 비전향자임을 구실로 사회안전법을 소급 적용, “죄를 다시 범할 현저한 위험성이 있다”하며 보안감호처분을 명령했다. 서씨는 그뒤로도 2년마다 한번씩 보안감호처분이 연장되어 꼬박 10년을 덤으로 더 살다가 88년5월에야 출소했다. 한편 서승씨는 88년 12월21일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되었다(93년 3월 만기출소 예정).

  현재 서승씨는 대전교도소에 수감중인 10명의 양심수들과 함께 2월1일부터 단식중이다. 그들의 요구사항은 국가보안법 철폐, 양심수 전원석방, 사상전향제도 폐지 등이다. 서씨는 석방되는 그날까지 단식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한편 71년 4월부터 모친 오귀순씨는 두아들을 면회하려고 두달에 한번꼴로 현해탄을 건너야 했다. 그해 7월 세 번째 방한 때 재판정에서 비로소 두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아들은 한쪽 귀와 입이 문드러져 있었다. 79년 11월까지 60여번이나 현해탄을 건너면서 마지막 남은 한방울 눈물마저 현해탄에 다쏟고 정작 아들 앞에서는 늘 웃어야 했던 그 모친은 끝내 두아들의 석방을 못본 채 80년 5월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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