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량은 늘고 돈은 바지고
  • 금희중 (경향신문 경제부장) ()
  • 승인 1990.05.0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속빈 강정’식 허약기업 주식이 침체의 근본 원인

우리나라 증권시장을 흔히 ‘냄비체질’로 표현한다. 쉽게 달아오르고 도 쉽게 식어들기 때문이다.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들의 기질도 마찬가지여서 株價가 떨어지면 항의시위를 벌이고 증권사 객장에 난입, 시세를 알리는 전광판을 꺼버리는 등 소동을 빚곤 한다. 정부당국의 정책도 마찬가지이다. 부양책과 억제책을 번갈아 동원, 증권시장이 스스로의 힘으로 안정기반을 다질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최근 증권시장이 1년 이상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경제여건이 나쁘기 때문이지만, 단순한 침체국면의 지속이 아니라 급등과 급락이 거듭되면서 하강추세의 대세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허약체질의 반증이라고 볼 수 있다. 선진국의 증권시장에서도 주가 폭등과 폭락현상이 나타나곤 하지만 우리와는 사정이 다르다. 뜬소문이 아닌 확실한 재료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증시의 체질약화 요인은 1차적으로 상장회사 자체에서 찾아진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텅비어 있는 회사의 주식이 액면가의 두배, 세배로 팔리고 있는 것을 정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외국의 예에 비해 우리나라의 주가가 아직 낮은 수준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기업의 ‘실력’과 비교하면 오히려 높다고 보아야 한다. 내실을 다진 기업이 얼마나 있고, 세계시장에 떳떳하게 내어놓을 만한 제품을 만들고 있는 기업이 또 얼마나 되는가를 따져보면 실력의 수준이 어디에 와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기초기술이 뒤져 있고 외국의 신개발품을 이리저리 뜯어맞추어 모방품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허약체질의 기업이 발행한 주가가 안정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최근 몇해 동안 기업공개가 유행처럼 번져 너나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주식을 발행, 증권시장에 뛰어들면서 우리나라 상장주식의 평균수준을 더욱 형편없이 끌어내렸다. 이른바 ‘물타기’, ‘뻥튀기’라는 자본금 불리기 경쟁이 그것이다. 10억원이던 자본금이 어느날 갑자기 30억원, 40억원으로 불어나고 곧이어 기업이 공개된다. 그래서 ‘실력’ 이상의 주식이 증권거래소에 상장되고 액면가의 두 · 세배로 거래되고 있는 것이다.


상장기업 평가에 허점

최근 일본의 한 연구기관에서는 우리나라의 종합주가지수가 7백70선까지 내려갈 것으로 예측했었다. 이때가지만 해도 국내의 증시전문가들은 종합주가지수 8백이 심리적 저항선이라고 믿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수 8백선은 힘없이 무너졌고 8백90, 8백80선마저 연이어 무너져내리는 사태가 현실로 나타났다. 韓 · 日간의 예측치가 차이를 보인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쪽의 상장기업에 대한 평가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장기업의 내실여부를 떠나서라도 최근의 경제여건은 주가를 끌어올릴 만한 상황이 결코 아니다. 생산 · 수출이 모두 활력을 잃고있고 국제수지도 적자기조로의 회귀위기에 몰려 있다. 노 · 사간의 갈등구조도 개선조짐을 나타내지 않고 있고 정치 · 사회의 분위기도 왠지 어둡고, 들어올리기 어려운 무거운 물체에 의해 짓눌려 있는 형국이다. 증권시장이라는 것이 경기를 민감하게 반영할 수밖에 없고, 다라서 현재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주가가 오르리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증권시장의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데에는 정부의 책임도 크다. 정부가 금융거래 實名制를 실시하겠다고 의욕적으로 나섰던 지난해 4월부터 주가가 뚜렷한 하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때부터 겉으로 드러나기를 꺼리는 대형투자자들이 속속 증시를 떠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현상은 실명제실시 ‘유보’방침이 정해진 오늘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현실 직시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우수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우리나라 경제관료들의 ‘한건 위주식 탁상행정’은 지난해 12월12일 황급하게 증시부양책을 발표함으로써 그 단견성을 또한번 드러냈다. ‘예상된 부자가용’에 대해 중앙은행의 발권력가지 동원해서 주식매입자금을 ‘무제한’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후 주가는 반짝 오름세를 탔으나 하강국면이라는 대세를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정부는 ‘국민주’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면서 전국민의 주식투자자化 정책을 이끌어왔다. 한편에서는 기업에 대한 은행대출을 억제하면서 주식이나 社債를 발행, 증권시장을 통해 자금을 직접 조달하라고 독려해왔다. 금융실명제라는 개혁적인 정책을 내어놓아 증시로부터 자금이 빠져나가도록 해놓고 다른 한편에서는 주식의 공급이 대량으로 늘어나도록하는 어이없는 정책을 펴온 것이다. 그야말로 矛盾이 아닐 수 없다. 어떠한 방패도 꿰뚫을 수 있는 창과 어떠한 창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를 동시에 선전하며 동키호테처럼 ‘자본시장육성 · 발전’시책을 펼쳐왔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창도 방패도 모두 불량품인 것으로 드러나 주가가 계속 내리막길을 걷자 이제는 ‘증권투자는 자기판단과 책임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다. 모든 잘못의 책임을 투자자들에게 떠넘겨버린 것이다.

주식에 투자해서 손실을 보았다면 투자자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주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부가 국민주다, 자본시장육성이다 하는 그럴듯한 말로 투자대열로 끌어들인 것은 사실이다. 6백만명 가까이로 추정되는 주식투자인구 중 절반 이상이 ‘주식투자는 괜찮은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증권에 손댄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1년간 23%의 손실을 입혀놓고 이제와서 “자기판단과 책임” 운운하는 것은 떳떳치 못한 자세다.

누가 손해를 보고, 안 보고를 떠나서 장기적으로 증권시장을 육성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공개제도를 건전하게 이끌고 뜬소문에 의해 주가가 급등 · 급락을 반복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투자자들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간접 투자종목을 더욱 다양하게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정책의 현실성을 기를 수 있는 방향으로 증시정책이 집행되어야 한다.

경기가 가득이나 나쁜 대에 공급물량을 늘리면서 증시자금이 빠져나가도록 하는 정책이 거듭되어서는 자본시장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투자자들도 단기차익에만 투자목표를 설정하지 말고 또 투자에 따른 응분의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정부 · 상장회사 · 투자자 모두가 새로운 다짐을 하지 않는 한 증시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