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정치 압박속 착잡한 분노
  • 김동선 편집위원 ()
  • 승인 1990.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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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규명 없는 光州항쟁 매듭에 시민반응 엇갈려… 해직교수단은 특별법시안 국회제출

 지난해 12월15일 1盧3金의 ‘5공청산’에 대한 청와대 회담에서 합의된 11개항 중 광주문제와 관련된 것은 정고용씨와 이이성씨 공직사되, 광주시민의 명예회복, 사망자 유족과 부상자에 대한 보상 입법등이었는데, 이에 대해 광주항쟁 관련자들은 즉각적인 반발을 보였다. 5ㆍ18유족회 회장 전규한씨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합의한 사항들이 5공청산과 광주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먼 것들로 극민을 기만한 대야합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광주문제 해결은 머저 진상이 규명되고 책임자 처벌과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이러한 최소한의 해결방안은 논의되지 않은 채 보상문제만 거론되는 것은 정치적인 쇼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밝혔다.

  항쟁 당시 삼앚 1백93명(군ㆍ경 27명포함), 심사 결과 항쟁과 관련 행방불명된 사람 24명, 부상후 사망자 61명 가운데 항쟁과 직ㆍ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명된 사람 40여명, 구속자 4백21명, 2?3개월간 구금당했다가 풀려난 사람이 3천여명에 달했던 이 미증유의 비극적 사태에 대해 청와대 ‘타협’이 광주시민들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타협 직후(12월25일) 기자가 광주를 방문했을 때, 광주의 불만은 도시 곳곳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5ㆍ18항쟁관련자, 지식인, 학생, 일반시민 모드 표현은 각기 달랐지만, 일치된 목소리는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없이 보상문제만 거론한 것은 광주 시민을 모독하는 ‘야합’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목소리속에는 크게 두 갈래 줄기가 있었다. 그 하나는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단호한 결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고아중가 또다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는 우려속에서 ‘매듭’을 원하는 경향이었다. 전자는 향쟁관련자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고, 후자는 일반지식인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얘기되고 있었다.

  타협을 거부하고 5월항쟁정신과 그 역사적 의미를 계승해야 된다는 주장이 활화산처럼 분출되고 있는 곳은   望月洞묘역이었다. 80년5월29일 전남 도청앞 상무관에서 청소차 한대에 희생자 유해가 든 관 10개씩이 실려 이곳으로 얾겨져 아무렇게나 묻힌 것이 모드 1백26구. 그러나 당시 이곳이 성역화 될 것을 우러한 당국은 묘들을 부산하기 위하 84년 이지방 상공인들로 구성된 전남지역개발협의회를 앞세워 1천만원씩을 주고 이장을 주선, 85년11월까지 26기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그후 다른 지역에 묻혀 있던 희생자가 이곳으로 들어왔고 5ㆍ18에 연루되 복역하다가 숨진 전남대 박관현군과 최루탄에 희생된 연세대 이한열군 등 27기가 새로 믇혀 현재1백28기가 안장돼 어느새 ‘聖地’가 되었다.

  전남도청에서 11km떨어진 야산지역에 있는 망월동 묘역에 들어서면 ‘임을 위한 행진곡’등 운동가요가 스피커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고, 각종 단체에서 내걸은 현수막과, 겨울인데도 wmf을 잇는 참배객들이 영령들 앞에서 묵념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이 聖地가 되었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기자가 망월동을 찾았을 때, 학생들이 삼삼오오 찾아와 영령들 앞에서 묵념을 올린 뒤 예외없이 “기만적인 5공청산 깨부수고 학살 원흉 처단하자”는 구호를 외쳐댔다.

  망월동에서 만난 학생들은 청와대 합의는 ‘기만’이며, 그 기만에 승복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혼자 찾아온 홍상희씨(고려대3년)는 “어느 고수ㅏ 정치인들은 장사꾼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는 말씀을 새삼 하셨는데, 이번 합의를 보고 그 말씀을 새삼 되새겼다”며, “망월동에는 오늘 처음 와보았지만 이곳에 와보니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꺄달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항쟁 당사자들 청와대 타협에 크게 반발

  묘지 관리소측에 따르면 한겨울인데도 망월동에는 하루 1백여명 이상의 참백개이 찾아온다는데 외지인들이 절반 정도이고, 최근에 달라진 현상은 참재객 중에 신혼부부들이 눈에 띄게 부쩍 느고 있다는 것이었다.

  망월동의 분위기는 5월항쟁 당사자들에게서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항쟁 당시 동청지도부에서 무장으로 계엄군과 싸웠던 윤강종씨는 “15일 합의는 깨져아 된다”며 “광주시민이 다 반대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투쟁라 것”이라고 강조하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합의문은 문구부터 기분이 나쁩니다. 나는 회담이 시작된다고 해서 밤잠 안잤습니다. 그런데 그 회담에서 나온 합의가 고작 정호용ㆍ이희성 공직 사퇴와 배상 입법이었습니다. 마치 개밥 주듯이 배상문제가 나왔는데, 두명공직사퇴와 배상으로 광주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행각한 것은 광주의 정서를 너무나 무시한 처사입니다. 원래 청문회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는데, 결국 돈받아 먹는 5ㆍ18로 변질될 것 같아 울적한 심사를 달랠 수 없습니다.”

  그들 항쟁관련자들은 단식 농성중이라고 했고 서울로 올라가 항의하자는 의견도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고 했다.

  광주항쟁관련자들의 ‘청와대 타협’에 대한 착잡한 심정은 전규한씨 표정에 더 잘 나타나 있었다. 기자와 만난 전씨는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광주가 복잡하다”는 말을 두어번 한뒤 “오늘 광주시민 두사람을 만났는데 배상을 받아야 될 것 아니냐고 합디다. 그러나 지금 광주는 정치적 현실과 역사적 문제 상이에서 갈등이 심각합니다. 항쟁 당사자들은 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6공이 5공의 연장위에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번 합의는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고…우리는 10년간 정말로 외롭게 투쟁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마음적으로 병이 들어 4자회담에 대해 싸울 기력도 없습니다.” 그는 담배를 계속 빨아대며 ‘착잡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의 말대로 10년 세월 동안 감시ㆍ연행ㆍ연금속에서 외롭게 투쟁한 결과가 고작 정호용ㆍ이희성씨 공직사퇴와 배상문제로 귀결됐으니 ‘허탈감’을 못 이기는 것 같았다.

  이밖에 만난 광주시민들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없는 광주문제 해결은 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일부 시만들은 정치적 현실은 어쩔 수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우리가 그들을 용서해주면 그것이 곧 해결”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광주시민들의 이러한 반응과는 대조적으로 대통령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광주문제의 정치적 해결이 ‘난망함’을 예측하고 역사적 조명작업에 착수하면서 어떤 매듭을 위해 노력하는 그룹도 있다. 이들은 5ㆍ18항쟁 관련 광주 해직교수단.

  전남대의 안기숙, 김동한교수 등은 서울의 이영희, 백낙처,장을병고스 등과 함께 현대사사료연구소를 만들어 광주민주항쟁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안교수는 “광주문제는 이제 역사로 넘어왔습니다. 광주항쟁의 정신을 살리려면 우선 그정신이 무엇인지 해석해야 되는데, 이작업의 기초는 자료 수집입니다. 벌써 10년이 지났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광주항쟁 관련자 5백10명을 면담하여 구술을 받았는데, 그 분량이 2백자 원고지로 2만2천매에 달합니다. 현재 구술자료는 마루리됬고, 군작전일지, 수사기록 등 1백9건의 문건도 확보했습니다. 남은 부분은 재판기록인데, 우선 이자료들을 12권의 책으로 출판할 예정입니다.”

  현대사료연구소는 광주항쟁 10주년에는 대대적인 학술발표회도 계획하고 있다. 이학술발표회에서는 광주항쟁의 경제사회적 배경, 무장항재의 성격, 정치권력창출과정, 광주항쟁의 사회 심리적 충격 등의 논문들이 발표될 예정이다.

全전대통령 증언. 광주시민 또 격분시켜

  청와대타협 이후 정치정세변화에 따라 민심동향도 크게 변했다. 특히 전두환전대통령의 국회증언 직후에는 광주시민들의 감정이 격앙됐었다. 자위권발동 운운의 증언이 광주 시민들을 또 자극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1월22일 민정ㆍ민주ㆍ공화합당선언이 있은 직후에는 청와대 회담에서 합의된 ‘배상법’마저 물건너간 것 아니냐는 시각이 팽배해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5ㆍ18민주항쟁 관련 해직교수단은 모임을 갖고 ‘5월고아주문제는 역사적 평가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고 현실 문제 처리에 앞장서는 일을 시작했다. 이들은 이광우(전남대 행정대학원장), 이변기(전남대 법과대학장), 박동길(조선대 영문과교수),김제안(조선대 경제학과교수) 등을 대표로 뽑아 ‘5ㆍ18광주민주항쟁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배상 등에 관한 법률’시안을 작성하여 1월30일 국회 등 관계 요로에 제출했다. 이들은 특별법 제정 촉구 취지문에서 “정치권의 개편을 이유로 법제정을 천연시키지 않도록 강력히 촉구한다‘며 그들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곳 시민들의 여론은 먼저 진상을 규명한 뒤에 비로소 그 결과에 따라 후속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번 법제정 시도는 수순을 무시한 채 정략적으로 적당히 유월하려는 정치권의 반역사적 행위라고 주장하며므로 우리들은 진퇴유곡의 착잡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 우리가 고뇌하고 있는 것은 시민들의 원칙론을 따라야 함이 순리이나 정국불안의 장기화로 민생위협과 공동체 균열의 조짐이 우려되고 더욱이 피해자와 그 유족의 처참한생활상이 더 이상 방치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욕을 먹더라도’현실적 매듭을 짓는 것이 광주사회를 이끌어가는 지성인의 사명이기 때문에 이법의 시안을 작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5장27개조로 되어 있는 이 특별법 시안의 특성은 ‘집단배상 원리’에 따라 광주시민 모도가 5ㆍ18의 피해자임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즉, 사망자, 행불자, 부상자, 구속자, 면직자 뿐만 아니라 광주시민 모두가 5ㆍ18의 피해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그동안 거론되어온 광주배상 문제와 다른 점이다.

 광주 문제가 배상으로만 매듭된다면 그석이 광주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해직교수단이 제출한 특별법 시안이 원안대로 통과된다면 어떤 ‘매듭’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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