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의 뜻 모은 방송민주화운동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0.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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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9월9일자 <MBC노보>에는 한일선기자의 참회록이 실려 있다. 그는 86년 6월 서울 중부경찰서에 출입하면서 權仁淑씨에 대한 성고문 사실을 특종취재했으나 데스크가 묵살하는 바람에 단 한줄도 보도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으면서 자신은 그 때 “기자도, 인간도 아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87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KBS와 MBC 양방송사 노조를 중심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어온 방송민주화운도은 5공시절 방송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뿌리내린 그같은 자괴감도 원동력으로 한다.

방송인들의 자괴감은 86년 2월부터 일어난 KBS시청료거부사태를 맞아 한껏 증폭되었고, 87년 6월항쟁 당시 시위대에 의해 취재차량이 습격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운동에너지로 전환하게 된다. 방송 종사자들의 각성이 처음 조직적 형태로 가시화된 것은 87년 7월13일. 이날 MBC보도국 기자 96명은 ‘방송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다짐’이란 성명을 발표, 간부 사원들에게 “기회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민주화에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민주화요구는 회사 전체로 급속히 확산돼 7월16일에는 각 국 · 실 사원을 망라한 ‘방송민주화추진위원회’(방민추)가 결성됐다. 그러나 방민추는 조직력과 추진력에 문제를 보여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유명무실해져버리고 말았다.

이후 방송민주화운동은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87년 12월9일 MBC노조가, 다음해 5월20일 KBS노조가 각각 결성되면서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양방송사노조의 사내민주화 요구는 88년 7월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KBS노조는 7월27일부터 鄭九鎬사장과 본부장 전원 퇴진 및 특채자들의 면직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했다. KBS의 노사갈등은 한달여를 끌다가 노사가 ‘4개 본부장 추천제’에 합의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정구호사장은 그해 11월 퇴진했으며 후임에 徐英勳사장이 임명됐으나 그는 얼마전 사실상 정부측에 의해 해임됐고 그 후임인 徐基源사장은 현재 노조의 강력한 퇴진요구에 직면해 있다.

MBC노조는 87년 7월18일부터 黃善必사장 퇴진운동을 전개, 8월26일 방송사상 처음으로 파업에 돌입, 4일만에 회사측과 황선필사장의 퇴진 및 각 국 · 실장의 중간평가 실시 등에 합의하고 파업을 철회해다. MBC노조는 이후 이사회가 회장으로 임명한 崔錫采씨(성곡언론문화재단이사장)와 사장으로 임명한 金榮洙씨(전 유정회 국회의원 · 한국연합광고사장)의 출근저지투쟁을 전개, 취임을 백지화시키기도 했다. MBC노조는 지난해 9월8일에도 3개국장의 추천제를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가 파업 12일만에 3개국장의 3배수 추천제를 관철했다.

양방송사 노조가 추진해온 방송민주화운동의 방향은 △관선사장의 축출 △권력의 편에 서서 출세가도를 달려온 일부 간부 거세 △권력기관을 등에 업고 입사한 특채자 처리 △누적된 편파 · 정실인사 시정 △왜곡 · 편파보도의 책임자 처벌 △80년 해직자 원상회복 및 피해배상 △80년 해직 당시 내부협력자 색출 △보도 · 편성 책임자에 대한 견제장치 마련 등으로 요약된다.

그동안 양사 노조는 대표적 5공언론인으로 지목된 황선필 · 정구호씨 축출하고, 보도 · 편성책임자의 추천제 혹은 중간평가제를 확림시키는 한편 일부 특채자들을 면직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노조의 이같은 활동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와 경영진측은 물론 일부 보수적 언론인들도 “노조의 요구가 너무 지나치다. 인사권 · 편집권 모두를 장악, 노조독재를 하려고 한다”고 비난하는가 하면 “도대체 지금 이 시점에서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같은 비난에 대해 KBS노조의 한 관계자는 “노조가 독재를 한다니 당치도 않다. 오히려 너무 무력해 탈이다. 5공 시절 편파 · 왜곡보도의 책임자 중 누구 한사람 자기발로 걸어나간 사람이 없다. 80년 해직의 내부협력자도 아직 사내에서 활보하고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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